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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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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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화. 방문
2022.12.12.
겨울이라 해가 짧아진 덕분에, 노을 서점에 도착했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노을 서점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부터 세라의 표정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여긴.”
익숙한 거리다.
노을 서점 앞 골목을 조금만 벗어나면 어릴 때 지겹게 드나들었던 장독수의 화실이 있었다.
항상 장독수의 화실만 드나들었던 탓에 바로 앞에 이런 서점이 있는지도 몰랐었다.
재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어머님과 오랫동안 친분을 가져온 장독수라는 화백의 화실이 있어요.”
“…….”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쯤이면 아마 댁에 가셨을 테니까요.”
세라가 어떤 부분을 꺼리는지 눈치챘지만, 재희는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세라가 걱정하는 부분을 골라서 적절하게 답해주었다.
재희의 말에 세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쉬워하는 듯하면서도, 안도하는 세라의 표정에 재희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들어가요. 추워요.”
재희가 웃으며 말하자 무혁이 익숙하게 처마 등을 켰다.
그러자 케빈이 호오, 감탄을 하며 처마 등을 올려다보았다.
“굉장히 흥미로운 건물이군요. 낡았지만 그것대로 멋스러운 것이. 프랑스에도 오래된 건물은 많지만 이런 건물은 처음 봤어요.”
케빈이 여기저기 만져보며 감탄하는 사이 도화가 눈을 반짝였다.
“우와. 야수 아저씨. 나도 켜보면 안 돼?”
“위험해.”
무혁이 단호하게 고개 저었지만, 도화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잉. 도화도 하게 해 줘.”
도화가 떼를 쓰기 시작하자 무혁이 세라를 돌아보았다.
세라가 못마땅한 눈으로 노려봤지만, 도화는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위험하지만 않다면 괜찮아요. 안 들어주면 제 고집을 꺾지 않을 거예요.”
제 증조할머니를 닮아서.
세라는 자신도 모르게 나오려던 뒷말을 어렵사리 삼켰다.
무혁은 처마등을 끄고 도화를 안아 들었다.
드디어 처마등을 직접 켜볼 기회가 생기자 라윤 갤러리에서 서럽게 울어대던 도화는 발개진 눈으로 즐거운 듯 꺄르르 웃어댔다.
몇 번이나 처마등을 껐다 켜며 노는 도화를 보던 세라가 입을 열었다.
“장도화. 이제 그만해.”
도화가 세라를 잠시 돌아봤다가 볼을 부풀리며 홱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까 일의 앙금이 아직 안 풀렸는지 도화는 내내 엄마를 본 척 만 척하고 있었다.
“너 적당히 안 해?”
“우선 들어가요. 한동안 저러고 놀 것 같은데. 곧 질릴 거예요.”
다시금 분위기가 안 좋아지려 하자 재희가 나서서 중재했다.
재희의 권유에 세라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덜컥, 노을 서점 자물쇠를 열자 무혁이 도화를 케빈에게 넘겼다.
“여기 도화 받으십시오.”
“어어?”
“케빈 아저씨 뭐 해. 빨리 도화 올려줘!”
건물 여기저기 둘러보던 케빈이 얼결에 도화를 넘겨받고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윽고 하는 수 없이 도화를 들어 올려 주었다.
도화가 다시금 처마 등을 껐다 켜며 놀기 시작했다. 케빈이 툴툴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무혁은 재희의 곁에 서며 손을 뻗었다.
“내가 열게. 차가워.”
문을 열려던 재희의 손을 거둬내며 무혁이 문을 열어주었다.
미리 연락을 받은 관리인이 미리 내부에 불을 켜두고 보일러를 돌려둔 덕분에 안은 따뜻했다.
“세상에.”
노을 서점에 들어선 세라는 바로 감탄했다.
불규칙한 듯하면서도 규칙적으로 정리된 책과 책장, 오래된 건물 특유의 낡은 나무 냄새와 세월의 흔적이 담뿍 묻은 내부가 무척이나 멋스러웠다.
처음 발을 들이자마자 느껴지는 포근한 분위기와 훈기에 언 몸과 불편한 마음이 절로 녹는 듯했다.
“우와아.”
처마등을 껐다 켜며 놀던 도화 역시 어느새 노을 서점에 들어와 한껏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찬 바람이 부는 곳에 있다가 따뜻한 곳에 들어오자 도화의 빵빵한 두 뺨이 새빨개졌다. 도화는 작은 두 손으로 제 뺨을 문질문질 문지르며 제집에 온 것처럼 노을 서점 곳곳을 누비기 시작했다.
세라가 뭐라 한마디 하려고 하자 재희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괜찮아요.”
“그래도 처음 온 곳인데 저렇게 정신 사납게 다니면.”
“여기선 그래도 괜찮아요.”
“무슨.”
“그래도 괜찮다고 서점 할아버지께서 그러셨거든요.”
서점 할아버지는 누군가가 서점 곳곳을 누비는 것을 기꺼워했다.
적막한 서점에 생기가 돌아서 좋다는 이유였다.
그래서인지 서점 할아버지는 재희가 책장 앞에서 영 움직이질 않으니 서운해하곤 했었다.
“여기선 네 마음대로 다녀도 괜찮단다. 눈치 보지 말거라.”
서점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경계심이 많았던 재희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노을 서점에 발을 들인지 한 달 만에 내부를 둘러볼 정도였다.
“그래도 혹시라도 다치기라도 하면.”
세라의 걱정에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물건도 없고 뾰족한 곳도 없어요. 할아버지는 늘 위험한 물건은 감춰두셨거든요. 저 역시 다 치워놨고요.”
그 말에 세라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래도 제 세상처럼 뽈뽈뽈 돌아다니는 도화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거기다.
“세라. 이것 좀 봐. 여기서 절판된 책을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케빈까지 합세해 프랑스에서 절판된 책을 발견하곤 감탄하며 여기저기 구경하고 있었다.
세라가 한심하다는 눈으로 케빈을 쳐다보았다.
“케빈. 너까지 도화처럼 굴지 마.”
“네가 너무 덤덤한 거야.”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보던 재희가 웃으며 물을 끓이기 위해 작은 주전자를 들었다.
그러자 무혁이 주전자를 가로채 들었다.
“내가 할게.”
“그래 줄래요? 그럼 얼마 전에 어머님이 선물해 주신 차가 있는데 그걸로 부탁해요. 찬장에 있어요.”
재희가 차를 보관해둔 위치까지 상세히 말해주자 무혁이 묵묵히 주전자를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재희가 책장 뒤편 테이블과 소파가 놓인 공간으로 안내했다. 소파와 테이블은 낡았지만 더럽지 않았다. 오히려 관리가 잘 된 오래된 가구는 편안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세라는 단번에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아차렸다.
“여기가.”
“맞아요. 그 일러스트의 배경이 되는 곳이에요.”
“조용하고 따뜻하네요. 일러스트처럼.”
조도 낮은 조명 덕분인지 노을이 가득했던 삽화처럼 따스한 분위기에 날카롭게 곤두섰던 신경이 가라앉는 듯했다.
신경이 한껏 누그러진 세라는 많은 생각이 드는지 한참이나 주위를 둘러보다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윽고 무혁이 차를 끓여오자 케빈이 돌아다니던 도화를 붙잡고 들고 왔다.
도화의 옆구리에는 커다란 그림책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우와!”
데굴데굴 굴러도 충분할 정도로 커다란 소파에 도화가 감탄했다.
도화가 냉큼 케빈의 손에서 벗어나 소파 한쪽에 척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커다란 그림책을 펼치며 세라에게 외쳤다.
“엄마. 여기 그 그림 속 같다!”
“그래. 여기가 그 그림이 그려진 장소야.”
“진짜?”
“응. 재희 언니가 여기를 좋아해서 그렸대.”
도화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좋아했던 동화책 속 일러스트의 배경에 직접 와있다는 건 도화에겐 너무나도 꿈같은 일이었다. 공주님 성 같았던 라윤 갤러리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엄마. 우리 여기 자주자주 오자.”
“자주?”
“응! 나 여기 너무 좋아. 그러니까 자주 오자. 응?”
어차피 프랑스에 돌아간다면 자주 오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건 도화에게 실망감을 안겨주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전시회가 끝나면 곧바로 미련 없이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을까?
세라는 그 질문에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5월의 연회 때도 그렇고, 이번 전시회를 열면서 케빈이 우려하던 일은 바로 할머니를 만나는 것이었다. 세라 역시 할머니를 만날 거라 충분히 예상했었다.
세라는 할머니를 만나자마자 날 선 말을 했던 것이 내내 마음에 자그맣게 껄끄럽게 남아 있었다.
“알았어. 자주 오자.”
복잡한 얼굴로 세라가 대답하자 도화의 표정이 해처럼 밝아졌다.
좋아하는 일러스트의 배경을 통째로 옮겨놓은 듯한 이곳이 마음에 드는지 도화가 생글생글 웃었다.
노을 서점에 들어오기 전까지 제 엄마에게 날을 잔뜩 세웠던 아이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도화는 평소처럼 생글생글 웃었다.
곧 도화가 그림책에 빠져들자 세라가 재희에게 말했다.
“오길 잘한 것 같네요. 도화 기분도 풀리고.”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에요.”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여기가 가장 멋진 곳이에요.”
세라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화가 동화책에 실려있던 일러스트를 보며 줄곧 가보고 싶다고 했던 곳.
일러스트를 보며 느꼈던 따뜻하고 포근한 분위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서점.
세라는 왜 재희가 여기를 배경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알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 그 그림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아요.”
순수한 세라의 감탄에 재희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전 이곳에서 많은 걸 받았어요. 여기에 있다 보면 어지러웠던 마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지든요. 그간 받았던 상처도, 슬픔도 모두.”
돌아보는 세라를 보며 재희가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그러니 세라 씨도 도화도 부디 잠깐이라도 쉬었으면 좋겠어요.”
말없이 재희를 응시하던 세라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왜 안 물어요?”
재희가 세라를 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혹시 떠보는 게 아닌지 세라는 재희의 표정을 살폈지만 뭔가 궁금해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이미 눈치챈 것 같은데.”
“어떤 걸요?”
“장독수라는 화백과 저 사이의 일. 궁금하지 않아요?”
재희 역시 당연히 궁금했다.
하지만 굳이 묻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묻고 싶지 않아서요.”
“……?”
“여긴 그런 곳이고 저 역시 여기서 기다리는 법을 배웠거든요.”
어느 사정을 가지고 이곳에 발을 들였든 서점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손님이 오면 이곳에서 따뜻한 차와 간식을 먹고 마음 편히 쉬다 가는 것만으로도 족하다던 서점 할아버지였다. 번다한 일상에서 유일한 쉼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도화에게 핫초코를 준 뒤 재희에게 따뜻한 찻잔을 건네주던 무혁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그런 곳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든 마음 편히 쉬고 말하고 싶을 때 말하면 되는.”
재희가 찻잔을 받아들며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무혁과 눈이 마주치자 재희의 눈매가 부드럽게 접혔다. 무혁이 하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재희 역시 비밀 친구인 무혁에게 솔직하게 말하기까지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나 무혁은 재촉하지 않았다. 재희가 스스로 말하기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려 주었다.
느려도, 말하지 않아도 친정에서처럼 무혁이나 서점 할아버지는 타박하지 않았다. 그래서 재희는 이곳이 너무나도 소중했다.
“다만 용기를 내지 못한다면 상대에게 진심이 닿지 못해요.”
세라나 무혁에게 하는 말이라기보단 재희 자신에게 한 말에 가까웠다.
재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망설인다면 상대에게 내 진심을 전해주기까지 너무나도 힘든 일이 될 테니까요.”
무혁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며 재희의 말을 이어받았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대화를 하고 솔직해져야 합니다.”
재희는 맑은 눈으로 세라에게 시선을 두며 말했다.
“오랫동안 묵혀둔 감정을 다시 푸는 건 어렵더라고요.”
차를 마시던 케빈의 시선이 세라에게 향했다.
세라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도화에게 시선을 던졌다.
도화는 짧은 다리를 휘적휘적 저으며 그림책에 몰두해 있었다.
세라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는 기다려 주는 곳이라고 했죠.”
“네.”
“그분도 그럴까요.”
세라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재희가 자리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세라 씨에게 그분이 소중했다면, 그분 역시 세라 씨를 소중하게 여겼을 테니까요.”
세라와 마주 보며 재희가 싱긋 웃었다.
“아마 그분도 세라 씨가 다가와 주길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요.”
문득 예전에 할머니와 한 대화가 떠올랐다.
“여기에 제 캔버스를 두는 거예요. 그리고 할머니랑 같이 앉아서 그림을 그리는 거죠.”
어린 세라가 제멋대로 화실을 꾸며도 할머니는 싫은 내색 한번 하지 않았었다.
제 공간에 허락하지 않은 누군가가 있는 걸 질색하는 성정이면서도.
도리어 어린 세라의 머리를 주름진 손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원래는 고집스러워 보였던 얼굴에도 부드러운 표정이 머물러 있었다.
“기대하마.”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정이 피어올랐다.
세라의 시선이 어딘가로 향했다.
노을 서점 밖, 어느 한 작업실 쪽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