31화. 되돌아온 국립묘지
마뉴엘 후작은 자신의 서재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서성거렸다.
그런 그의 불안한 마음을 알았던 걸까. 얼마 있지 않아 서재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사비로스입니다.”
“들어와라.”
후작의 집사, 사비로스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곧바로 질문이 떨어졌다.
“구했느냐?”
“예. 각하. 비록 한 병뿐이지만 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오!”
감격한 기색의 후작은 사비로스의 몸을 둘러보았지만 그는 빈손이었다.
“근데 어찌 빈손으로 왔느냐? 구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아, 그것이 말입니다. 사실 주문을 넣는 데 성공하고 실물은 일주일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예약이 많이 밀려 있다고…….”
“아니 일주일이나 걸린다는 말인가?”
“예. 각하. 사실 조금 더 앞당길 수 없나 항의해 보았지만 저희보다 먼저 예약을 하신 분들도 높으신 분들이라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끄응. 알겠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군.”
그렇게 후작이 아쉬움을 삼키고 있을 때, 하인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손님이 오셨습니다. 랑크라트 백작가의 호손 랑크라트 백작입니다.”
“랑크라트 공이? 알겠다. 접대실로 안내하여라.”
후작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손님이 조금 불쾌했지만 그래도 이 일대에서 가장 큰 부를 쌓은 랑크라트 백작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사비로스. 최근에 랑크라트 공이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나?”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거 참 희한하군. 어쨌든 같이 가 보세.”
사비로스를 데리고 접대실로 향한 후작은 이내 풍채가 좋은 랑크라트 백작을 만날 수 있었다.
“마뉴엘 각하! 이렇게 갑자기 방문하게 되어 대단히 죄송합니다.”
“아니오. 랑크라트 공. 우리 사이에 그런 격식을 차릴 필요가 어디 있소. 자, 앉으시오.”
후작은 최대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랑크라트 백작을 반겼다.
랑크라트 백작은 그런 후작의 태도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후작이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았음에도 공의 풍채는 여전하오. 어찌 그리 듬직한 대장부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는 거요? 혹, 비결이라도 있소?”
“과찬이십니다. 각하.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보다 각하께서는 마치 회춘하신 것 같습니다. 어찌 세월이 흐를수록 점점 더 젊어지십니까.”
으레 그렇듯 온갖 미사여구가 곁들여진 대화가 오가고 어느 정도 분위기가 무르익자 후작이 넌지시 방문 목적을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이렇게 방문한 것이오?”
“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이! 찰리!”
랑그라트 백작은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을 불렀다.
그러자 상자를 들고 있는 하인이 접대실에 들어왔다.
“각하. 약소하지만 먼저 전해 드리는 연말 선물입니다.”
“아니? 하하. 이건 예상치 못했군. 내 감사히 받겠소.”
사비로스가 앞으로 나와 하인이 건네는 상자를 대신해서 받았다.
상자는 크지 않고 무게도 가벼웠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지금 확인해 보셔도 됩니다.”
“흠? 랑그라트 공이 그리 말하는 걸 보면 꽤 대단한 물건인 모양이오?”
후작은 그리 말한 뒤 사비로스에게 내용물을 확인하게 시켰다.
상자를 연 사비로스는 이내 그 안에 들어 있는 물건을 보고 두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아니 이건!”
“왜 그러나? 뭔데 그래?”
랑그라트 백작은 그런 사비로스의 반응이 흡족했는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제가 사실 에버라스트 상단주와 막역한 지우라 이번 기회에 꽤 귀한 물건을 대량으로 구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부디 부담 갖지 마시고 편안히 사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후작은 랑그라트 백작의 말을 들으며 상자의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곳에는 고급진 내장재에 둘러싸인 엄지손가락만 한 포션병 3개가 담겨 있었다.
“이건, 설마?”
“에버라스트 포션입니다.”
후작은 떨리는 손으로 포션병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포션이 노랗게 빛났다.
한동안 포션을 홀린 듯 쳐다보던 후작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랑그라트 백작을 봤다.
“아니 이 귀한 걸 세 병이나 준다니. 정말 괜찮겠소?”
“그럼요. 각하. 저희 사이가 그 정도는 되지 않습니까?”
“아이고. 고맙소.”
에버라스트 포션은 시중에 판매되기도 전에 미리 경험해 본 몇몇 귀족들로 인해 알음알음 유명세를 탄 제품이었다.
무려 부작용은 없고 100%의 효과를 보장하는 정력제.
이 소문은 사교계는 물론 조금이라도 그러한 일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라면 모두 알게 되었고 실제로 효과를 본 사례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게 되며 꿈의 포션으로 불리게 되었다.
소문이 퍼지고 얼마 있지 않아 시판이 된 포션은 오로지 에버라스트 상단의 독점판매로 이어졌다.
소문을 믿지 않는 이들조차도 한 번쯤은 경험해 본다는 느낌으로 상품을 구입하려다 보니 에버라스트 포션은 첫날부터 동이 난 것도 모자라 예약까지 줄을 서 버렸다.
결국 에버라스트 상단에서 프리미엄까지 붙이며 가격을 기하급수적으로 인상시켰지만 예약은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오히려 그 가격을 듣고 귀족들 사이에서 신뢰성이 올라가 예약이 늘어날 정도였다.
“혹시 랑그라트 공은 효과를 좀 보셨소?”
“예. 확실합니다. 이건 진짜입니다. 오늘 저녁에 한 번 복용해 보시면 믿기 싫어도 믿게 되실 겁니다. 하하하!”
“오오! 공의 말을 들으니 확실히 신뢰가 가오. 이 선물은 정말 두고두고 마음에 새겨 두겠소.”
“하하!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각하.”
그렇게 한참을 다시 주거니 받거니 하던 둘은 이내 이야기를 넘겨 포션 제작자의 이야기로 넘어갔다.
“이걸 발명해 낸 게 에버라스트 상단의 무남독녀라고 들었소.”
“아, 맞습니다. 루시아라고 하는 귀여운 아이지요.”
“허. 에버라스트 상단은 아주 꽃길이 피었군. 포션에 대한 권리는 물론 독점권까지 가지고 있으니.”
“아, 제가 듣기로 포션에 대한 특허권은 공동 제작자에게 있는 걸로 압니다.”
“공동 제작자?”
“그, 크롬웰 백작가 있잖습니까. 그곳에 최근 작위를 승계받은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는 녀석입니다.”
“크롬웰?”
후작은 곰곰이 기억을 떠올리다 이내 한 백작 가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아! 그 크롬웰이군! 그 대단했던 가문이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해질 줄이야. 그래도 갑자기 그런 인재가 나오다니 아직까지는 명맥을 유지하는 모양이오?”
“로들렌 아카데미를 재학하고 있는 모양인데 에버라스트 상단에서 독점권과 포션의 이름을 가져가는 대신 그에게 특허권을 온전히 양도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 그렇다면 그자도 돈방석에 앉는 건 시간문제겠어.”
“그렇다고 보면 되지요.”
마뉴엘 후작은 곰곰이 생각했다.
이제는 이름조차 희미해진 크롬웰 가문.
그곳에 가주이자 아직 아카데미도 졸업하지 못한 재학생.
하지만 이런 대단한 포션도 제작한 걸 보면 역시 예전의 크롬웰이 어디 간 건 아니구나 싶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일 수도 있겠어.’
후작은 랑그라트 백작이 떠나는 대로 아드리아스 크롬웰에게 후원을 하기로 결심했다.
* * *
“요즘 따라 왜 이리 귀가 간지럽냐.”
또 누가 내 이야기 하나?
며칠 전부터 체력 상승 포션의 특허 등록이 마무리되고 시판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루시아를 통해 그녀의 아버지인 윌리엄 에버라스트 홀링턴 자작을 만나게 되었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원래 상단을 꾸리는 인물이었지만 엄청난 상재(商才)로 부를 끌어모아 홀링턴이라는 이름의 영지를 구입한 인물이었다.
덕분에 준남작이었던 그의 신분도 어엿한 자작이 되었으며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계승 귀족의 위치까지 올라서게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된 건 다른 게 아니라 거래를 위함이었다.
그는 특허권의 이윤을 모두 줄 테니 3년간의 독점권과 포션의 이름을 정할 권리를 넘기길 원했다.
‘나는 당연히 땡큐지.’
나는 공익을 위해 포션을 만든 게 아니다.
그러니 내게 이득이 되는 거래라면 언제나 환영이었다.
물론 독점으로 인해 내게 들어오는 수입이 당장은 줄어들 수 있어도 길게 봐야지.
게다가 그는 내게 따로 계약금까지 안겨 주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만족한 거래였다.
“거의 다 왔나.”
읽던 책을 덮어 가방 안에 넣고 열차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잠시 멍을 때렸다.
내가 본격적으로 움직인 다음 날 방문했던 장소여서 뭔가 싱숭생숭하네.
나는 지금 빈 하르츠 국립묘지에 가고 있었다.
“이번 역은 하트벨 역입니다…….”
얼마 있지 않아 방송 안내가 들려오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라면 아직 특허로 인한 수익이 정산되지 않아 기다려야 했겠지만 윌리엄이 계약금을 빡세게 챙겨 준 덕분에 주말이 되자마자 이곳에 달려왔다.
드디어 인장 반지를 돌려받을 때가 왔다.
‘문제는 상대가 거래에 응해 주냐지.’
안 그래도 저번 일로 집회와의 사이가 틀어졌는데 과연 묘지기 파이먼이 내게 우호적일까 궁금했다.
다행인 건 파이먼은 집회 소속이 아니라는 것인데 그도 결국 흑마법사이니만큼 쉽지 않았다.
니켈의 시체를 빼내 왔을 때의 경험으로는 쉽게 되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니켈을 데려온 거에 후회는 없다. 애초에 니켈이 없었으면 볼로릭에서 죽었겠지.’
이제는 유명무실해진 인장 반지로 목숨을 건진 셈이니 어느 모로 봐도 이득인 셈이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자. 준비는 끝났어.”
나는 내 자신에게 최면을 걸듯 말하며 국립묘지를 향해 마차를 타고 갔다.
그리고 마차의 안에서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기 위해 약간의 준비를 미리 해 두었다.
국립묘지의 앞에 도착한 나는 저번과 같은 암구호를 댔다.
그러자 문지기는 저번과 달리 말미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안에 손님이 계신다.”
선객이 있다고?
만약 문지기가 그냥 사람이 있다고 말하면 민간인이 내부에 있다는 소리고 손님이 있다고 말하면 흑마법 관계자가 방문했다는 뜻이었다.
‘묘지에 방문할 흑마법사라면 네크로맨서인가? 누구지?’
네크로맨서의 수는 많지 않았기에 정체가 궁금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드넓게 펼쳐진 묘지가 보이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저 멀리 구석에 보이는 파이먼의 오두막집이 눈에 띄었다.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나.’
누가 방문한 건지 모르니 긴장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일단은 기다려 볼까 생각하며 잠시 묘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충 계산해 보니 3,000개나 되는 무덤이 있었다.
혹시나 니켈 같은 경우가 있지는 않을까 유심히 무덤의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대단하긴 하네. 이걸 매일 관리한다는 거 아니야.’
물론 정체를 숨기고 사령술을 수련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딱히 부럽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요즘 들어 나는 니켈을 소환해 놓는 것만으로도 사령술의 숙련도가 쑥쑥 성장하고 있었으니.
‘설마 그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
니켈이 진화를 하고 난 이후, 니켈을 소환하면 전과 다르게 숙련도가 빨리 올라갔다.
아무래도 내 수준에 맞지 않는 언데드를 사역하고 있어서 생긴 일인 것 같은데 긍정적인 변수였다.
그렇게 한동안 무덤들의 이름을 확인하고 있을 때 오두막집에서 사람이 나오는 게 느껴졌다.
벌컥.
“그래. 이번 일 잘 좀 부탁한다.”
오두막집에서 나온 파이먼이 떠나려는 누군가를 향해 말했다.
그리고 대답 없이 묵묵하게 떠나려는 이는 흑마법사가 아닌 용병이었다.
용병인지 어떻게 아냐고?
그야 게임 내에서 큰 사건을 일으키는 캐릭터니까.
‘네가 여기 왜 있는 거야.’
블러디 댄.
다듬어지지 않은 은회색의 머리카락을 대충 묶고 가면을 쓴 사내였다.
용병이지만 주 고객층은 우리와 같은 흑마법사나 뒤가 구린 녀석들뿐.
돈을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잔인한 짓도 서슴지 않는 녀석으로 대표적인 빌런 캐릭터였다.
‘꽤 실력 있는 용병인 데다 성격도 잔인하고 가면을 이용해 도망도 잘 치지.’
문제는 그런 그가 대형 사고를 일으킨다는 점이었다.
그 사고는 내 목숨이나 삶과도 연관된 일이기에 나도 모르게 갈등이 일었다.
‘이 녀석으로 인해 전쟁이 일어난다.’
전쟁.
가면을 이용해 한 아이를 납치한 사건으로 인해 제국과 야만족 간의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차라리 지금…….’
“음?”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보았다.
그와 더불어 내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죽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