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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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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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화. 다툼
2022.12.08.
“무슨 자격으로요.”
도란도란한 대화를 가르는 냉랭한 목소리에 장독수와 도화의 시선이 그 주인공에게 꽂혔다.
세라를 발견하곤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뜬 도화와 달리, 장독수는 놀란 기색조차 없었다.
“어…… 할머니. 이건.”
“괜찮단다. 도화야. 네 잘못이 아니란다.”
불안해하는 도화를 다독여 주며 바닥에 내려주었다.
이윽고 허리를 편 장독수가 세라를 바라보았다.
마치 방금 전까지 대화를 나눈 것처럼 담담한 반응에 세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오랜만이구나.”
“…….”
“그동안 잘 지냈니.”
세라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장독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장독수는 마지막으로 헤어지기 전의 모습과 똑같이 정정한 모습이었다.
‘아니. 조금 더 늙으셨나.’
의미 없었다. 좀 더 늙으셨든 아니든.
다만 고지식함이 묻어나오던 이전 얼굴과 달리 표정이 한층 유해졌다.
세라가 차갑게 대답했다.
“우리가 인사를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요.”
“그래. 그렇구나.”
장독수가 잠시 그림에 시선을 두었다가 세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할머니가 손녀에게 인사 정도는 해도 될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오랜만에 만난 저한테 할 말이……!”
“오랜만이라서 더 묻고 싶은 걸 참고 있는 거란다. 그러니 이정도 인사는 받아주렴.”
부드럽지만 단단한 장독수의 말에 세라의 표정이 대번에 구겨졌다.
냉랭한 분위기에 도화가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장독수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한 도화를 바라보았다.
“아이 앞이잖니. 내게 하고 싶은 말은 많겠지만 잠시 미뤄두자꾸나.”
장독수의 말에 세라는 입을 다물었다.
장독수가 도화와 시선을 마주치며 빙긋 웃어 보였다.
“아쉽지만 할머니랑은 여기까지인 것 같구나.”
“할머니.”
“걱정하지 말렴. 아무 일도 없을 거란다.”
“그치마안.”
“귀여운 얼굴로 걱정하면 이 할머니 마음이 아프단다.”
“응…….”
도화가 작은 손으로 장독수의 손을 꼼지락거리며 매만졌다.
장독수는 작은 도화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그림은 나중에 택배로 보내주마.”
장독수가 도화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주었다.
“도화야. 이리와.”
세라가 손짓하자 중간에 낀 도화가 불안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장독수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마한테 가야지.”
“하지만.”
“엄마 속상하게 하면 안 된단다.”
도화를 달래주는 장독수를 보는 세라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어릴 때 저를 달래주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업계 사람들은 장독수를 보며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세라는 다르게 생각했다. 고집스럽고 고지식한 건 맞지만, 장독수는 세라에게 한없이 부드럽고 너그러운 할머니였다. 돌아가신 부모님보다 세라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그때 장독수가 저를 위해서 한 말인 줄 알면서도 세라는 배신감에 쉽게 용서할 수 없었다.
세라에게 가려던 도화가 장독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할머니. 여기서 기다려야 해요. 나 다시 올 거야.”
장독수는 손을 흔들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도화가 여기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말이다.
세라는 돌아온 도화의 손을 붙잡았다.
세라가 복잡한 눈으로 도화를 보며 선뜻 자리를 뜨질 못하자 장독수가 먼저 손짓했다.
“시간이 늦었다. 얼른 가렴.”
결국 세라가 도화를 데리고 인사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장독수는 오래도록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 * *
전야제가 마무리되며 손님이 어느 정도 돌아갔다.
잠시 숨 돌릴 때 내내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던 장독수가 모습을 드러낸 건 그쯤이었다.
장독수는 내내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혜란에게 다가갔다.
“자네가 공들인 것 이상으로 아주 훌륭했네. 내일부터 열리는 전시회도 기대가 되는군.”
“까다로운 화백의 마음에 들었다니 기쁘네요. 좀 더 일찍 나타나셨으면 더 보여드릴 게 많았는데 말이죠.”
섭섭한 기색을 감추지 않는 혜란을 보며 장독수가 미소지었다.
“그나저나 그 그림 가져가도 되겠나.”
“축복 말인가요?”
<축복>은 장독수가 몇 날 며칠 동안 두문불출하며 그린 그림이었다.
장독수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더니, 그 그림을 혜란에게 보관해 달라고 했다. 어디에 갖다 박아놔도 상관없으니 그저 보관만 해달라고 했다.
혜란은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고, 그렇게 <축복>은 몇 년 동안 라윤 갤러리에 걸려있었다.
“그래. 주인이 나타났거든.”
“주인?”
“그래. 주인.”
혜란의 미간이 좁혀졌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지금은 물을 때가 아님을 눈치챘다.
“알았어요. 포장해서 조만간 작업실로 보내드릴게요.”
“그래. 부탁하네.”
“나중에 그 주인이 누군지 물어볼 거예요.”
“그래그래.”
장독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난 이만 돌아가겠네.”
“아직 이 사람과 제대로 된 대화도 나누지 못하셨는데 좀 더 있다 가십시오.”
강진이 만류했지만 장독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김 관장이 그토록 신경 쓴 전시회의 전야제가 훌륭하게 잘 진행되었다는 걸 알았으면 됐지.”
미련 한 점 없는 담담한 장독수의 말에 혜란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혜란으로서도 가겠다는 장독수를 말릴 재간이 없었다.
‘예전엔 이정도로 속 모를 양반은 아니었는데.’
장독수는 손녀딸과 헤어진 뒤로 성격이 변했다.
앞뒤 막힐 정도로 고지식한 건 아니었지만, 지금처럼 속 모를 성격은 아니었다.
“어머니.”
장독수가 돌아간 뒤 무혁과 함께 손님을 배웅하고 온 재희가 다가왔다.
좀처럼 표정이 풀어질 줄 모르던 혜란이 돌아보았다.
“그래. 무사히 배웅해 드렸니? 별일 없었고?”
“네. 다행히 아무 일 없었어요.”
재희는 표정이 안 좋은 혜란을 살폈다.
혜란이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미셸은?”
“잘 모르겠어요. 자리가 마무리되었으니 곧 돌아올 거예요.”
재희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닿았다.
장독수가 줄곧 자리를 지키고 있던 장소였다. 더불어 저녁 먹기 전에 재희가 도화와 마주쳤던 곳이기도 했다.
혜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양반, 정말 너무하는 거 아니니. 어떻게 전야제 내내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얼굴 딱 한 번 보이곤 가버릴 수가 있어.”
혜란의 서운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는지라 재희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원래 그런 양반이지 않았나.”
강진의 무심한 말에 혜란은 더 짜증이 났다.
“그런 양반인 걸 알아도 서운한 건 서운한 거라고요. 당신 정말.”
혜란이 뭐라고 한마디 하려는 찰나, 세라가 돌아왔다.
세라를 본 혜란이 표정을 수습했다.
“어떻게, 즐겁게 시간 보냈어요?”
“예. 명성에 걸맞게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시간이었어요.”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에요. 앞으로 전시회가 열리는 기간 동안 잘 부탁해요.”
“저 역시 잘 부탁드려요.”
적당한 대화가 오가는 사이, 도화가 다다다 달려왔다.
“언니!”
도화가 불퉁한 얼굴로 보란 듯이 재희 허리에 덥석 달라붙었다.
힐끗, 세라를 본 도화가 홱 엄마를 외면해 버렸다.
평소라면 한마디 했을 세라였지만, 지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 오기 전까지 도화와 실랑이를 벌인 탓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러 가겠다는 도화와, 보내지 않겠다는 세라의 실랑이였다.
결국 그 실랑이에서 진 도화가 내내 불퉁한 얼굴로 심술을 부려댔다.
“세라. 도화가 왜 저렇게 심술이 났어?”
“말하자면 길어.”
세라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한숨을 삼켰다.
내내 그 그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재희가 무혁의 손을 잡으며 검지로 그의 손을 톡톡 두드렸다.
무혁이 바라보자 재희가 올려다보았다.
무혁은 단번에 재희의 기색을 알아채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혁이 동의하자 재희가 혜란에게 말했다.
“어머니. 내일부터 전시회인데 얼른 들어가 보셔요. 여긴 제가 마무리할게요.”
“그래. 네가 책임자니까 잘 부탁한다.”
세라와 인사를 나눈 혜란과 강진이 돌아갔다.
두 사람을 보낸 재희가 세라가 있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쪽에선 도화가 불퉁한 얼굴로 서 있었다.
케빈이 달래고 있는 듯했으나, 도화의 얼굴은 좀처럼 풀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나 화장실 갈 거야.”
도화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세라는 그런 도화를 힐끔 보더니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안 돼.”
“급하단 말야.”
도화가 보챘지만 세라가 단호했다.
“거짓말하지 마. 너 다른 데 가려고 하는 거잖아.”
도화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세라가 입을 벌리고 저를 보는 도화를 보며 말했다.
“이따 어떻게 된 일인지 다 물어볼 테니까 거짓말할 생각하지마.”
“엄마아.”
“보채도 소용없어. 일단 집에 가서 얘기해.”
제 거짓말이 들통난데다 좀처럼 제 말을 들어주지 않자 도화가 울상 지었다.
할머니한테 가야 하는데. 아까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는데.
도화는 할머니한테 못 갈까 봐 걱정이 돼서 발을 동동 굴렀다.
“엄마아. 응? 중요한 일이란 말이야아.”
도화가 안절부절못했지만, 세라는 흔들리지 않았다.
“안 된다고 했지.”
“싫어! 갈 거야!”
“장도화! 엄마가 안 된다고 했지! 떼쓰면 다 되는 줄 알아?”
세라의 호통에 도화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엄마 미워! 왜 할머니랑 인사도 제대로 못 하게 해? 할머니랑 인사하고 싶단 말이야!”
도화가 바락 소리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도화가 울음을 터뜨려도 세라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세라. 설마 만났어?”
주어가 빠졌지만 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봐. 안 만나는 게 이상한 거라니까.”
케빈의 말에 세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라 씨.”
섧게 우는 도화를 보던 재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세라가 재희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좋은 날에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네요.”
“괜찮아요. 그보다 도화는…….”
세라가 대답하기도 전에 도화가 눈물 범벅된 얼굴로 재희 품에 안겨들었다.
“엄마 싫어. 엄마 너무 못 됐어! 나 언니 딸 할래. 엄마한테 안 갈 거야!”
울음으로 끅끅거리면서도 도화가 맺힌 게 많은지 다다다 말을 내뱉었다.
“할머니가 좋은데, 좋은 할머니인데 엄마가 막 무섭게 대했어. 인사도 못 하게 하고, 엄마가 막 그래서 서럽고.”
대충 장독수와 마주친 걸 눈치챈 재희는 무혁과 시선을 마주했다.
무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재희가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도 서러웠는지 도화의 울음은 영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게 싫었어?”
“응. 왜 인사도 못 하게 해? 엄마 진짜 싫어.”
“그렇지만 도화 엄마잖아.”
“싫어. 도화 엄마 안 하게 할 거야.”
도화는 지지 않고 따박따박 대답했다.
도화가 울어도 세라가 꿈쩍도 하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달래주는 것만으로는 해결될 것 같지 않았다.
“도화야. 시간이 좀 늦었지만 언니랑 좋은 데 갈까?”
“좋은 데?”
도화가 퉁퉁 부은 얼굴로 재희를 올려다보았다.
눈과 코가 발개진 채 도화가 훌쩍거렸다.
“응. 언니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곳인데 도화도 마음에 들 거야.”
“갈래!”
“우리 도화 울음 그치면.”
재희가 부드럽게 말하자 도화가 소매로 눈을 북북 닦았다.
“다 울었어.”
잘했다는 듯 도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재희가 세라를 돌아보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세라 씨도 힘들 것 같은데 잠시 들렀다 갈래요?”
재희가 한숨을 내쉬는 세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무엇보다 세라 씨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요.”
일부러 마음 써준 재희를 보며 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아무래도 도화보다는 제게 필요한 시간 같네요.”
세라는 그렇게 말하며 문득 예의 그 텅 빈 작업실에서 할머니와 함께 그림을 그리던 옛 생각이 떠오르자 가만히 잊어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할수록 추억은 점점 더 선명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