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일촉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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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일촉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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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일촉즉발
2022.08.29.
유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혜란과 재희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인지 혜란은 나가라고 말하진 않았다.
오히려.
“잘 놀다 가렴.”
이 한 마디만 남겨둔 채 재희와 함께 다른 곳으로 가버렸을 뿐이었다.
이후로 혜란은 단 한 번도 유라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흥. 언제까지 날 찬밥 취급할 수 있을지 두고 보라지.”
유라는 신경질적으로 와인을 단번에 마셔버렸다.
‘그나저나 장제우. 혼자 발을 뺐다, 이거지.’
한창 5월의 연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장제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에게 일이 생겼다며 5월의 연회 불참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대신 그림은 꼭 5월의 연회에서 잘 보여달라며 부탁 아닌 부탁을 함께 덧붙였다.
‘그것도 변명이라고. 남자가 간이 그렇게 작아서야.’
이제 와 겁이 난 건지 장제우의 뻔한 변명거리에 유라는 코웃음을 쳤다.
‘뭐 상관없어. 어차피 이번 일 끝나면 버릴 거였으니까.’
장제우의 쓸모는 딱 5월의 연회까지였다.
5월의 연회가 끝나면 그대로 버릴 참이었기에 유라는 전혀 아쉽지 않았다.
어쨌든 이 5월의 연회의 주인공은 자신이어야 했다.
불순물이 끼어드는 건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 저 신재희 같은.’
유라는 강진과 혜란, 강우진. 그리고 곁에 꼭 붙어선 무혁과 함께 서 있는 재희를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재희를 보는 혜란의 시선은 흡사 친엄마 같았다. 무섭기로 소문난 강진조차도 재희가 뭔가 말을 하면 시선을 주며 집중했다. 무혁에 비해 가벼운 우진은 일찌감치 재희를 가족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제까짓 것이 뭔데 저 자리에 있어?’
신재희만 아니었으면.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재희가 차지하고 있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빠득, 이를 갈던 유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지금 잘 즐겨둬. 신재희. 넌 오늘로 끝이니까.’
일찌감치 일강 방송사에 5월의 연회 때 박정수와 신재희가 찍힌 사진을 특종으로 내보내라고 제보해둔 상태였다.
미셸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타이밍에 그 사진은 대대적으로 방송을 탈 것이고, 그럼 신재희는 여기서 끝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라는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유라가 와인을 한 잔 더 마시려고 잔을 쥐었을 때였다.
“우와. 언니 예쁘다.”
유라는 갑자기 아래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시선을 내렸다.
딸기 주스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똘망똘망한 눈으로 유라를 올려다보던 도화가 방긋 웃었다.
“언니도 공주님이야? 너무 이쁘다.”
“뭐?”
“여기 예쁜 공주님 되게 많다. 꼭 동화 속 세계에 온 것 같아. 언니는 무슨 공주님이야?”
쉴 새 없이 조잘조잘 떠드는 도화를 유라가 인상을 찌푸린 채 내려다보았다.
“5월의 연회도 갈 데까지 갔네. 애가 왜 여기 있어.”
주변을 의식해 유라는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지만, 그 입에서 나온 소리는 절대 곱지 않았다. 유라는 아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있잖아. 언니. 언니는 여기서 세 번째로 예뻐.”
유라는 대꾸도 하지 않았지만, 도화가 쉴 새 없이 조잘조잘 신나게 떠들어댔다.
“물론 제일 예쁜 건 우리 엄마구, 두 번째는 조오기 야수 아저씨랑 같이 있는 언니야.”
도화가 방실방실 웃으며 가리킨 사람이 누군지 금세 눈치챈 유라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기껏 좋아졌던 기분이 다시 진창이 되었다. 아이는 무심코 하는 말이겠지만, 유라는 재희와 비교되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비켜.”
더 이상 상대하고 싶지 않았던 유라는 그대로 지나치며 일부러 도화의 어깨를 무릎으로 툭 밀었다.
“앗!”
방심하고 있던 도화가 중심을 잃고 뒤로 발라당 넘어졌다.
그 바람에 딸기 주스가 도화의 파란 드레스를 빨갛게 적셨다. 더럽혀진 드레스를 본 도화가 울상을 짓더니 곧 울음을 터뜨렸다.
“도화야!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도화의 울음소리에 세라가 급하게 달려왔다.
넘어진 도화를 발견한 세라가 급하게 안아 들었다. 그러자 더 서러워진 도화가 품에 고개를 묻고 더 크게 울어댔다.
“엄마아. 나 넘어졌어어. 내 드레스도 더럽혀졌어. 새 드레스인데.”
도화의 울음소리에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자 유라가 표정을 싹 바꿨다.
“죄송해서 어쩌죠? 피곤해서 잠시 쉬려고 걸음 옮기다가 그만 못 보고 부딪쳤어요.”
표정은 걱정을 담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기민하게 그 기색을 눈치챈 세라의 표정 역시 싸늘했으나, 여기서 괜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요. 못 봤을 수도 있죠.”
가볍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고는 세라가 도화를 안고 다른 곳으로 가버리자, 유라는 코웃음을 치곤 휴게실로 향했다.
휴게실에서 잠시 화장을 고치던 유라는 뒤따라온 재희를 거울 너머 발견하곤 몸을 돌렸다.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재희는 드물게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아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예요?”
“다짜고짜 들어와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아까 도화 왜 일부러 넘어뜨린 거예요?”
대화를 나누던 무혁과 혜란, 세라, 그리고 케빈은 도화의 울음소리에 단번에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도화는 아끼는 파란색 드레스가 얼룩덜룩해진 것도 서러운데 넘어져서 엉덩이까지 아프니까 몇 배는 더 서러웠는지 마구 울어댔다.
세라가 도화를 달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혜란이 다시 분위기를 정리했고, 아까 유라와 도화가 같이 있는 걸 본 재희가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아이에겐 손대지 말아요.”
“신재희. 지금 어머니 눈에 들었다고 세상이 다 자기 것 같은가 보네.”
유라가 팔짱을 끼고 재희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감히 나한테 그딴 말까지 하는 거 보면.”
“전 당연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5월의 연회에 더 이상 소란을 일으키지 말라고 경고하는 거고요.”
저를 보는 맑고 또렷한 눈동자.
유라는 재희를 보면 볼수록 거슬렸다.
당장이라도 재희를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었지만, 유라는 곧 벌어질 일을 기대하며 애써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그래. 즐겨둬. 그 자리를. 곧 다 사라질 거니까.”
“유라 씨. 일전에 전 분명히 말했어요. 욕심은 그만 부리라고요.”
“아니. 욕심은 내가 부리는 게 아니라 신재희, 너야.”
유라가 싸늘하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최후에 누가 웃게 될 건지 두고 보면 알겠지.”
휴게실에서 나오던 유라의 걸음이 일순 멈췄다.
휴게실 바로 앞 벽면에 팔짱을 낀 채 서 있던 무혁이 유라에게 시선을 잠시 두었다.
감정 한 톨 담지 않은 묵직한 시선에 기가 눌린 유라는 저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무혁의 커다란 몸이 벽에서 떨어지자, 유라를 감싸던 위압감이 사라졌다. 그제야 유라가 멈췄던 숨을 한숨 토하듯 뱉어냈다. 유라는 애써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무혁 오빠가 이렇게 애처가일 줄은 몰랐어.”
뭐라고 한마디 할 줄 알았던 무혁은 그대로 한유라를 지나쳐 휴게실 안으로 들어갔다.
철저한 무시.
무혁의 행동에 모멸감을 느끼면서도 유라는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입술을 꾹 깨물곤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재희야. 시간이 다 됐어.”
“준비할게요.”
재희는 떨리는지 심호흡을 했다.
“괜찮겠죠?”
“무엇이.”
“이번 만남.”
“그래.”
기다리고 기다리던 미셸과 만날 시간이었다.
끝까지 미셸이 누군지 알려주지 않으면서도 일러스트레이터를 찾는 에이전시 측이 괘씸하다며, 혜란이 잠깐 투덜거리는 걸 들은 적이 있던 재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무혁은 말없이 재희를 품에 끌어안았다.
재희가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설사 재희가 걱정할 만한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무혁이 반드시 막을 생각이었다.
그때 그 겨울 노을 서점에서 처음 만났을 때처럼, 4월 23일 그때처럼 재희가 다시 상처를 받는 건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다.
‘오늘 이후로 다시는 그런 일 없을 테니.’
박정수가 제대로 떡밥을 물었다면 알아서 정리가 될 예정이었다.
유라는 무혁의 생각대로 박정수의 성격을 분명 긁어댈 터였다. 그러면 박정수는 미리 던져둔 떡밥을 사용하겠지. 거기다 박정수의 그 급한 성격은 분명 화가 되어 돌아올 터였다.
“그거 알아요? 내 비밀 친구 무혁 씨.”
무혁의 가슴에 귀를 가만히 대며 재희는 눈을 감았다.
세차게 뛰는 남편의 심장 고동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에겐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걸.”
“나 역시.”
책장 너머의 친구.
자신과 다르게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따뜻하며 때론 소심하고 때론 수다쟁이가 되곤 했던 책장 너머의 친구. 당시 무혁에게도 재희란 존재는 큰 힘이 되었고, FM으로 살아오던 무혁의 삶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헤어져 있던 기간이 길어서일까.
때때로 이렇게 자신의 품 안에 있는 게 믿기지 않았다.
“오늘 이후로 많은 게 변할 거야.”
무혁의 눈동자가 어둡게 가라앉았다.
* * *
신경질적으로 걸음을 옮기던 유라는 갑자기 누군가가 거칠게 팔을 잡아당기자 눈을 부릅떴다.
“뭐……! 박정수?”
어울리지도 않는 정장을 입은 박정수가 씨근덕거리며 유라를 어디론 가로 끌고 가려고 했다.
“이거 안 놔?”
유라가 팔을 빼려고 버둥거렸지만, 우악스러운 박정수의 힘에 그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유라를 끌고 온 박정수가 그녀를 벽에 밀쳤다.
딱딱한 벽에 부딪히자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유라가 눈을 치켜떴다.
“미쳤어? 무슨 짓이야?!”
“한유라. 너 진심이 아니라고 말해.”
“뭐?”
“날 이용한 거 아니라고 말하란 말야.”
그날 클럽 하데스에서 유라에게 뺨을 맞은 뒤로 박정수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감히 유라가 자기를 이용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박정수는 거의 눈이 뒤집혔다.
유라 때문에 그 사진을 찍고 무혁에게 얻어터졌다.
무혁과 친분을 쌓거나 재희를 이용해 좋은 자리 하나를 얻어내려 했던 자신의 계획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날 모든 사태를 지켜본 친구들도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무리에서 떨어져 버린 박정수는 그야말로 비참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날 이후로 저를 보는 형들의 시선엔 경멸이 담겨 있었다. 다행히 아버지 귀에 들어가지 않은 듯했지만, 박정수는 괜히 눈치를 보느라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유라가 지금이라도 용서를 빈다면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줄 생각이었다.
“아직도 말귀 못 알아먹어?”
그런데 유라는 되레 화를 내며 신경질적으로 박정수를 밀쳐냈다.
“나 정수 오빠 이용한 거 맞아. 애초부터 정수 오빠에게 감정 한 톨 없었어.”
“…….”
“그러니까 제발 주제 좀 파악해.”
유라가 비릿하게 웃음을 띠며 박정수를 훑어보았다.
무혁과 비교하는 것조차 미안할 정도로 유라의 눈엔 박정수는 형편없었다.
사실 이렇게 엮여있는 것만으로도 유라는 기분이 나빴다.
“오늘은 좀 볼만하게 차려입은 것 같지만, 그래도 정수 오빠는 전혀 내 취향이 아니야. 그러니까.”
유라가 박정수의 어깨를 검지로 쿡쿡 찌르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만 질척대. 그 없는 자존심 조금이라도 챙기려면 말야.”
유라가 박정수의 어깨를 밀치며 지나쳤다.
유라를 금방이라도 붙잡을 것 같았던 박정수는 그대로 보내주었다.
“한유라. 내가 널 가만둘 줄 알아? 날 이용한 대가, 톡톡히 치르게 할 거야.”
박정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주머니 안에 손을 찔러넣고 무언가를 만지작거렸다.
아침에 익명의 이름으로 퀵이 도착했다.
우편물을 뜯어보니 웬 USB가 들어 있었고, 그걸 재생해서 들은 박정수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앞부분만 듣고 오디오를 끈 박정수는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벌겋게 변한 박정수의 눈은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