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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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미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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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미셸
2022.04.21.
느지막한 오후의 노을 서점은 고요했다.
노을 서점은 이제 근처 지역 토박이들이나 마니아층 사이에서만 쉬쉬하며 조용히 찾는 숨겨진 명소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평일의 노을 서점은 조용했지만, 가끔 사람 목소리가 들릴 때가 있었다.
바로 재희가 노을 서점에 찾아오는 그 날이었다.
재희가 입시 미술을 시작하면서, 무혁과 노을 서점에서 만나는 횟수가 줄었다.
그래도 무혁은 언제 올지 모르는 재희를 늘 기다렸다.
“저 왔어요.”
그 기다림의 끝에 재희가 일주일 만에 노을 서점을 찾았다.
일주일 만인데도 무혁은 마치 몇 년 만에 만난듯한 기분이었다.
노을 서점에 들어오자마자 재희는 자신의 지정석에 앉았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불투명한 유리문에 노을이 가득 고였다.
잠시 그 풍경을 구경하던 재희가 책장 너머로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이거 봐요.”
“이건.”
무혁은 태블릿 PC를 들어 화면을 보았다.
태블릿 PC에는 익숙한 서점의 풍경이 그려진 일러스트가 보였다.
노을빛으로 따뜻한 색감을 표현한 일러스트는 아기자기한 곰 캐릭터와 토끼 캐릭터가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고 있는 풍경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산양 할아버지가 책을 읽고 있는 모습까지.
재희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자율주제로 그려보라고 해서요. 그래서 한번 그려봤어요. 실력이 아직 부족해서 잘 못 그렸지만요.”
노을 서점을 아는 이라면 단번에 알 수 있는 풍경.
그리고 일러스트 안에 그려진 동물 캐릭터가 바로 무혁과 재희, 그리고 서점 할아버지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무혁은 재희가 그린 일러스트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재희의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리고 재희가 얼마나 이 노을 서점을 소중히 여기는지, 비밀 친구인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지가 여실히 느껴지는 일러스트였다.
“잘 그렸어.”
좀 더 멋진 말을 해줄 수도 있는데도 무혁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감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은 무혁으로선 그 말 한마디가 최고의 칭찬이나 다름없었다.
잊지 못할 재희의 첫 작품.
무혁은 세상 어느 일러스트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
“…….”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무혁은 미간을 꾹 누르며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는 윤 비서가 가져다 둔 피로 회복제가 보였다. 일정을 무리하게 소화하기 시작하면서 윤 비서는 항상 피로 회복제가 떨어지지 않도록 준비해 두었다.
무혁은 피로 회복제를 마신 뒤 시간을 확인했다.
천만다행으로 다음 회의까지 10분을 남겨두고 잠에서 깨어났다.
‘피곤했나 보군.’
업무 중에는 절대 쪽잠조차 자지 않던 무혁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잠들다니, 민석이 들었으면 기절초풍할 일이었다.
무혁은 손바닥으로 거칠게 얼굴을 문지르며 남아 있는 잠기운을 쫓아냈다.
어느 정도 잠기운을 쫓아낸 무혁의 시선이 책상 위에 올려진 휴대전화에 닿았다.
어젯밤, 인제 그만하자던 재희의 말에 순간 무혁은 사고가 정지됨을 느꼈다.
이어진 말로 헤어지자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알고 안도했지만, 다시 생각해도 재희의 그 말 한마디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그러면서도 어젯밤 재희가 보여준 모습이 잊히지 않았다.
늘 부드럽게 말하는 재희가 울컥해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이,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무혁은 그저 사랑스럽게만 보였다.
‘하지만.’
재희가 왜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내게 됐는지, 무혁은 줄곧 생각했다.
분명 아버지나 어머니의 입김이었을 터였다. 그렇지않고서야 재희가 갑자기 그런 말을 꺼낼 리가 없었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내선 전화가 울리면서 무혁의 생각도 끊겼다.
-상무님. 임원 회의가 곧 시작됩니다. 이동하셔야 합니다.
“출발합시다.”
무혁은 의구심은 머리 한구석에 밀어두고 금세 회의 주제로 머릿속을 꽉 채웠다.
무혁은 걸음을 옮겼다.
조만간 평창동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 * *
한편 유라가 돌아간 뒤에도 혜란은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냥 취미로 그렸었어요. 그런데 이게 이런 식으로 책에 실릴 줄은 몰랐어요.”
유라는 추억에 잠긴 표정으로 삽화를 보며 그렇게 말했다.
혜란이 유라의 팔을 잡으며 재촉하듯 물었다.
“정말이니? 이거 정말 네가 그린 거야?”
“네. 이제는 제 마지막 그림이 되었지만요.”
혜란은 추억에 잠긴 얼굴로 삽화를 보는 유라를 보며 머릿속으로 빠르게 생각을 정리했다.
‘유라가 이 삽화를? 하지만 유라는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다고 알고 있는데.’
피아노에 꽤 재능이 있었는지 유라의 어머니인 유화연이 그녀를 피아니스트로 키울 거라고 말했었다.
더불어 유라가 미술 수업을 안 들어서 걱정이라는 말도 함께.
“정말이니? 유라야. 어릴 때부터 미술이라면 질색하지 않았니. 그런데 네가 이걸 그렸다고?”
혜란의 의문에도 유라는 얼굴색 하나 바꾸지 않고 태연하게 말했다.
“피아노 연습도 고돼서 잠깐 손을 놓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때 그린 게 이거였어요. 사실 피아노만 아니면 다 좋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나 혜란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혜란을 보던 유라는 재빨리 책상 위를 훑었다.
자신의 말이라면 항상 믿어주던 혜란도 지금은 믿지 않는 눈치인 듯했다.
혜란이 자신을 믿게할 더 확실한 이야기가 필요했다.
기민한 유라의 시선에 종이 위에 휘갈겨 쓴 SNS, 무단도용, 삭제라는 단어가 잡혔다. 그 단어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이 그려지자 유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처음 그린 거라 자랑할 겸 처음으로 SNS에 올렸는데, 누가 제 그림을 가져갔지 뭐예요. 화가 났지만, 중요한 콩쿠르가 바로 코앞이라서 SNS를 삭제하고 다시 피아노에 몰두했어요.”
유라의 말에 혜란은 한 비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단 도용당한 뒤 SNS는 삭제되었다. 아마 일러스트를 그린 이는 도용 당한지 몰랐거나, 출판사 상대로 따지기엔 나이가 어리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었다.
그러나 혜란의 의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도저히 이 화풍과 유라는 맞지 않아.’
아예 유라와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유라는 음이 강한 곡을 잘 소화하기로 유명했다.
실제로도 유라의 취향은 강렬한 무언가였다. 곡이든, 옷이든 무엇이든.
‘무슨 생각하는 거람. 유라가 나한테 거짓말할 리가 없잖아.’
의심이 깊어지려 하자 혜란은 의식적으로 접어두기로 했다.
유라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도 없거니와, 어찌 되었건 미셸이 찾던 일러스트레이터가 한유라라니. 혜란으로서는 호재나 다름없었다.
유라가 돌아간 뒤, 혜란은 내선 전화를 들었다.
“한 비서. 지금 들어와요. 당장.”
한 비서가 관장실에 들어오자마자 혜란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당장 미셸에게 메일을 보내요. 그 일러스트레이터 찾았다고.”
놀란 한 비서가 대답하기도 전에, 혜란이 고개를 젓더니 팔짱을 끼고 초조하게 관장실을 왔다갔다 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니, 아니지. 5월의 연회에 미셸 본인이 참석하면 그 일러스트레이터를 소개해 주겠다고 전해요. 지금 바로.”
“관장님.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았단 말씀이십니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일러스트레이터의 단서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찾았다니.
한 비서는 지금 흐름을 쫓아갈 수가 없었다.
“맞아요. 찾았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딱 그 짝이야.”
“혹시 누군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유라예요.”
“한유라 씨 말입니까.”
“그래요. 그 한유라! 어릴 때부터 마음에 쏙 드는 행동만 하더니 어쩜 이렇게 예쁜 짓만 할까.”
“알겠습니다. 바로 메일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한 비서가 나가자 혜란은 식어버린 홍차를 마시며 흥분한 속을 가라앉혔다.
혜란은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가 머지않았음을 느끼자 전율에 휩싸였다.
* * *
“엄마. 나 이거 사줘.”
“안 돼.”
“이거 사서 벨라에게 주고 싶단 말이야아.”
“너 아까 벨라한테 준다고 인형 샀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야!”
케빈은 장난감 코너 앞에서 실랑이하는 모녀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세라가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는데도 결코 포기를 모르는 도화도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음?”
케빈은 메일 알람이 뜨자 곧바로 휴대전화를 열었다.
메일을 확인한 케빈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다.
“세라.”
“……?”
바짓자락에 매달려 잉잉거리는 도화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보던 세라가 돌아보자, 케빈이 얼른 메일을 보여 주었다.
“그 일러스트레이터 찾았다는데?”
“그래?”
세라가 얼른 도화를 안아 들고 케빈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내용이 기가 막힌걸.”
케빈이 보여 준 메일을 확인한 세라가 흐음, 얕은 콧소리를 냈다.
“지금 우리 상대로 딜을 하고 있는 거 맞지?”
케빈이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지만, 세라는 생각에 잠겼다.
메일의 요지는 그렇게 애타게 찾는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았다. 그러니 5월의 연회에 미셸 본인이 참석한다면 직접 소개해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세라가 소속된 에이전트에서도 그녀의 얼굴을 아는 이는 극소수였다.
그런 미셸에게 본인이 직접 5월의 연회에 참석한다는 조건으로 찾고 있던 일러스트레이터를 소개해 준다니.
라윤 갤러리의 대범함에 세라는 생각 정리를 마친 뒤 말했다.
“참석한다고 해.”
“뭐?”
당연히 거절할 거라 생각했던 케빈이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내 황당한 요구를 끝까지 들어줬으니, 우리도 그 정도 부탁은 들어줘야 하지 않겠어?”
“세라. 거절해도 괜찮아. 넌 한국에서 전시회 열 생각 따위 없잖아.”
케빈의 입이 댓 발 튀어나오자, 세라는 손으로 그 입을 쳤다.
케빈이 눈을 찌푸리며 튀어나온 입을 다시 집어넣자 세라는 도화를 고쳐 안아 들며 말했다.
“본인이 참석은 할 거지만, 미셸이 누구인지는 거기서 알아봐야겠지.”
“…….”
“정말 그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은 게 맞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세라는 싱긋 웃으며 떼쓰는 도화의 등을 두드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케빈이 세라의 뒤를 따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저 괴짜.”
* * *
“잠시 회의실에 모여주세요.”
점심 식사 후 오후 업무를 시작하려던 비서실 직원들이 한 비서의 호출에 회의실로 모였다. 한 비서는 직원들이 모두 모인 걸 확인한 후 말했다.
“곧 대대적인 공지가 내려올 예정이겠지만,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하시겠지만, 좀 더 철저하게 5월의 연회 준비에 임해야 한다고 관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 5월의 연회 결과에 따라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의 흥망이 결정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한 비서는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비서실 직원들을 보며 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말을 이었다.
“이번 5월의 연회에 관장님께서 그토록 공을 들이시던 미셸이, 본인이 직접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왔습니다.”
순간 회의실이 술렁였다.
몇 년 전부터 혜란이 프랑스 화가 미셸 전을 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붓고 있다는 건 비서실 직원들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미셸 본인이 5월의 연회에 참석한다니, 그야말로 대형 뉴스감이었다.
그야말로 평화로운 라윤 갤러리에 폭탄이 던져진 거나 다름없었다.
“이번에 미셸이 5월의 연회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제안한 것이 있었는데, 바로 한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달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일러스트레이터는 가까이 있었습니다.”
“누군지 여쭤도 될까요?”
미경이 묻자, 한 비서가 기꺼이 대답해 주었다.
“여러분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한유라 씨입니다.”
다른 의미로 회의실이 술렁였다.
자주 보는 한유라가 미셸이 찾는 일러스트레이터라니.
다들 얼굴에 혼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하고 아무튼 이번 5월의 연회 준비,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됩니다. 평소보다 더 주의 깊게 보고 또 봐야 합니다. 관장님께서 더 꼼꼼하게 신경 쓰실 거라고 하니 다들 긴장의 끈을 놓지 마시길 바랍니다.”
자리를 파한 뒤 직원들은 각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앞으로가 고달파지겠다며 투덜대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정말 미셸 본인이 참석하는 거냐며 흥분한 직원도 있었다.
재희는 자리로 돌아가며 한 비서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미셸이라.’
5월의 연회에 미셸이 참석한다고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버킷리스트에 있을 정도로 꼭 보고 싶었던 미셸 전을 어쩌면 라윤 갤러리에서 보게 될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준비 과정에 자신이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흥분되었다.
한껏 들떠있는데 휴대전화가 지잉,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재희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관장실로 들어오거라.]
혜란이었다.
라윤 갤러리에 있는 동안 절대 사적으로 연락하지도, 말 걸지도 않던 혜란의 메시지에 재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희는 묘한 불안함을 느끼며 조용히 관장실로 향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이미 재희의 방문 건을 전달받은 한 비서가 두어 번 노크를 하더니 관장실 문을 열어주었다.
의자에 앉아있던 혜란이 아직 자리에 앉지도 못한 재희를 냉랭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장독수 화백의 작업실에 좀 다녀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