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화. 혜란과 강진 (85/128)


#85화. 혜란과 강진
2022.08.22.


5월의 연회가 열리는 라윤 갤러리 정원은 완벽했다.

미셸과 유라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는 단상이나 음식도 완벽했으며, 특별히 초대된 일류 연주자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도 훌륭했다.

거기다 마치 하늘이 도운 것처럼 날씨도 쾌청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라윤 갤러리 직원들은 한 비서의 지시에 따라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사전 점검에 여념이 없었다.

매년 그랬지만 올해는 꼼꼼한 재희의 손을 거쳐서인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아무것도 문제 될 것이 없는데도 왜인지 혜란은 연신 입구 쪽을 힐끗대고 있었다.


“어머니. 혹시 신경 쓰이는 점이라도 있으세요?”

무혁과 이야기를 나누던 재희가 그런 혜란의 기색을 눈치채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미셸이 참석한다고 하니 계속 신경이 쓰이는구나.”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대꾸했지만, 혜란은 계속 입구 쪽만 힐끗대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여유로우셨는데.’

미셸이 언제 올지 모르는 이상, 재희 역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초조했다.

혜란도 아마 같은 마음이겠지만, 그런 것치곤 평소의 혜란답지 않아서 의아해하고 있을 때였다.


“아버지는 지금 우진이가 모셔 오고 있습니다. 행사 시작 전에 도착하실 겁니다.”

그런 혜란을 지켜보던 무혁이 무심하게 말했다.

아, 그제야 재희가 뭔가 알겠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5월의 연회에 강진이 참석하겠다고 통보해 오자 라윤 갤러리는 술렁거렸다.

이유를 물어보니 강진은 지금까지 혜란의 일에 단 한 번도 관여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렇다 보니 강진의 참석은 한 비서마저도 잠깐 동요할 정도로 이례적인 일이었다.


“누가 알려달라고 했어?”

무혁을 흘겨보며 혜란이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더 이상 입구를 힐끗대며 쳐다보지 않았다.


‘망할 영감탱이. 그럼 그렇다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하여간 아버지나 자식놈이나 둘 다 똑같이 말이 없어선.

하나부터 열까지 강진의 성격은 역시 마음에 안 들었다.


“잠시 다른 곳 좀 둘러보고 올 테니 여기서 기다리렴.”

괜히 신경 쓴 게 민망하기도 하고 기분이 나빠진 혜란은 자리를 떴다.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비서와 얘기를 나누는 혜란을 보던 재희가 무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말 행사 시작 전에 오시는 건 맞아요?”

“갑자기 일이 생겨서 생각보다 늦어지시겠지만, 행사 전엔 도착하실 거야.”

“그럼 미리 어머니에게 언질이라도 해주지 그랬어요. 저렇게 신경 쓰시는데.”

“…….”

“그래도 덕분에 어머님도 마음이 놓이신 모양이에요.”

무혁이 따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재희가 웃으며 잘했다는 듯 그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그러자 무혁이 재희의 손을 그러쥐었다.


“저, 무혁 씨. 이 손…….”

노을 서점에서 무혁과 많은 대화를 한 영향일까.

대화하기 전까지 조금 멀게 느껴졌던 무혁이 요즘 유독 가깝게 느껴졌다.

어쩐지 그와 만난 지 얼마 안 됐을 때처럼 긴장이 된 재희가 어색하게 손을 빼려 했다.

그러자 무혁이 오히려 손깍지를 끼며 더 단단하게 쥐었다.

결국, 빼내려 애를 쓰던 재희는 얼마 안 가 포기하고 말았다.


“무혁 씨. 이 손 좀 놔요. 갤러리 직원들이 많아요.”

재희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러나 무혁은 시선만 잠시 재희에게 던졌을 뿐 손을 끝까지 풀지 않았다.


‘이상한 데서 고집이 세서는.’

민망해진 재희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다 입구 쪽에 서 있던 미경과 눈이 마주쳤다.

미경은 재희에게 고개를 까딱여 보이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손으로 눈을 가렸다.

비서실에서 일하던 재희와 지금의 재희의 위치가 달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에 순간 풋,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

무혁의 의아한 시선에 재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혁 씨. 좀 떨려요.”

“미셸과 만나는 일 때문인가.”

“네. 제가 준비하긴 했지만, 준비하는 입장과 당사자가 된 기분은 다르니까요.”

“후회해?”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에 재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후회하지 않아요.”

유라가 그렇게 관장실에서 쫓겨난 뒤 재희는 마음이 불편할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동안 유라가 자신에게 한 말이나 행동을 생각한다면 오히려 왜 좀 더 일찍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쨌든 잘못된 건 바로잡아야 하니까요.”

“그래.”

무혁이 희미하게 웃음 지어 보였다.

무혁을 올려다보며 마주 웃음 짓던 재희의 눈에 뭔가가 걸렸다.


“무혁 씨. 어깨에 꽃잎이 떨어져 있어요. 여기쯤이요.”

재희가 꽃잎이 붙은 자리를 제 어깨에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무혁은 꽃잎을 떼어내기는커녕 재희를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재희가 계속 같은 자리를 두드리자 그제야 마지못해 무혁이 어깨를 대충 털어냈다.

뭔가 못마땅한지 어깨를 털어내는 무혁의 손은 영 성의가 없었다.

거기다 엉뚱한 곳을 털어내기까지.

조금 답답해진 재희가 조금 더 붙어서며 올려다보았다.


“무혁 씨. 여기요. 여기.”

재희가 손을 뻗어 무혁의 어깨에 묻은 꽃잎을 털어주려 할 때였다.

갑자기 무혁이 재희의 허리를 두르고 끌어안았다.

재희가 당황한 얼굴로 그대로 굳어있는 사이, 무혁이 그녀의 목덜미에 살짝 제 볼을 비볐다.

남편의 온기와 감촉이 목덜미에 생생하게 와닿자 재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재희, 네가 떼어줘.”

“이, 이렇게 끌어안고 있으면 못 떼잖아요.”

“괜찮아. 떼어줘.”

기분 탓일까.

무혁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억지인 건 알죠?”

“알아.”

부정을 하기는커녕 순순히 수긍하며 무혁이 가만히 숨을 들이켰다.

재희의 체향이 폐부 깊숙이 들어찼다.

이렇게 몸을 맞대고 마음껏 온기를 느끼고 있는데도 갈증이 일었다.

무혁이 눈을 감으며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재희도 내 억지를 받아줘.”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저보다 세배는 큰 남자가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재희는 싫지 않았다.

못 말리겠다는 표정으로 이미 진작 떨어진 꽃잎을 털어내듯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꽃잎은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그래도 멈추지 않고 톡톡 무혁의 어깨를 두드려 주던 재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 하하하. 이거 참. 타이밍이.”

언제 온 건지 우진이 곤란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고 있었다.

거기다 그 옆엔 강진이 엄한 얼굴로 서 있었다.

강진과 시선이 마주치자 재희가 얼굴을 붉히며 무혁을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그의 커다란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무혁 씨. 아버님 오셨어요.”

재희가 초조한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무혁의 몸이 떨어져 나갔다.

방금 전까지 억지를 부리던 남자가 맞나 싶을 정도로, 무혁이 덤덤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오셨습니까.”

“그래.”

딱딱하게 대꾸한 강진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멋들어지게 꾸며진 정원을 강진이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꽤 공을 들였군.’

갤러리에 대해 잘 모르는 강진이 보기에도 행사가 열리는 정원은 훌륭했다.

혜란의 정성과 센스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희미하지만 강진의 눈동자에는 뿌듯함과 흐뭇함, 새삼스러움 등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윽고 강진의 시선이 다시 재희에게 닿았을 땐 그 감정은 깨끗하게 사라진 뒤였다.


“오늘 참 잘 어울리는구나.”

뜻밖의 강진의 칭찬에 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감사합니다.”

강진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무혁을 쳐다보았다.


“곧 출장 갈 예정이면서 느긋하구나.”

“출장 준비에는 차질이 없습니다.”

“이런 데 시간을 쓰면서 차질이 없다고?”

강진의 시선이 재희에게 닿았다.

무혁처럼 속을 알 수 없는 시선에 재희의 어깨가 반사적으로 조금 움츠려졌다.

무혁이 그런 재희의 앞을 막아서자 강진의 눈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강무혁, 너 지금.”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지금 이 상황이 못마땅한지 미간을 잔뜩 좁힌 채 혜란이 팔짱을 끼고 걸어오고 있었다.


“당신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거짓말 말아요. 내가 똑똑히 봤어요. 재희를 노려보는 거.”

혜란은 오자마자 분위기를 이렇게 만든 강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여긴 라윤 갤러리예요. 그리고 재희는 내 직원이에요. 지금 내 직원을 혼내기라도 하겠다는 거예요?”

혜란의 말에 강진의 얼굴이 못마땅함으로 찌푸려졌다.


“새아기는 직원이 아니라 며느리이지 않나.”

“내가 직접 직원으로 데리고 왔어요. 그러니 여기에 있는 만큼은 내 며느리이자, 직원이고 오늘의 주인공이에요.”

“…….”

“재희는 그만큼 중요한 아이예요. 그리고 여긴 내 공간이에요. 무혁이와 싸우려면 둘만 나가서 싸워요. 애꿎은 재희는 건들지 말고.”

무혁까지 싸잡아 혜란이 출입구 쪽을 가리키자 주변엔 적막이 감돌았다.


‘와. 대박.’

우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윽고 손으로 입을 가리고 돌아섰다.

웃으면 안 되지만,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려면 어쩔 수 없었다.


‘와. 아버지가 저런 표정을. 아니, 그 전에 우리 엄마 대체 형수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재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니 지금은 마치 딸 보듯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남들에게 과시하기 좋아하는 성격의 혜란이 무혁을 옆에 끼고 있기는커녕 저렇게 대놓고 재희 편을 들자 우진은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척 궁금해졌다.


‘지금은 물을 타이밍이 아니지만.’

확실한 건 혜란은 재희를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진은 혜란의 마음을 연 재희에게 진심으로 감탄했다. 싸늘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우진이 환기하듯 적막을 깨뜨렸다.


“형. 여기 앞에 누가 찾던데.”

우진의 어설픈 거짓말이었지만 무혁은 기꺼이 속아주었다.


“잠시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오자.”

재희는 걱정스러운 듯 혜란과 강진을 번갈아 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냉기에 자리를 비켜야 할까, 고민하는 사이 무혁이 재희의 어깨를 감싸고 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이 무혁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도 재희가 연신 걱정스럽다는 듯 돌아보았다.

우진이 걱정 말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하자 결국 재희는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 * *

라윤 갤러리 앞.

일단 자리를 비켜주긴 했으나 재희는 여전히 마음이 불편했다.

반면 무혁은 익숙한 상황인 듯 덤덤했다.


“괜찮을까요?”

“5분 뒤에 들어가면 상황은 정리되어 있을 거야.”

늘 그래왔다.

혜란과 강진의 싸움은 길지 않았다.

특히, 오늘 같은 날엔 직원들 앞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없으니 행사 시작 전에 모두 정리되어 있을 터였다.

그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재희는 행사를 앞두고 시부모님이 크게 싸우면 어떡하나, 걱정되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아버지도 5월의 연회에서 어머니에게 화를 내거나 하지 않으실 테니까.”

가끔 내조나 하라며 혜란의 속을 뒤집는 소리를 하긴 했지만, 강진은 다른 사람이 있는 앞에서 혜란을 망신 주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무혁은 갑자기 강진이 이 자리에 참석한 게 더 의외였다.


‘무엇보다 뭔가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겠지.’

겉보기엔 부부였지만, 실제로는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그런데 먼저 혜란의 사업에 관심을 가지고 참석을 할 정도라면 분명 강진도 다른 생각을 가진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은근히 강진을 신경 쓰던 혜란을 보니 둘 사이에 뭔가 변화가 있을 것 같았다.


‘재희와 결혼하고 나서부터 많은 게 변했어.’

재희를 놓치기 싫어 결혼을 강행했는데, 재희 한 사람이 들어오면서 크고 작은 변화가 생겼다. 무혁은 볼수록 재희가 사랑스러워 자기도 모르게 끌어안고 싶은 갈등과 싸워야 했다.

무혁은 여전히 시부모님 사이를 걱정하는 재희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재희 너를 탓하고 있는 게 아니야.”

“네?”

“오히려 재희를 마음에 들어 하고 계셔.”

“마음에 들어 하신다니.”

“아버지는 칭찬에 인색한 분이셔. 그러니 그분이 먼저 칭찬한다는 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재희 뒤에서 다다다, 누군가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희가 돌아보기도 전에 발소리의 주인공이 뒤에서 확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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