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치킨 게임
진화는 그렇다 치고 66가지 분기는 또 뭐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이야. 용케 버티고 있네? 평범한 스켈레톤이 아닌가 봐?”
“예?”
“코덱스 아포칼립스를 들고도 멀쩡하잖냐.”
살렘의 말에 한 가지 추측이 가능했다.
설마 나태의 페이지 때문에 진화가 가능하게 된 건가?
솔직히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니켈은 괜찮은 건가?
어쨌든 나태의 페이지가 밖으로 나오자 전에 느꼈던 마나의 고동이 다시 느껴지기 시작했다.
“줘 봐. 구경 좀 해 보자.”
“살렘 예디디아. 그대는 초대한 적 없는 인물. 함부로 경거망동하지 마라.”
내가 흑막이다! 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듯한 검은 복장의 제스터가 살렘을 막았다.
그는 얼굴까지 뒤집어 써지는 검은 고깔모자를 쓰고 있어서 모습이 확인되지 않았다.
물론 나는 저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지.
“내가 설마 나태를 가지고 도망이라도 칠 거라 생각하는 거냐? 제스터, 나를 뭐로 보는 거야?”
“이곳은 집회. 일단 참가를 한 이상 너에게도 기회를 줄 테니 기다려라.”
그 순간 나는 니켈을 다시 역소환했다.
이 정도 보여 줬으면 아마 나태의 페이지가 진짜라는 것쯤은 모두 알았을 터.
갑자기 나태의 페이지가 사라지자 집회에 참석한 인원들은 황당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뭐 하자는 거지?”
“아드리아스.”
제스터와 카론이 각각 한 마디씩 내뱉었다.
하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말했다.
“나태의 페이지는 제가 찾았습니다. 나태의 페이지를 정당한 대가를 받은 뒤에 넘겨드리고 싶습니다.”
“아드리아스!”
카론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변했다.
우와. 카론이 저렇게 화낼 수도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사실 처음의 계획은 적당히 넘겨주고 그냥 콩고물이나 받으려 했었는데 즉흥적으로 계획을 틀었다.
그 이유는 바로 살렘의 참석 때문이었다.
살렘이 참가할 줄은 몰랐고 그가 내게 도움을 줄 거라는 것도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그 덕분에 이 즉흥적인 계획이 통할 것 같다는 직감이 강하게 뇌리를 뒤흔들었다.
이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집회 참석자들은 흉흉한 기세를 흘리며 내게 시선을 쏘아 보냈다.
“카론 디플렌. 그대의 제자는 미친 건가? 아니면 일부로 저런 머저리를 제자로 받아들인 건가?”
“죄송합니다.”
카론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내 이름을 외치며 야단을 쳤다.
어림도 없지.
나는 점차 강렬해지는 기세에 맞서 검을 뽑아 들었다.
“제 요구는 간단합니다. 그저 나태와 걸맞은 보상을 받고 싶을 뿐입니다.”
“으하! 으하하하하!”
옆에 있던 살렘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돌연 정색을 하며 괴물과 같은 기세를 터트렸다.
“이거, 이제 보니까 그냥 단순한 또라이였군. 어이, 아드리아스. 여기 모인 이들이 만만한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제 권리를 찾으려 하는 겁니다.”
강력한 기세의 폭풍이 나를 몰아쳤지만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리고 살렘이 무섭게 말을 하기는 했지만 그가 했던 약속을 나는 믿었다.
말을 마친 나는 천천히 검을 들었다.
내가 검을 드는 모습을 본 제스터가 마법을 사용했다.
검은 불꽃으로 이루어진 손 두 개가 그의 곁에 나타났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죽여 주지.”
“당신들은 저를 죽일 수 없습니다.”
나는 승부수를 띄웠다.
검을 역으로 들어 칼날을 잡은 나는 내 심장이 있는 쪽을 그대로 찔렀다.
푸욱!
“뭐 하자는 거지?”
“와! 저거 봐, 저거 봐! 진짜 미쳤나 봐! 개웃겨!”
주변에서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지었다.
“지금 나태의 페이지는 제 스켈레톤과 함께 아공간에 있습니다. 여기서 문제. 만약 제가 죽으면 제 아공간은 어떻게 될까요?”
전투 재능을 이용해 1mm 차이로 심장을 빗겨 간 검이 폐 근처까지 들어갔다.
검신을 따라 피가 흘러내렸다.
약간의 움직임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상황.
나는 살렘을 믿고 목숨을 건 도박을 하는 중이었다.
내 말을 들은 집회 인원들은 이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살렘조차도 입을 벌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흑마법사들 중에 정상은 없다지만 이렇게 냉정하게 미친놈은 처음인 것 같군.”
제스터가 마법을 취소했다.
“카론의 제자여. 뒷일은 생각하고 있는 건가? 여기서 네가 원하는 보상을 얻어 간다고 해도 과연 그대가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전 제 옆에 있는 분을 믿습니다.”
갑자기 살렘을 언급하자 지목된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실소를 흘렸다.
“이런 건방진 새끼. 이제 나태 따위 알 바 아니다. 감히 이 몸을 이용할 생각을 하다니. 그렇다면 이 일은 즉흥적으로 생각한 일이라는 것이냐?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생각을 했지?”
“마차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전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하고 있을 뿐입니다.”
“뭐라? 으하하하하!”
둥지에 오기 전, 이미 늦은 나이에 검을 왜 익히냐는 그의 물음에 했던 대답과 똑같은 대답을 해 주었다.
물론 굳이 왜 이렇게까지 하냐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했다.
나는 언제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왔기에 이 정도의 시도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어느새 은밀하게 다가온 무언가가 내 몸을 속박하려 들었다.
모르셰의 둥지에서 솟은 나뭇가지들이었다.
“크흡.”
나는 한시의 지체도 없이 정확하게 폐를 찔렀다.
물론 아주 약간만 찔렀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내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걸 본 모르셰가 나뭇가지를 멈췄다.
“독하군.”
제스터가 중얼거렸다.
그리고 내게 천천히 걸어왔다.
“어디 한번 해 봐라. 네가 정말로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가 다른 마법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정신 마법!’
내 머릿속을 침투하려는 그의 마법을 느꼈다.
단 0.1초. 그사이에 결국 나는 결단을 내렸다.
푸욱.
“우욱.”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을 적셨다.
“정말, 미쳤군.”
제스터가 정신 마법을 취소하고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통했나?
아니, 지금은 통한 게 중요한 게 아니다.
확실히 보여 줘야 된다는 마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찌른 것 같았다.
“하하하! 나태는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지겠군!”
“닥쳐라, 살렘. 루나! 어서 저자를 살려라!”
“심장을 찔렀는데 어떻게 살리려고. 그만 포기해, 제스터. 으하하!”
“어서 살려!”
씨발. 아직 안 죽었어.
누굴 죽은 사람으로 만들고 난리야.
“거래, 할 겁니까?”
내가 말을 하자 이제는 질린다는 눈빛을 보내오는 사람들을 보며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였다.
심장을 찌른 것처럼 보일 뿐 폐를 찌른 건데 이 정도에 죽으면 섭섭하지.
물론 꽂힌 검을 아무 조치 없이 뽑으면 죽을 게 확실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미친 새끼. 심장이 아닌 건가?”
황당한 미소를 짓던 살렘이 말했다.
“어쨌든 오길 잘했군. 나태 따위보다 훨씬 재밌는 녀석을 발견하다니. 이번만은 네 알량한 놀이에 어울려 주마.”
그는 이내 내 앞을 막아서며 내가 기다렸던 말을 드디어 시작했다.
“나는 여기 있는 아드리아스 크롬웰과 약속했다. 언제고 한 번 도움을 주기로 말이지. 그걸 벌써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일단 말해 두겠다. 지금부터 아드리아스 크롬웰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자는 내가 반드시 찾아가 죽여 주겠다. 거기다 만약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이후에 죽는다면 범인은 무조건 집회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집회를 이 세상에서 지우겠다.”
살렘 예디디아. 비록 악마라는 별칭으로 불리지만 내뱉은 약속은 절대로 거르지 않기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거기다가 그가 내뱉은 마지막 말로 인해 집회가 나를 노릴 일을 사전에 차단했다.
도리어 집회가 나를 지켜야 하는 아이러니에 빠지게 된 셈이다.
물론 집회는 단체인 만큼 총력전을 펼치면 살렘이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살렘이 과연 대놓고 싸워 줄까?
집회 입장에서는 신출귀몰한 대륙 최강자 중 하나인 살렘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체크메이트다.
“거래할 겁니까.”
나는 피를 흘리면서도 승자의 미소를 내비쳤다.
그 모습이 꽤 기괴한 듯 나를 보는 이들의 시선이 영 떨떠름했다.
“우리가 졌다. 거래를 하도록 하지.”
결국 제스터가 백기를 내걸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품 안에 넣어둔 재생 포션과 회복 포션을 꺼내 마셨다.
찔린 부위가 간질거리며 통증을 유발했다.
그 모습을 본 살렘이 고개를 저었다.
“정말 케인의 아들이 맞나? 달라도 너무 다르군.”
갑자기 나온 아버지의 이름에 물었다.
“아버지를 아십니까?”
“물론. 알고 말고.”
나는 크롬웰가와 아버지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일단은 천천히 검을 뽑는 일에 집중했다.
포션을 먹은 덕분에 상처의 회복이 빨랐지만 그렇다고 순식간에 낫는 건 아니어서 식은땀을 흘리며 검을 뽑는 일에 집중해야 했다.
꽤 긴 시간을 끙끙대며 검을 뽑아낸 나는 검을 다시 검집에 집어넣으며 제스터를 보았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얘기해 볼까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드는군. 그래, 무엇을 원하나?”
사실 집회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다.
물론 게임을 하며 집회를 털 때 드롭된 아이템 일부는 알고 있었다.
내 목표는 그중 하나였는데 먼저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다.
말을 하는 순간 내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게 들켜 의심을 사게 되겠지.
그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아드리아스, 나도 거래에 참가하지.”
“살렘 예디디아, 이건 집회 사이의 거래다.”
“그런 섭섭한 말은 하지 마. 나태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끼어들 수도 있는 거지. 결국 파는 사람의 마음 아니겠나?”
“우리는 이미 한 차례 양보했다. 네가 아드리아스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고 했기에 그 말까지 들어줬어!”
“무슨 소리야. 그건 아드리아스가 죽고 나태가 없어질까 봐 물러선 거잖아. 선후는 확실히 해야지.”
“살렘!”
“뭐, 인마. 불만 있으면 붙어 보든가.”
살렘이 위협적으로 마나를 뿜어냈다.
그 모습에 제스터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나머지 집회 참석자들은 그저 흥미로운 모습으로 지켜만 볼 뿐이었다.
이런 모습에서 집회의 실체가 어느 정도 보이는데 흑마법사들의 모임이다 보니 구성원으로서의 끈끈함보다 개개인의 이득을 중시했다.
결국 제스터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물러서는 수밖에 없었다.
“한심한 것들. 결국 너희들도 집회 소속이거늘. 나태를 못 가져온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보고만 있는 건가?”
“모르겠는데?”
루나가 눈치 없이 말했다.
나머지 인원들도 그저 조용히 있을 뿐 대답이 없었다.
제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래는 어떤 식으로 하지? 돈으로 할 건가?”
“물물교환으로 하고 싶습니다.”
물론 돈도 좋다.
가난한 나로서는 돈도 꽤 구미가 당기지만 여기서 얻을 물건들은 돈으로도 구하지 못할 물건들.
‘그것만 가져오면 마력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집회에서는 희귀한 조합 재료들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살렘이 제시할 물건도 나름 기대가 되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성격상 나조차도 본 적 없는 물건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물물교환이라…… 그거 재미있겠군.”
살렘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