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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거짓말 (49/128)


#49화. 거짓말
2022.04.18.


검은색 세단이 언덕 아래에 멈췄다.

무혁은 시동을 끄며 조수석을 바라보았다. 전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재희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잠들어 있었다. 무혁은 핸들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괸 채 잠든 재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새벽에 재희가 제 얼굴을 매만지고 수줍게 입 맞췄던 감촉이 생생하다.

잠든 척했던 무혁은 재희에게 키스를 퍼붓고 싶은 욕망을 눌러 참느라 꽤 오랫동안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다. 결국, 다시 제 고집대로 재희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을 하기로 했으니 어젯밤에 인내심을 발휘했던 보람이 있었다.

계속 이렇게 잠든 재희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무혁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무혁은 아쉬운 마음을 누른 채 상체를 기울여 안전벨트를 풀어주었다.

달칵, 안전벨트가 풀리며 재희의 속눈썹이 움찔 가늘게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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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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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잤습니까. 도착했습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재희가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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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그만 잠들어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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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습니다. 어제 피곤했을 테니까.”

무혁이 가방까지 챙겨주지 재희가 민망한 얼굴로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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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잘해요. 무혁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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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전화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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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봐요.”

바깥을 잠시 살펴보던 재희가 곧 가볍게 무혁의 볼에 입 맞췄다.

무혁의 커다란 몸이 아주 잠깐 굳었지만, 재희는 부끄러운지 서둘러 내려버렸다.

재희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매만지던 무혁은 손으로 눈을 덮으며 시트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그의 목덜미는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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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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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네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재희는 반갑지 않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유라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재희의 곁에 나란히 서 있었다.

알은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먼저 친근하게 말을 거는 상대를 무시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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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긴 어쩐 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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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연차여서 놀러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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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재희의 시선이 절로 유라의 손으로 향했다.

유라의 손엔 S 호텔 애플파이 상자가 보였다. 일전에 재희가 라윤 갤러리에 처음 방문했을 때 혜란에게 주기 위해 샀었던 그 애플파이였다. 유라가 싱긋 웃으며 애플파이 상자를 조금 들어 보이고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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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좋아하시는 디저트거든요. S 호텔 애플파이. 이거 사드리면 아주 기뻐하셔서 이젠 필수 선물이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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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재희는 일전에 똑같은 애플파이를 사 갔을 때, 혜란이 보였던 반응을 떠올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며 대충 꽃다발과 애플파이를 밀어내던 모습.

똑같은 선물이래도 유라가 사 간다면 혜란은 다른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자 재희는 쓰게 웃으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유라가 성큼 먼저 안으로 발을 들였다.

당연하다는 듯 재희가 버튼을 누르는 걸 지켜보던 유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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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관장님과 어머님은 사이가 안 좋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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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희가 돌아보자 유라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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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이 라윤 갤러리를 물려받았을 때 박 관장님이 비웃으셨거든요. 이런 작은 갤러리 받아서 운영하기도 수치스러우실 것 같다고. 그때 라윤 갤러리는 유명하지 않은 작은 갤러리였고, 당시 박 관장님의 J 갤러리를 최고로 쳤을 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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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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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예요. 두 분의 사이가 안 좋아진 건. 지금은 완전히 뒤집혀서 라윤 갤러리가 국내외로 유명해졌고 박 관장님의 갤러리는 2인자로 전락해 버렸죠. 그때 박 관장님이 일주일을 앓아누우셨다죠. 아마 평생 두 분은 앙숙 관계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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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 씨.”

재희가 뭐라 말하려 할 때 유라가 말을 가로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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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런 이야기를 해주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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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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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 그룹 며느리로서 이 정도의 히스토리는 알아둬야 앞으로 편하지 않겠어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을 혼자 모르면 슬프잖아요. 무엇보다.”

유라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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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제 사람에게는 한없이 친절하시지만 아닌 사람에겐 매우 차가운 분이신 걸 알아두셔야 앞으로 눈치껏 행동하기 편하실 것 같아서요.”

 
-5층입니다.

엘리베이터의 기계음이 도착을 알렸다.

유라는 굳어 있는 재희를 지나쳐 유유히 먼저 내렸다. 그러곤 뒤를 돌아보며 비서실 문을 열어달라는 듯 진하게 웃어 보였다. 재희는 사원증을 꺼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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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 씨. 신경 써준 건 감사하지만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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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구요?”

삑-

보안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

재희가 유라를 보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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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 씨 말대로 KJ 그룹의 며느리는 저이니까 제가 알아서 할게요. 들어오세요.”

그러곤 재희가 먼저 들어가 버렸다.

주제넘는 말은 하지 말라는 재희의 속뜻에 벙쪘던 유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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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애플파이 상자의 끈 리본을 사정없이 쥐며 이를 갈던 유라가 곧 아무렇지도 않게 표정을 바꾸며 비서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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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이에요. 다들 고생 많으시네요.”

금세 유라 주위로 비서실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재희는 못 본 척 자리에 앉아 업무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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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왔네요.”

앉자마자 미경이 의자를 끌고 다가오며 말을 걸어왔다.

처음에 재희를 못마땅하게 여기던 미경은 회식 이후로 이렇게 툭툭 내뱉듯 뜬금없이 말을 걸어오곤 했다.

이게 미경의 성격임을 알게 되어서일까.

재희는 그게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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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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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자.”

미경이 눈짓으로 유라를 가리켰다. 모두가 좋아하는 유라를 미경은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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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관장님이랑 친해도 남의 직장에 저렇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건 민폐예요. 친구도 없나 봐.”

미경이 새침하게 말하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재희는 한 비서가 당연하다는 듯이 유라를 데리고 관장실로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다시 시선을 모니터에 두었다.

* * *

유라가 비서실 직원들과 떠들던 그 시각.

혜란은 낡은 동화책 안에 그려진 삽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미셸이 찾아달라고 요구한, 무명의 일러스트레이터의 삽화였다. 따뜻한 색감을 쓴 부드러운 화풍이 인상적인 삽화였다.

혜란은 다이아몬드가 촘촘히 박힌 반지를 낀 검지로 서점의 낡은 소파에 앉아 간식을 나눠 먹는 캐릭터가 그려진 삽화를 가만히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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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용이라.”

얼마 전,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해 알아본 한 비서가 말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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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계약을 한 게 아닌 것으로 파악됩니다. 원래부터 무단도용으로 시끄러웠던 출판사로, 이 삽화도 일러스트레이터가 개인 SNS에 올린 그림을 무단으로 도용해서 실은 것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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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계약서가 없던 거였군요. 그럼 그 일러스트레이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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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도 출판사에 따지거나 해명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SNS를 폐쇄하고 그 후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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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작품이 무단으로 도용당했는데 가만히 있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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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추측하기로는 도용 당한지 몰랐거나, 출판사 상대로 따지기엔 나이가 어리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해당 출판사는 결국 이런저런 악재가 쌓여 폐업을 하였고, 그로 인해 더 이상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해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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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일러스트레이터 한 명 찾는 게 이리 힘들 줄이야.”

SNS를 했다면 어느 정도 흔적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SNS 계정을 찾아봐도 아무것도 나오는 게 없었다.

5월의 연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칫하면 5월의 연회에 미셸을 초대하는 건 고사하고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도 물 건너갈 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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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혜란은 머리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일러스트레이터 일도 일이지만, 줄곧 혜란의 머릿속엔 모임 때 보았던 재희의 태도가 잔상처럼 남았다.

박명주와의 다툼에서 재희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거라 생각도 못 했다.

늘 재희를 구박했었고 못마땅한 티를 냈으며, 유라를 며느리로 내심 점찍어 두었었다고 굳이 숨기지도 않았다.

아무리 둔한 아이라도 저를 싫어하는 걸 어느 정도는 눈치챘을 터.

마음에 안 드는 재희를 굳이 라윤 갤러리에 출근까지 시킨 이유도 그녀를 후계자로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유라를 라윤 갤러리 후계자로 생각하면 했지.

넌 우리 집안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려고 불러들인 거였다. 그러나 생각 외로 재희는 묵묵히 기대 이상으로 일을 잘했고 잘 적응해 나갔다.

그 속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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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없는 건지. 거기가 감히 어느 자리라고 나서?”

마음이 심란하니 고질병인 신경성 두통이 도진 머리가 지끈거렸다. 혜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진통제를 삼켰다.

한숨을 내쉬며 동화책을 덮으려던 혜란의 손이 멈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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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그 애 원래 일러스트레이터를 했다고 했던가.”

관심이 없다 보니 재희의 원래 직업이 일러스트레이터란 걸 머릿속에서 지운 지 오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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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가 그린다면 이런 화풍이려나.’

재희의 성격과 삽화의 분위기를 비교해보던 혜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혜란이 재희를 부르기 위해 비서실로 연결된 내선 전화에 막 손을 뻗었을 때였다.

때마침 벨이 약하게 울렸다.

혜란이 미간을 좁히며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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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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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님. 한유라 씨가 방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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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가요? 약속도 없는데 갑자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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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장님께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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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요. 들여보내요.”

평소라면 갑작스러운 유라의 방문도 반겼을 테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고, 저 마음 여린 아이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니 혜란은 결국 방문을 허락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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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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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렴. 유라야. 말도 없이 무슨 일이니?”

유라가 들어오자, 혜란은 기꺼이 반겼다.

유라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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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이후로 어머니를 한 번도 못 뵈어서요. 걱정도 되고 보고 싶어서 이렇게 어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애플파이를 사서 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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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유라야. 이런 거 안 챙겨줘도 되는데. 고맙다.”

혜란이 애플파이를 받아들며 웃어주었다.

그 모습을 보는 유라의 입매가 순간 굳었다.

저에게 보이는 웃음이 이전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라는 곧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했다.

유라가 익숙하게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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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셨어요. 그때 박 관장님 언행이 지나치셨다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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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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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어머니. 그때 제가 도와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나서도 되는 자리일지 고민이 많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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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다. 괜히 너까지 나섰다가 불똥 튀어서 네가 상처 입으면 내 마음도 편치 않을 테고, 무엇보다 유 사모님 볼 낯이 없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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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말인데요, 어머니. 기분 전환 겸 이번 주말에 저랑 점심을 같이하지 않으실래요? 제가 멋진 레스토랑을 봐두었는데, 거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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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야.”

혜란은 애플파이 상자를 마호가니 책상에 올려두며 부드럽게 말을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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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찾아왔는데, 미안하구나. 오늘은 내가 좀 피곤해서 그런데 이만 돌아가 주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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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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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생각할 게 많아서 그렇단다.”

처음 보는 혜란의 태도에 순간 유라는 울컥했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오히려 혜란을 이해한다는 듯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짜증이 났지만, 지금은 물러설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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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해요. 제가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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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니. 그런 게 아니야. 다음에 내가 다시 부르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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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머니.”

한보 물러서기로 하고 나가려던 유라의 시선이 마호가니 책상 위에 펼쳐진 동화책에 닿았다.

낡디 낡은 더러운 동화책.

손도 대기 싫을 정도로 더러워 보이는 동화책이라 순간 유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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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런 지저분한 걸 여기에 둔거지.’

동화책을 보려는 것도 아닐 테고 혜란이 이유 없이 저걸 여기다 가져다 둘 리가 없었다.

나가려던 유라가 동화책을 물끄러미 바라보자 혜란의 시선 역시 똑같은 곳에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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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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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어머니 책상에 동화책이 있다니 조금 신기해서요.”

유라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한 유라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는 혜란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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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거 아니란다. 내가 찾고 있는 일러스트레이터가 있는데, 단서가 이 삽화 하나뿐이라 펼쳐놓은 것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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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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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번 5월의 연회에 참석하는 조건으로 미셸이 이 삽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를 찾아달라고 하지 않겠니. 그런데 어찌나 유령 같은지, 단서 잡기가 힘들어.”

교양수업으로 명망 있는 화가에게 미술을 배웠지만, 유라는 미술을 싫어했다.

그림이든 전시회든 역시 관심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미술에 관심 없는 유라조차도 미셸이라면 익히 알고 있었다.

더불어 혜란이 미셸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도.

순간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가며 유라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지어졌다.

유라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표정을 지으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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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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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도 이 삽화 알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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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주 잘 알아요. 이 삽화 그린 사람이 누군지도요.”

유라가 마호가니 책상으로 다가가 삽화를 애정 어린 손짓으로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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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야. 그게 무슨 소리니? 이 삽화를 그림 사람이 누군지 안다고?”

놀란 혜란이 닦달하듯 묻자, 유라는 일부러 조금 뜸을 들였다.

혜란이 제게 집중하여 답을 기다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유라는 속으로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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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하늘이 준 기회야.’

유라는 동화책을 집어 들어 삽화를 바라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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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제가 그렸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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