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5화. 라윤 갤러리 사교모임 (45/128)


#45화. 라윤 갤러리 사교모임
2022.04.04.


금요일.

재희는 드레스룸 깊숙이 보관했던 H 버킨백을 꺼냈다.

맞선을 본 날, 무혁이 다짜고짜 백화점에 데리고 가서 사주었던 그 가방이었다.

어마어마한 가격에 손이 떨려 차마 들고 다니지 못해서 거의 신줏단지 모시듯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고는 가진 옷 중에서 가장 비싼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허리에 달린 리본 벨트가 예쁜 브이넥 원피스였다.

튀지 않는 목걸이를 한 뒤 드레스룸 밖으로 나가자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는 무혁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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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저 안 이상해요?”

평소와 다른 스타일로 입은 것이다 보니 어색했다.

무혁은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재희가 마주 잡자, 무혁이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폭, 넓은 남편의 품에 재희가 안겼다.

무혁은 허리를 조금 굽혀 제 품에 안긴 재희의 귀에 가볍게 입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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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어울립니다.”

귓가에 속삭이는 중저음의 목소리에 재희의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재희가 무혁의 팔에 팔짱을 살짝 끼며 웃었다.

다정하게 집을 나서는 부부를 보며 경자가 흐뭇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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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방.”

차에 타자마자 무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재희가 가방을 들어 보이며 웃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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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혁 씨가 사준 그 가방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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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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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날인만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꺼냈어요.”

후줄근하게 입고 오지 말라는 혜란의 말을 떠올리며 재희는 가방을 손끝으로 쓸었다.

무혁이 묵묵히 그 모습을 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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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 자리에 가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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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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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참석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입니다. 내키지 않는다면 가지 않아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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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요. 어머님이 모임에서 정식으로 절 며느리로 소개해 주시는 자리인걸요.”

아무리 떨쳐내려 해도 혜란과 유라가 나눈 대화는 여전히 잔가시처럼 따갑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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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계속 무혁 씨 뒤에 숨어 있을 수만은 없어.’

어쨌든 재희가 무혁의 아내인 이상, 마냥 피할 수만은 없었다.

언젠가는 부닥쳐야 할 일이기도 했다.

무혁에게 물어봤을 때, 오늘의 모임은 그냥 평범한 모임이라고 했다.

정. 재계 사모님들이 각자 모은 미술품을 감상하며 적당한 대화와 친분을 나누는 자리.

그러나 그 자리에 모이는 사람들이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이들이다 보니 살짝 긴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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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혁은 옆자리에 앉아 살짝 긴장한 듯한 재희를 힐끗 보았다.

생각 같아선 무혁은 재희 대신 그 자리에 참석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저히 뺄 수 없는 중요한 스케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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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 생긴다면 연락하십시오. 오늘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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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애가 아닌걸요. 얼른 가요. 늦어요.”

재희가 라윤 갤러리 쪽으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며 무혁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혁은 한참이나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라윤 갤러리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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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저녁에 있을 모임 때문에 라윤 갤러리는 하루 휴관을 했다.

평소 로비로 사용하는 장소에는 여러 점의 작품들이 걸려 있었고, 한쪽에 놓인 긴 테이블에는 저녁에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갖가지 음식이 준비될 예정이었다. 초대된 연주단도 악기를 점검하며 연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에서 혜란이 한 비서에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본격적인 분위기에 재희는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조심스럽게 혜란에게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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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한 비서가 재희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혜란의 서늘한 시선이 재희에게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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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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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뭐 도와드릴 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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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 넌 손님 맞을 준비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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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시 시선을 돌리려던 혜란이 재희의 가방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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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그 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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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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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재희가 가방을 직원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는 혜란의 눈초리가 곱지 않았다.

지난겨울, 신상 가방을 보기 위해 늦잠 자는 우진을 끌고 H 매장에 갔었다.

거기서 평소 명품 매장에 발도 안 들였던 무혁이 웬 여자를 데리고 와서는 가방을 샀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날 직원에게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가 막혔던지.

유라를 내심 며느리로 점찍었던 혜란이 불안해져 우진이를 닦달했지만, 모른다는 답만 들려올 뿐이었다.

무혁이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그 가방의 주인이 재희일 거라 생각은 했었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자 더욱 재희가 못마땅해 보였다.

지금 혜란의 눈에는 처음 본 남자에게서 가방이나 얻는 여자, 그 이상도 그 이하로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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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기도 하지. 어떻게 그 가방을 이 자리에 들고나올 생각을 하지?’

혜란은 조용히 할 일을 찾아 분주히 움직이는 재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시간이 되자 연주단이 잔잔한 음악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이윽고 초대를 받은 손님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재희는 혜란의 옆에 서서 방송에서나 보던 배우나 뉴스에서나 보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푸근한 인상의 여자가 반갑게 웃으며 혜란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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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관장님.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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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유 사모님. 그동안 잘 지내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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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죠. 이렇게 올해도 초대를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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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유 사모님이 오셔야 하는 자리죠.”

꽤 친분이 있는 듯 반갑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유 사모님이라고 불리던 여자.

대한 그룹의 안주인이자 유라의 어머니인 유화연이 재희가 있는 쪽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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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여기 이분은 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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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혜란이 정중하게 고개 숙이는 재희를 서늘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그 기색을 숨기며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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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사모님은 처음 보시겠군요. 이번에 제 큰아들과 결혼한 우리 며느리예요. 재희야. 인사드려야지.”

쌀쌀맞고 냉랭한 평소와 달리 다정하게 부르는 혜란을 보며 재희는 속으로 당황했다.

그러나 그 집에서 항상 감정을 감추고 살아왔던 재희였기에 능숙하게 부드럽게 웃으며 인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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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뵙겠습니다. 신재희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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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반가워요. 어쩜 참 참하게 생겼네요. 우리 유라와 다르게 차분해 보이고.”

유화연의 입에서 유라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재희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설마 하는 생각이 들려던 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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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재희의 설마 하는 마음을 비웃듯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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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야. 어서 이리 와서 인사드리렴.”

유화연이 푸근하게 웃으며 손짓하자, 검은색 오픈 숄더 원피스를 입은 화려한 외모의 유라가 진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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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엄마를 졸라서 저도 같이 참석했는데, 괜찮으시죠?”

생각지도 못한 유라의 등장에 혜란이 반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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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야. 유라야 언제든 환영이지. 오히려 유라가 재미없을 텐데 영 미안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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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다뇨. 전.”

유라의 시선이 찰나지만 재희에게 꽂혔다가 다시 혜란에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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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정말 기대될 정도로 재미있을 것 같은걸요.”

몇 마디 대화가 오가고 곧 유라가 유화연의 팔짱을 끼고 다른 이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비웠다.

혜란은 곁에 서 있던 재희에게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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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인사한 분은 대한 그룹 한 회장님의 부인이야. 유라는 그 막내딸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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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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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 그룹에 전혀 떨어지지 않는 곳이니까 실수를 하면 안 돼.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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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조심할게요.”

손님이 모두 도착한 뒤 본격적으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서로 근황을 주고받으며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흘러갔다.

재희는 혜란의 곁에 서서 참석한 손님들을 소개받으며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다. 이윽고 겨우 인사치레가 끝나자, 재희가 양해를 구한 뒤 화장실로 향했다.

모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치는 기분이었다.

발에 익지 않은 구두도 슬슬 아파왔다.

재희가 욱신거리는 발을 무시하며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찰나, 밖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뒤이어 들린 대화에 화장실 문고리를 당기던 재희의 손이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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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김 관장님의 그 심술 어디로 안 간다니까요. 이런 자리에 박 사모님을 부를 건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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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박 사모님도 오실 자격은 충분하지만, 오늘 김 관장님이 며느리를 소개했잖아요. 박 사모님이 배가 꽤 아프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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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니겠어요. 박 사모님 며느리로 봐둔 아이를 김 관장님이 중간에 가로챘잖아요. 속이 멀쩡할 리가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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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박 사모님 눈이 심상치 않던데, 무사히 넘어갔으면 좋겠네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던 여자 둘이 나가자 재희도 화장실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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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근이 인맥을 모조리 동원해서 마련한 선 자리였다.

원래대로라면 그 선 자리에 나오기로 했던 이는 박 사모님이라고 불리는 분의 아들이었다.

김혜란이 중간에 선 자리를 가로채지 않았다면, 아마 재희는 오늘 이 자리에 박 사모님의 곁에 있을지도 몰랐다.

단순히 박 사모님을 골려주기 위해 혜란이 선 자리를 중간에 가로챈 걸 알게 되자, 재희는 쓴웃음을 머금었다.

참, 얄궂었다.

* * *

모임의 분위기가 점점 무르익어 갔다.

재희는 혜란에게 끌려다니다시피 하다 겨우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 구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음료를 마시며 목을 축이고 있는데,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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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뭐 해요?”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유라가 재희 곁에 서서 붉은 입술을 예쁘게 올리며 싱긋 웃었다.

재희와 시선을 마주한 유라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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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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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괜찮아요.”

재희가 유라에게서 적당한 거리를 두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유라가 한 발짝 더 가까이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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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말아요. 솔직히 심심하긴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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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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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심심하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재미있는 걸 알려줄게요.”

유라가 샴페인 잔을 조금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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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봄인데도 밍크코트 입으신 분은 우수 항공 회장님 부인이세요. 그 옆에 있는 분은 검찰총장의 부인이시고요, 저기 저분은 대법관의 부인이시죠. 그리고 저분은…….”

재희는 한명 한명 소개하는 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혜란과 같이 있으면서 이미 한 번씩 인사를 한 부인들이었다.

그런데도 그 부인들을 한 명 한 명 소개하는 유라의 의도를 가늠하기 위해, 재희는 그녀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이윽고 모임에 참석한 20여 명의 부인들을 모두 소개한 유라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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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집안끼리 친한 분들이에요. 저도 저분들을 어릴 때부터 봐왔어요. 절 무척 예뻐해 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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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라가 남아 있는 샴페인을 모두 마신 뒤 진한 미소를 머금었다.

유라의 입술은 웃고 있었지만, 재희를 보는 눈동자는 오만 그 자체였다.

유라의 의도를 눈치챈 재희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유라는 여전히 호감 가는 미소를 지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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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얼굴을 익히고 인사하기 힘드실 거예요. 언제든지 저한테 말씀해주시면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 어머님의 며느리이신데 그 정도 도움은 드릴 수 있어요.”

마치 선심 쓰듯 말한 유라는 속으로 비웃었다.

중견기업 집안 출신인 너와 대기업 총수 일가인 내가 속한 세계는 달라.

유라는 재희에게 그렇게 알려주었다.

그 차이를 느끼고 무혁과 이혼해 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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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마르실 것 같으니까 샴페인이라도 좀 가져올게요.”

유라가 샴페인을 가지러 걸음을 옮기려다가 이어진 재희의 말에 발걸음을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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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샴페인도, 소개도.”

유라가 몸을 살짝 돌리며 바라보자 재희가 살짝 시선을 내렸다가 올렸다.

유라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희는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와 발음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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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어머님에게 소개를 받았고, 다시 인사드릴 일이 생긴다면 어머님을 통해서 인사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엄연히 어머님이 계시는데 무시하고 유라 씨에게 소개받을 순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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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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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남은 시간 즐기고 가시길 바라요.”

그렇게 말한 재희가 최대한 허리를 곧게 펴고 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유라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애써 돌아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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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재희의 뒷모습을 보던 유라가 기가 막힌 듯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유라는 샴페인 잔을 조금 세게 내려놓고는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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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볼 일 없는 게 지금 누구 앞에서! 두고 봐. 가만있을 줄 알아?’

걸음을 옮기는 유라의 눈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독기가 가득했다.

재희는 미술 작품 앞에 서 있는 혜란에게 다가갔다.

부인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혜란에게로 향하던 재희의 걸음이 점점 느려졌다.

부인들 사이에서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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