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악연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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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악연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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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2화. 악연의 끝
2023.01.09.
“깼어?”
잠이 덜 깬 건지 멍하니 무혁을 보던 재희가 눈을 깜박거리다 화들짝 놀라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덧 시계는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방금. 피곤할 텐데 좀 더 자.”
“아니에요. 깼어요. 이제 내려줘요.”
“방까지는 금방이야.”
무혁은 재희의 말을 묵살하며 성큼 걸음을 옮겼다.
시부모님이 보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다행히 서재에서 방까지는 멀지 않았다.
결혼 전 무혁의 방은 시댁에 올 때마다 두 사람이 머무는 방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무혁이 방문을 열자 딱딱하고 삭막한 풍경이었던 방은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로 변해있었다.
재희가 취향에 맞게 열심히 다시 꾸며놓은 덕분이었다.
무혁이 침대에 재희를 내려주었다. 이미 잠이 다 깬 재희는 다시 누울 생각이 없어서 무혁에게 물었다.
“저녁은요?”
“먹었어.”
무혁이 짧게 대답하곤 재희 옆에 앉았다.
재희가 가만히 어깨에 고개를 기대자, 무혁이 좀 더 기대기 쉽도록 몸을 움직여 주었다.
“규희는 어머님이랑 아버님이랑 자고 있을 거예요.”
“그런 것 같더군.”
퇴근하고 집에 온 무혁은 규희부터 찾았다. 그러나 규희는 이미 할머니 할아버지와 방에 들어간 뒤였다.
거실에서 업무 서류를 보던 우진이 부모님이 뒤늦은 육아에 푹 빠져 있다며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덕분에 무혁은 딸인 규희의 얼굴도 못 보고 바로 서재로 온 참이었다.
“규희 못 봐서 섭섭해요?”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 가득한 무혁을 보며 재희가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규희도 아빠인 무혁을 좋아하지만 무혁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규희가 갓 태어났을 때 무혁은 내내 규희에게서 시선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안을 때도 쉽게 깨지는 유리를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러워했다.
심지어 그 무혁이 바쁜 시간까지 쪼개 아빠 교육도 열심히 받는 걸 보면서 재희는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꾹 눌러 참아야 했다. 투박한 손으로 열심히 기저귀 갈아 입히는 걸 연습하더니 이젠 재희보다 더 잘하게 되었다.
“내일이면 아빠 보고 싶다고 또 울 거예요.”
재희의 위로 아닌 위로에 무혁의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스몄다.
그러다 이내 책상에 엎드려 불편하게 자던 재희가 걸렸는지 무혁의 입매가 다시 단단하게 굳어졌다.
“그나저나 불편하게 왜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어.”
“저도 모르게 피곤했나 봐요.”
“공부가 힘들면 쉬어도 돼.”
“오늘만 그런 거예요. 힘들지 않아요.”
무혁은 안타까운 눈을 한 채 재희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아이 낳은 뒤 이것저것 좋은 것도 챙겨 먹이면서 건강에 신경을 써주었지만, 육아와 공부는 아무래도 고된 모양인지 약간 얼굴이 까슬했다.
엄마로서가 아닌 재희가 하고 싶어 하는 공부와 일을 무혁은 응원했지만 이렇게 까슬한 얼굴을 보면 당장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다.
재희는 무혁의 손을 가만히 감싸며 고개 저었다.
“전 괜찮아요. 하고 싶었던 공부고 다들 응원해 주니까 더 열심히 하고 싶었나 봐요.”
재희의 안색이 흐려지자 무혁이 미간을 좁혔다.
“정말이야?”
“그럼요.”
무혁은 재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엔 단순히 피곤해서 안색이 어두운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재희가 규희를 품고 있을 때부터 무혁의 온 신경은 재희에게 향해있었다.
무혁에겐 재희가 그 어느 누구보다 1순위였다. 덕분에 재희의 목소리와 표정이 조금만 달라져도 어렴풋하게 그녀의 속마음을 알 수 있었다.
“뭐가 걸리는 거야.”
단도직입적인 무혁의 질문에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티 났어요?”
“조금.”
무혁이 가볍게 이마에 입 맞췄다.
재희는 무혁의 양 뺨을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며 입을 열었다.
적어도 무혁에겐 속마음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도 규희를 보면 예뻐하실까, 그런 생각이 요즘 들어요.”
“…….”
모두가 재희와 규희를 사랑해주자 기쁘면서도 게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규희 낳고 나서 아버지께서 전화를 주신 적이 있어요. 몇 분 안 되는 통화였지만 의외였어요.”
아버지에게 규희를 가졌다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재혁은 달리 생각한 모양이었다.
가끔 재혁에게 소식을 전달받은 건지 규희가 태어나고 삼일 뒤에 신채근이 전화를 했다.
“몸은 괜찮으냐.”
“네.”
거의 일 년 가까이 연락하지 않다가 통화한 것이어서 그런지 대화는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신채근은 몸조리를 잘하라는 말만 남기고 통화를 종료했다.
얼마 뒤 재희의 통장에 적지 않은 액수의 돈이 입금됐다. 입금자명은 적혀 있지 않았지만, 재희는 단번에 신채근이 보낸 돈이란 걸 알아챘다. 재희는 그 돈을 차마 쓸 수 없었다.
“아직은 아버지도 저도 서로 볼 수 없나 봐요.”
“서둘지 않아도 돼. 시간은 많으니까 차근차근 나가자.”
신채근은 방관자였지만, 그래도 그 집에서 재희의 편에 있어 주었던 아버지였다.
처음으로 한 아버지와의 식사에서 신채근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고 재희는 언제든 아버지를 기다려주기로 했었다. 재희는 그때 그 말을 지키고 있는 중이었고 무혁은 그런 재희를 응원해 주었다.
“알았어요. 차근차근.”
재희는 가볍게 웃으며 무혁에게 입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이었지만 그간 임신 기간과 몸조리, 육아 등으로 둘만의 시간을 가진 지 오래였던지라 무혁에겐 충분한 자극이 되었다.
무혁이 깊게 한숨을 내쉬며 타이를 끌어내리자 그 행동의 의미를 읽은 재희가 얼굴을 붉혔다.
“이것도 차근차근은 안 돼요?”
“응.”
푹신한 침대에 재희를 눕히며 무혁이 가볍게 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지금도 많이 참고 있어.”
정중하지만 다급한 그의 입맞춤에 재희는 얼굴을 붉히면서도 가만히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심경이 복잡한 지금은 무혁의 품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를 오롯이 느끼고 싶었다.
“그럼 더 급하게 해도 괜찮아요.”
재희가 간지럽게 속삭이자 무혁의 등이 딱딱하게 굳었다. 재희는 그의 머리에 가만히 뺨을 비볐다.
“좀 더 거칠어도 괜찮구요.”
“내일 피곤할 텐데.”
재희는 가만히 무혁의 단단한 복근을 매만졌다. 무혁이 거친 숨을 삼키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잠 못 자도 괜찮아요.”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재희의 양 뺨을 감싼 무혁이 거칠게 입 맞췄다.
순간 긴장한 재희가 숨을 들이켜며 뻣뻣하게 굳었다. 이윽고 몸을 훑는 부드러운 무혁의 손길에 긴장했던 몸이 풀렸다. 재희는 오롯이 무혁의 키스와 손길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의 시간은 동이 틀 때까지 멈출 줄 몰랐다.
* * *
“규희야. 이거 봐.”
한가로운 주말 오전.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너른 거실에서 무혁이 규희에게 장난감을 흔들어 보였다.
호랑이 인형을 꼭 안고 있던 규희가 장난감을 보더니 마음에 들지 않는지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에 무혁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규희를 안아 들었다.
“무혁 씨. 이제 규희 밥을 먹여야죠.”
재희가 알맞게 온도를 맞춘 분유를 타왔다.
무혁이 조금 아쉬운 얼굴로 규희를 넘겨주었다. 재희가 웃음을 터뜨리며 규희를 안고 막 젖병을 물리려 할 때였다.
Rrrr Rrrr
재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무혁 씨. 규희 잠깐 밥 좀 먹여줘요.”
재희가 규희와 젖병을 넘겨주자 무혁이 익숙하게 자세를 잡았다. 능숙하게 규희에게 젖병을 물리는 무혁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재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누구지?’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였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재희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나야.
새어머니 홍연화였다.
-남편은 너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래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여전히 말투는 까칠했지만 홍연화 목소리는 조금 지쳐 보였다.
-어머니 돌아가셨어.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사망 소식이었다.
* * *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내내 재희는 말이 없었다.
무혁은 갈 필요 없다고 말했지만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무혁 씨. 제가 착해서 가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왜.”
“제가 안 가면 그걸로 사람들이 무혁 씨나 시부모님 뒷말을 할까 봐 그래요.”
“…….”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얼굴 비추고 와요.”
비록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할머니였지만,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않는다면 혹시라도 무혁과 시부모님이 뒷말을 들을까 우려했다.
결국 무혁은 재희와 동행하기로 했다.
강진과 혜란 역시 비보를 듣고 먼저 장례식장으로 간 후였다.
규희는 베이비시터가 봐주기로 하고 장례식장으로 가는 내내 재희는 홍연화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최근에 갑자기 치매가 심해지셨어. 매일 재혁이 이름만 부르고 보고 싶다고 그러시고 재혁이가 왔다면서 헛소리를 하시더니…….”
잠들기 직전까지도 할머니는 재혁이를 부르면서 데리고 오라고 난동을 피웠다고 했다.
겨우 진정시키고 모두가 잠든 새벽. 간병인이 잠든 틈에 할머니는 이부자리에서 빠져나갔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사라진 할머니를 찾던 간병인은 대문 앞에 쓰러진 채 사망한 할머니 발견했다.
사망 원인은 심장마비.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재혁의 얼굴을 보기는커녕 그리워하다 원인 모를 심장마비에 눈도 감지 못하고 차가운 바닥에서 할머니는 홀로 죽음을 맞이했다.
더없이 쓸쓸한 죽음이었다.
장례식장의 빈소는 손님으로 북적였다.
손님을 맞이하는 신채근의 얼굴은 초췌해 보였고 홍연화도 바빠 보였다. 차마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재희는 멀찍이 서서 영정사진을 바라보았다. 정정한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낯설게만 보였다.
“재희야.”
무혁이 재희의 팔을 잡으며 가만히 불렀다.
그제야 재희는 온몸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담담한 척했지만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꽤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돌아갈까?”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힘들면 버티지 않아도 괜찮아.”
무혁의 걱정에도 재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는 듯 무혁의 팔을 가만히 두드려줄 때였다.
“왔어?”
상복을 입은 홍연화가 먼저 눈치채고 지친 얼굴로 다가왔다.
그제야 재희가 온 것을 발견한 신채근의 표정이 굳었다. 상주석에서 일어난 신채근이 재희에게 다가왔다.
“네가 어떻게 온 거냐.”
“아침에 연락을 받았어요.”
신채근의 고개가 단번에 홍연화에게 향했다.
“내가 연락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그럼 어떻게 하라구요? 알건 알아야 할 거 아니에요. 어머니 돌아가셨는데 손녀가 문상도 안 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홍연화가 날카롭게 반박하자 신채근이 입을 다물었다.
“그만 좀 해요. 맨날 사진만 들여다본다고 뭐가 달라져요? 인제 그만 좀 대화하라구요.”
지겨워.
홍연화가 투덜거리며 자리를 떴다.
‘사진? 설마.’
재희가 의아한 얼굴을 하다 이내 마른침을 삼켰다. 신채근이 본다는 사진이 어떤 건지 어렴풋하게 눈치를 챈 것이다.
신채근이 이마를 짚으며 지친 한숨을 내뱉었다.
“안 좋은 모습 보여서 미안하다.”
“전 괜찮아요. 그보다 재혁이는요?”
달리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건넨 재희의 물음에 신채근이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오려면 며칠 걸릴 것 같다. 비행기 시간도 그렇고.”
“아버지는 괜찮으세요?”
“그래.”
어색한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이윽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깨고 무혁이 입을 열었다.
“인사드리고 오겠습니다.”
무혁이 먼저 성큼 발을 내디뎠다. 재희는 무혁을 말리지 않았다.
재희는 영정사진을 보며 말했다.
“전 안 하려구요.”
“그래. 잘 생각했다.”
신채근은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도 염치가 있으시다면 네 절을 받아선 안 되지. 네가 한다고 해도 내가 말렸을 거다.”
신채근이 무혁을 보며 말을 이었다.
“좋은 남자 같구나.”
“…….”
“네 면을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들어간 거겠지.”
재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례식장에 오긴 했으나 재희는 절 같은 건 할 생각이 없었다. 무혁 역시 할머니에게 좋은 감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무혁은 재희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 일부러 나서서 절을 올렸다. 그의 마음이 고맙고 또 고마워서 재희는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부조를 마친 무혁이 나오자 신채근이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자리를 못 지켜서 죄송해요.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
신채근은 붙잡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 나오던 재희는 힐끗 뒤를 돌아봤다가 미련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할머니와의 악연은 이것으로 영영 이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