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출장
(108/128)
108화. 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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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화. 출장
2022.11.10.
재희는 혜란이 불러준 차를 타고 곧장 노을 서점으로 향했다.
혜란이 청소 도우미까지 붙여주려고 했지만 재희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노을 서점만큼은 재희가 직접 관리하고 싶어서였다.
그래봐야 소소한 청소나 정리뿐이었지만 말이다.
간단하게 노을 서점 청소를 끝내고 미리 준비한 재료를 다 정리한 재희는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무혁이 오려면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책이나 좀 읽을까.’
재희가 기억하고 있는 낡은 책이 한 권도 빠짐없이 책장에 꽂혀있었다.
언젠가 다시 노을 서점을 다시 열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장 끝에 꽂힌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금 높긴 하지만 아주 손이 못 닿을 거리도 아니어서 재희가 발꿈치를 올렸다.
“조금만 더.”
한창 낑낑대며 책을 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그림자는 재희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제 품 안에 끌어안았다.
“……!”
익숙한 향수 냄새와 체온과 넓은 품.
놀라 고개를 돌리던 재희는 그림자, 무혁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무혁은 눈을 동그랗게 뜬 재희를 힐끗 보고는 손쉽게 책을 빼주었다.
재희는 무혁이 건네준 책을 받아들며 웃어보였다.
“빨리 왔네요.”
“출장 전날이니까.”
“보통 그때가 제일 바쁘지 않아요?”
무혁이 책장 앞에 아무렇지도 않게 앉자 재희가 익숙하게 그 옆에 자리 잡고 앉았다.
따로 의도하고 앉은 건 아니었지만 무혁이 앉은 자리는 항상 재희가 앉던 책장 그 자리였다.
무혁이 조금 고개를 돌려 재희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정리해주며 말했다.
“오늘까지 열심히 하길 바란다면 아버지의 욕심이지.”
그 말에 재희가 가볍게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무혁은 분명 강진이 뭐라고 하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일을 정리하고 왔을터였다.
“그래도 마음 넓은 아버님 덕분에 무혁 씨랑 더 많이 시간 보낼 수 있어서 좋네요.”
일부러 그렇게 말하는 재희를 보며 무혁이 희미하게 웃었다.
“갑자기 책은 왜.”
“무혁 씨가 늦을 것 같아서 비는 시간 동안 읽으려고 했어요.”
“그럼 이제 내가 왔는데, 그 후엔?”
음. 일부러 애태우듯 재희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런 재희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주는 무혁의 손가락 끝이 어쩐지 초조해 보였다.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챈 듯 재희가 책을 내려두곤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무혁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재희가 가볍게 무혁의 목에 팔을 걸치며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슬쩍 웃는 재희 너머로 불투명한 유리문에 고인 노을빛이 보였다.
재희의 몸 선을 따라 노을빛이 희미하게 부서지며 흘러내렸다.
무혁이 잠시 재희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익숙하고 보드라운 입술이 꿈결처럼 닿았다가 사라졌다.
애태우듯 가볍게 입술에 닿았다가 떨어진 재희를 보는 무혁의 시선이 짙어졌다.
“……무혁 씨랑 시간을 보내야죠.”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어.”
재희의 뺨을 엄지로 쓸어주며 무혁 빙긋 웃었다.
노을이 깊어졌다.
* * *
노을 서점 다락방 창틀에 참새가 쪼르르 앉아 있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작은 부리로 연신 짹짹거리며 바지런 떨던 참새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그 모습을 막 잠에서 깨서 멍하니 바라보던 재희가 잠기운을 떨치려는 듯 두어 번 눈을 깜박였다.
‘시간이.’
재희는 팔을 뻗어 바닥을 더듬었다.
잘 손질된 나무 바닥 감촉을 느끼며 재희는 근처에 놔뒀던 시계를 찾았다.
분명 근처에 놔두었던 시계가 어디로 가버린 건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
몸을 일으켜 시계를 찾으려던 재희를 두터운 팔이 감싸며 끌어당겼다.
결국 재희는 다시 짐승 굴에 끌려 들어가는 작은 동물처럼 속수무책으로 커다란 품에 안기고 말았다. 재희는 짐승, 아니 무혁을 흘겨보았다.
“무혁 씨. 깼어요?”
“응.”
낮은 목 울림과 함께 대답이 들려왔다.
재희가 벗어나기 위해 살짝 몸을 움직였지만, 그의 팔은 풀어질 줄 몰랐다.
이윽고 그의 품에서 벗어나길 포기한 재희가 무혁을 향해 돌아누웠다.
다시 잠이 든 건지 그의 얼굴은 더없이 피곤해 보였고 또 편안해 보였다.
깨우려던 재희는 그만두기로 했다.
‘출장 준비하느라 바쁠 텐데도.’
온전히 출장 준비에만 몰두해도 부족할 시간이었을 터였다.
중간에 재혁의 가출이나 할머니 일만 아니었다며 이렇게 피로에 젖은 얼굴로 잠들어 있지도 않았을 텐데.
화를 낼 수도 있었고 귀찮을 법도 한데 무혁은 아무런 내색 없이 재희를 위해 기꺼이 시간을 내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재희는 그게 참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무혁은 평소와 똑같은 모습으로 일찍 들어오기도 하고 어쩔 땐 늦게 들어오기도 했다.
그리고 재희는 아침마다 잠든 무혁이 얼마나 피로가 쌓였는지 바라봐야만 했다.
오늘따라 거뭇한 그의 눈가가 유독 가슴이 아프다.
재희는 이렇게 아침에라도 무혁이 아무런 신경도 안 쓰고 조금이라도 더 자기를 바랐다. 깊은숨을 내쉬며 무혁이 다시 잠든 걸 확인한 재희는 조용히 그의 팔을 풀고 일어났다.
노을 서점 다락방에서 맞이하는 아침.
무혁의 출장 날.
재희는 무혁이 누구보다 특별한 아침을 보내게 하고 싶었다.
* * *
문득 품 안이 허전한 걸 눈치챈 무혁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다시 잠들기 직전 제 품에서 꼼지락대던 재희는 이미 없었고, 대신 그의 시야에 6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가 보였다.
재희가 예쁘다며 얼마 전에 구입한 나무로 만들어진 사각형 시계를 보던 무혁이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재희?”
옆자리의 익숙한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미간을 좁히며 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노을 서점 다락방은 재희의 취향대로 꾸며져 있었다. 안락한 분위기가 더없이 따뜻하고 정감 가는 풍경. 무혁은 마치 처음 다락방에 올라온 사람처럼 한참 동안 다락방 안을 둘러보았다.
품 안의 재희의 온기가 사라졌다고 해도 다락방 자체에서 그녀의 온기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오히려 재희가 더 깊고 진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무혁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 품에 재희가 없는데 무슨 소용인가.
당장 재희의 얼굴을 보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다.
누가 조르는 것처럼 묘하게 목이 답답해졌다.
무혁의 주먹이 꾹 쥐어졌다.
긴 시간 인내하며 노을 서점을 지켰던 시간이 떠오른다.
동시에 진득한 그리움이 발끝에서부터 서서히 물들며 번져 간다.
이런 지독한 그리움을 떨쳐내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윽고 재희를 찾으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무혁 씨. 인제 그만 일어날…… 깼어요?”
찰나의 지독한 그리움을 자아내던 재희가, 이젠 제 아내가 된 재희가 있었다.
노을 서점을 꼭 닮은 재희가.
재희의 얼굴을 보자 무혁은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무겁게 엄습해 오던 그리움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졌다.
무슨 심정으로 이 노을 서점을 지켰는지 그런 건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노을 서점을 재희에게 온전히 돌려주었다.
돌고 돌아 온전히 제 삶에 깊게 자리 잡은 재희가 웃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다.
이젠 그저 이 작은 행복감을 소중히 여기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응.”
비록 그런 자신의 마음과는 다르게 대답은 짧고 딱딱했지만.
다행히 그런 무혁의 반응에 익숙한 재희가 웃으며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내려와요. 아침 먹게.”
“아침?”
“곧 장거리 이동해야 하니까 밥은 든든하게 먹고 가야죠.”
“대충 공항에서 먹어도 돼.”
“그러지 말고요.”
먼저 다락방을 내려가던 재희가 손을 내밀었다.
무혁이 빙긋 웃으며 그 손을 조심스럽게 쥐었다.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 작은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돌아온다면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지독한 그리움 따위, 견딜 수 있어.’
이 손을 다시 놓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버텨낼 수 있었다.
다락방에서 내려오자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아침이 보였다.
미리 만들어둔 음식이 아닌 분명 여기서 만든 음식이었다.
어젯밤에 재희와 이 노을 서점에 왔을 때 그녀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데다 밤새 무혁이 그녀를 놓지 않았으니까.
무혁은 잠시 테이블 위를 물끄러미 보다 재희를 돌아봤다.
재희는 뭔가 칭찬을 원하는 듯 살짝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조리 시설도 충분하지 않았을 텐데.”
이곳에서 먹고 자던 종조부셨으니 조리 시설 정도는 노을 서점 뒤편에 있었다.
그곳까지 손보긴 했지만 아무래도 손에 익지 않은 공간이니 불편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무혁의 딱딱한 말에 재희가 조금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요리 못 할 정도는 아니에요. 서점 할아버지도 여기서 사셨으니까.”
“다음엔 깨워. 혹시라도 무거운 거 들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도통 듣고 싶은 말은 해주지 않는 무혁을 흘겨보던 재희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혁은 섬세한 것 같으면서도 이렇게 무심하다.
아무리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재희에 대한 걱정이 깔려있다고 해도 말이다.
재희가 무혁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무혁 씨. 제가 듣고 싶은 말은요.”
무혁은 다가오는 재희를 마주 보았다.
피로로 눈가가 거뭇했지만, 그의 시선은 진중하고 깊었다.
진중하고 진실한 눈동자.
한때 오해로 이 남자의 진중한 시선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적도 있었지만, 재희는 그의 눈동자를 참 좋아했다.
“고맙다고, 잘 먹겠다고 말해주는 거예요.”
“…….”
“전 무혁 씨한테 그 말 듣고 싶어서 열심히 준비했는걸요. 무엇보다.”
재희가 두 손을 뻗어 가만히 무혁의 뺨을 감쌌다.
“노을 서점에서 처음 맞이하는 우리 둘만의 아침 식사잖아요.”
결혼하고 재희와 수많은 아침을 함께 맞이했지만, 가장 의미 있는 노을 서점에서의 아침 식사는 오늘이 처음이었다. 출장을 가는 무혁에게 어떤 식으로든 특별한 아침을 선물해 주고 싶은 재희의 마음이 절절하게 와닿았다.
무혁의 입가가 가만히 올라갔다.
“그렇군. 여기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이지.”
그렇다면 무혁은 힘껏 재희의 마음에 답해야 했다.
“고마워. 잘 먹을게.”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노을 서점의 아침이었다.
* * *
인천공항.
재혁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무혁과 재희를 바라보았다.
재희가 무혁과 재혁이를 배웅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유 비서가 애써 못 본 척 다른 일 하고 있어도 재혁은 상관없었다.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저건 무슨 영영 이별하는 연인 같잖아.”
손을 꼭 마주 잡고 무혁을 올려다보는 재희의 얼굴엔 아쉬움과 미련이 가득했다.
겉으론 무혁은 티는 나지 않았지만 마찬가지로 재희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그 모습을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재혁은 그냥 안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그래.”
이곳에 오기까지 몇 번이나 했던 말이었다.
몇 번이나 무혁에게서 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재희는 역시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겨우 무혁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일이라도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게 싫었다.
그 사이 무혁과 다시 멀어질까, 작은 걱정이 들 때쯤,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어.”
그녀의 걱정을 알아챈 듯 무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확신을 주는 무혁의 말에 재희가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띄웠다.
“맞아요. 아무것도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무혁이 기약 없는 시간을 들여 지켜온 노을 서점.
이번엔 재희가 지킬 차례였다.
그가 다시 노을 서점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탑승 시간이 다가왔다.
재희가 아쉬운 듯 손을 놓자, 무혁이 다시 꽉 잡았다.
무혁 역시 이 손을 놓기 불안한 모양이었다.
다짐하듯 꼭 쥔 그의 손을 재희는 안심시켜주려는 듯 가만히 도닥였다.
그제야 무혁의 손에 힘이 풀리며 재희의 손을 놓았다.
“그, 누나.”
그때 재혁이 할 말 많은 얼굴로 다가왔다.
재희의 시선이 재혁에게 향했다.
“나 할 말이 있는데.”
하지만 재혁은 쉽사리 하고 싶은 말을 꺼내지 못했다.
어릴 적 철없는 장난으로 재희가 곤욕을 치렀던 일을 다시 사과하고 싶었다.
그때 이후로 재희와의 사이가 어색하게 변했다.
이제 와서 그때 일을 사과하기엔 너무나도 시간이 지나버렸다.
거기다 얼마 전에도 가출을 해서 재희가 또 곤욕을 치렀다.
나름 할머니에 대한 반항이었지만 결국 철부지의 행동이었을 뿐이다.
뒷감당은 모두 재희와 무혁이 치러야 했으니.
“재혁아.”
재희가 재혁에게 다가가 가볍게 그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재혁이 머쓱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마치 재혁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재희는 한결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조심히 잘 다녀와.”
재희는 더 이상 그때 일은 마음에 두지 않았다.
그러니 재혁이 사과를 해야 한다거나 그런 일은 없다는 듯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 어투였다.
지난 일은 모두 깨끗하게 정리한 듯 재희의 표정은 맑았다.
그런 재희의 마음을 알아챈 재혁이 안심한 표정이 되었다.
“다녀올게. 누나.”
“가지.”
무혁은 둘만 오래 대화를 나누도록 놔두지 않았다.
재혁이 툴툴거리며 뒤로 빠졌지만 무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무혁이 재희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다녀올게.”
“다녀와요.”
재희는 몇 번이나 돌아보는 무혁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마침내 무혁의 모습이 사라지자 재희의 표정이 흐려졌다.
“사실은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진짜 마음은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무혁은 강진과의 거래를 마무리를 짓기 위해 가야 했고, 재희는 자신의 자리에서 무혁을 기다려주어야 했다.
그러니까 무혁 씨가 지켰던 노을 서점, 이번엔 내가 잘 지키고 있을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