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저녁 식사(2) 2022.05.09.
강진이 무혁, 우진과 함께 자리를 비우자 거실엔 혜란과 재희 단둘만이 남았다. 갤러리가 아닌 곳에서 혜란과 이렇게 둘이서만 있어 본 적이 없던 재희는 어색한 이 분위기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고민이 되었다.
‘이럴 땐 희수가 부럽구나.’
유쾌한 성격의 희수는 어색한 분위기도 잘 풀었다. 말재주가 없는 재희로서는 이럴 때만큼은 희수의 성격이 부러웠다. 반면 혜란은 차를 마시면서 얌전히 앉아 있는 재희를 응시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둘의 모습을 떠올리는 혜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홀려서 한 짓은 아닐 거고.’
무혁을 직접 키우진 않았지만 그래도 30년 넘게 봐온 아들이었다. 적어도 혜란은 무혁의 행동이 정말 여자에게 홀려서 그런 건지, 진심인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동안 라윤 갤러리에서 본 재희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여우 짓을 해서 가방을 얻어낼 성격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혜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너, 그 가방 무혁이가 사준 거니?”
“…… 가방이요?”
“오늘 가지고 온 가방 말이야.”
재희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순순히 긍정하는 재희를 보는 혜란의 눈이 한층 더 가늘어졌다. 재희는 맞선 본 자리에서 무혁이 사준 그 가방은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만 들고 다녔다. 처음은 사교모임에서였고, 이번이 두 번째였다.
“네가 사달라고 했어?”
재희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닙니다.”
재희의 목소리는 조금 작았지만, 안에 담긴 감정은 진심이었다. 아무리 재희가 미웠어도 혜란은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혜란의 찻잔을 내려놓았다.
‘정말 무혁이가 먼저 사줬나 보네.’
자신과 방문할 때를 제외하고는 명품매장 근처에도 가지 않는 무혁이었다. 명품매장 직원에게서 무혁과 재희를 응대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그가 먼저 가방을 사줬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저녁 식사 때 보여준 모습을 보니 알 것 같았다. 무혁은 재희에게 진심이었다. 가족들에게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을 거리낌 없이 보여줄 만큼.
‘조금 부럽기도 하네.’
혜란은 무혁이 누군가를 그렇게 위하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더불어 무혁을 대하는 재희의 행동 역시 진심이었다.
“그래, 뭐 그렇다 치고. 이왕 받은 거 갤러리에도 들고 다니고 그러지 그랬니. 비싼 가방인데 아깝게.”
혜란의 말에 잠시 머뭇하던 재희가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함부로 들고 다닐 가방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뭐?”
“가격도 가격이지만, 무혁 씨가 처음으로 사준 가방이니까 중요한 자리에만 들고 다니고 싶었어요.”
“그 중요한 자리가 저번의 그 사교모임이니?”
“네. 그땐 어머니 체면도 있어서 그 가방을 들 자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오늘은 시부모님 뵙는 자리이기도 해서요.”
재희는 무혁이 처음으로 사준 가방인 만큼 특별한 날에만 들고 싶었다. 그래서 신줏단지를 모시듯 가방을 소중히 보관해 왔었다.
“……그깟 가방이 뭐라고. 기도 안 차서.”
코웃음을 치며 혜란은 재희가 입은 옷을 훑었다. 비싼 브랜드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저렴한 옷도 아니었다. 딱 자신이 적당하다고 생각한 가격선에서 구매한 뒤 깔끔하게 관리한 듯했다. 물욕이 정말 강했다면 이보다 더 비싼 브랜드의 옷을 사 입었겠지. 정말, 혜란이 오해한 대로 재희가 그런 여자였다면 무의식적으로라도 티가 났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 재희에게선 그런 티는 전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할 뿐. 혜란이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갤러리는. 일은 할 만하니?”
“네. 재미있어요.”
“재미있다고?”
대놓고 재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티를 내고 있던 혜란이었다. 더불어 유라를 며느리로 마음에 두고 있다는 마음까지 내비쳤다. 그런 상황에서 재희가 내놓은 대답은 의외였다.
“학부생 시절 라윤 갤러리는 꿈의 직장이었어요. 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고요.”
“당연하지. 내가 얼마나 까다롭게 운영하고 있는데.”
자부심 넘치는 표정을 한 혜란을 보며 재희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특히 어머니께서 처음 기획하신 5월의 연회는 유명했어요. 아무나 초대를 받지 못하는 5월의 연회는 저에게도 꿈의 행사였고요.”
“…….”
“그런 5월의 연회 준비를 제가 도와드리고 있다니, 신기하고 재미있어요.”
5월의 연회는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라윤 갤러리를 혜란이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기획한 행사였다. J 갤러리의 박명주가 혜란에게 이런 작은 갤러리를 물려받다니, 고생 좀 하겠다는 막말을 한 직후였다. 결과적으로는 크게 성공했고, 혜란은 이 일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혜란이 흥, 시침 떼며 대꾸했다.
“그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야. 매년 하는 행사인데 무슨.”
“하지만 시외할머님께 물려받은 라윤 갤러리를 아끼셨고, 어머님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는걸요.”
“뭐?”
의외의 말에 혜란이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라윤 갤러리에 입사를 원하는 지원자들은 하나같이 5월의 연회를 추켜세웠다. 그리고 그에 따른 포부가 컸었다. 재희도 분명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작은 갤러리였던 라윤 갤러리를 이만큼 키워낼 정도로 소중히 여기시잖아요. 그러니까 일이 많아도 괜찮았어요.”
“…….”
혜란은 말없이 재희를 응시했다. 처음이었다. 라윤 갤러리의 번드르르한 겉만 보고 칭찬하는 이들과 다르게 자신의 피나는 노력을 알아주는 이는. 남편인 강진조차 알아주지 못했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미워하는 며느리가 자신의 노고를 알아주니 혜란은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부 떠는가 싶어서 재희를 면밀하게 살폈지만,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 맑은 얼굴이었다.
“작은 판잣집 같은 곳에서 시작된 라윤 갤러리가 지금 이렇게 커진 건 시외할머님과 어머니의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시외할머님과 어머니의 노고로 이렇게 커진 라윤 갤러리의 5월의 연회와 50주년 특별 전시회 준비를 돕는다는 건 제게 큰 영광이에요.”
“……칭찬해도 뭐 없어. 그런다고 내가 널 예쁘게 볼 것 같니?”
혜란이 코웃음 치자, 재희는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뭐가 좋다고 웃고 있는 건지.’
여전히 못마땅했지만, 혜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혜란 본인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미소가.
* * *
‘하암.’
우진은 바둑을 두는 강진과 무혁을 보며 크게 하품을 했다. 아버지가 뜬금없이 무혁에게 바둑을 두자고 하는 순간부터 우진은 남몰래 긴장하며 따라왔다. 강진은 긴히 할 얘기가 있으면 이렇게 바둑을 두곤 했다. 그래서 우진은 지금까지도 바둑이 싫었다. 아버지가 바둑을 두자고 하는 날은 혼나는 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도 출근이 늦더구나.”
강진이 백돌을 놓으며 말했다. 무혁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대답했다.
“늦지 않습니다.”
“일전에 네게 분명히 말했다. 네게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고.”
“…….”
“새아기 때문이냐.”
흑돌을 놓으려던 무혁의 손이 멈췄다. 무혁의 무거운 시선이 강진에게 향했다. 강진은 그런 무혁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새아기가 별말 없더냐.”
“……재희를 만났습니까.”
“그래.”
“왜입니까.”
“궁금해서 만났다. 내 며느리가 어떤 아이이길래 네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건지.”
흑돌이 바둑판 위에 딱, 소리 내며 놓였다.
“업무를 등한시한 적 없습니다. 그런 아버지께서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딱. 대답하듯 백돌이 바둑판 위에 놓였다.
“지금같이 중요한 시기에 그 아이 때문에 출근이 늦고, 매번 자리를 비우는 게 맞는 거냐.”
순간 무혁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 재희가 새벽까지 안 자고 기다리고는 인제 그만하자고 말했던 이유를 지금에서야 알게 되자, 무혁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재희 때문이 아닙니다.”
무혁의 말에 강진이 시선을 들었다. 무혁은 짙게 가라앉은 눈으로 강진을 마주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원해서 그런 겁니다.”
“강무혁.”
“재희를 가만히 내버려 두십시오.”
침착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 목소리에 깃든 화는 격렬했다. 그의 화를 나타내듯 딱, 바둑판에 흑돌이 큰소리를 내며 놓였다. 흑돌을 검지로 꾹 누른 채 무혁이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한 번만 더 찾아가서 재희에게 한소리를 하신다면 가만있지 않겠습니다.”
“단지, 그 아이에 대해 궁금했을 뿐이다.”
“아버지의 의도는 상관없습니다. 아버지가 찾아가신 것만으로도 재희는 부담이 컸을 겁니다.”
“강무혁.”
“한 번만 더 저 몰래 재희를 찾아간다면 저 역시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냐?”
“아닙니다. 경고입니다.”
강진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순식간에 험악해진 분위기에 우진이 아이고, 소리를 내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유학도 다녀왔고, 원하시는 대로 KJ 건설에 들어왔습니다.”
무혁이 흑돌에서 손을 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재희를 건든다면 거래고 뭐고 없던 일로 하겠습니다.”
“강무혁. 그러니까 지금 하고 있는 네 행동들, 전부 네가 원해서 하고 있는 거다. 이거냐.”
“그렇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그러다가 추진 중인 사업이 잘못되면 어떻게 책임질 거냐.”
“애초에 재희를 위해 시작한 일입니다.”
“…….”
“그런데 재희를 위해 시작한 일이 오히려 재희를 괴롭게 만든다면 손을 떼겠습니다.”
무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와 저 사이의 거래에 재희를 끼워 넣지 마십시오. 제 아내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무혁이 서재에서 나간 뒤, 우진이 휘파람을 불며 바둑돌을 정리하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형, 로맨티스트 맞다니까.”
“강우진.”
강진이 경고하듯 이름을 부르자 우진이 빙긋 웃었다.
“그렇잖아요. 형이 저러는 거 본 적 있어요? 적어도 난 없는데.”
“…….”
“형수님, 진짜 대단하시다니까.”
“그렇군.”
우진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대답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강진이 순순히 긍정하자 우진이 할 말을 잃었다.
‘우리 형수님……. 진짜 대단하네.’
진심으로 감탄하는 우진과는 반대로 강진은 무혁이 앉았던 자리를 응시하며 깊게 생각에 잠길 뿐이었다. * * * 서재에서 나온 무혁은 재희가 있는 거실로 향했다. 혜란과 단둘이 있는 재희가 걱정되었다. 거실에 들어서자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는 재희와 혜란이 보였다.
“이만 돌아갑시다.”
뭔가 혜란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재희가 돌아봤다.
“무혁 씨. 대화는 다 끝났어요?”
“네. 시간이 늦었으니 인제 그만 돌아갑시다.”
무혁이 재희를 일으켜 세워주며 말했다. 재희는 살짝 구겨진 무혁의 옷 주름을 탁탁 펴주며 말했다.
“아직 그렇게 시간이 늦지 않았는걸요. 조금만 더 있다 가요.”
“이쯤 있었으면 충분합니다.”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혜란이 툭, 말을 던졌다.
“자고 가지 그러니.”
무혁과 재희가 동시에 혜란을 돌아봤다. 혜란은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말을 이었다.
“무혁이가 지내던 방 아직 안 치웠어. 자고 가는 김에 무혁이 네가 방 구경도 좀 시켜주든가.”
말을 마친 혜란이 피곤하다며 먼저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자고 가든 말든 신경 안 쓴다는 듯이. 얼떨떨한 얼굴로 방에 들어가는 혜란을 보던 재희가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무혁 씨. 우리 자고 가요.”
“억지로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살짝 설레는 얼굴을 했던 재희가 조금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내일도 바빠서 그래요?”
“그런 게 아닙니다. 어머니 눈치 때문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겁니다.”
재희가 고개를 저었다.
“무혁 씨 방을 구경하고 싶어요. 신혼여행 다녀와서 바로 신혼집에 가느라 무혁 씨 방 구경 못 했으니까요.”
무혁은 묵묵히 재희를 응시했다. 재희는 정말로 기대하는 눈치였다. 결국 무혁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하룻밤만.”
“정말요?”
재희의 안색이 밝아졌다. 무혁은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는 재희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당장에 품에 끌어안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면 재희가 놀랄까 봐 가만히 묻어두었다. 재희와 무혁이 자고 간다는 소리를 들은 강진은 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방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자고 가게요? 이런. 아쉽네요. 좀 더 이야기 나누고 싶은데 전 약속이 있어서 오늘 안 들어올 예정이거든요.”
그렇게 말한 우진은 곧바로 나가버렸다.
‘형은 나중에 나한테 술 사야 한다고.’
애당초 약속 따위 없었던 우진은 오피스텔로 향하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무혁과 재희가 자고 간다는 소리를 들은 강원댁이 흐뭇한 얼굴로 다가와 말했다.
“2층 복도 협탁에 작은 사모님이 쓰실 잠옷이랑 필요한 화장품 올려다 두었어요.”
재희가 웃으며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작은 사모님.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2층으로 올라가자 긴 복도와 몇몇 방이 보였다. 무혁이 협탁에 올려진 잠옷과 화장품 등을 들어주며 말했다.
“저기 끝 방이 제 방이었습니다. 우진이의 방은 정 반대편이고.”
“기대돼요. 무혁 씨 방은 어땠을지.”
“별거 없습니다.”
무혁이 짧게 말하며 문을 열어주었다. 재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처음으로 그가 자랐을 방에 발을 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