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회식2022.03.28.
“일전에 말씀하셨던 한약 성분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대한 백화점 대표인 한유석과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하는 차량 안. 점심 후 이어지는 화상 회의 준비로 서류를 검토하던 무혁은 윤 비서에게서 조사 결과지를 받아들었다. 윤 비서는 내용을 확인하는 무혁에게 보고했다.
“다행히 별다른 이상은 없습니다. 알음알음 입소문이 퍼진 한의원인 데다 재료 자체도 최고급으로만 다루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없어서 못 살 정도라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무혁이 짧게 대답하며 조사 결과지를 내려놓고 검토하던 서류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더 이상 볼 일 없다는 듯 곧바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윤 비서는 무섭게 일에 빠져드는 무혁에게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조용히 미리 사둔 피로 회복제를 준비했다. 그러나 서류를 보는 무혁의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런 식이었군.’
이건 일부였을 것이다. 자신이 보는 앞에서도 재희를 그렇게 대하던 집인데, 없는 곳에선 더 심했을 것이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할머니에게 모진 소리를 듣고 있었을 재희를 생각하자, 어금니를 악문 무혁의 턱에 단단하게 당겨졌다. 재희가 그 집에서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생각하니 피가 끓었다. 태블릿 PC를 쥔 무혁의 손에 힘줄이 돋았다. 결국, 무혁이 신음을 흘리며 시트에 등을 기대고는 고개를 젖혔다. 윤 비서가 황급히 피로 회복제를 내밀자 무혁은 그것을 물리쳤다. 피로한 듯 눈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무혁의 눈동자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 * * 라윤 갤러리 비서실. 오전 회의를 마치면서 한 비서가 말했다.
“오늘 신재희 씨 환영식 겸 회식 있는 거 다 아실 겁니다. 장소는 여기 앞에 새로 생긴 S 레스토랑입니다. 오늘 저녁 통째로 대관했으니 그렇게 아시고, 참석은 자유입니다. 불참하시는 분은 2시까지 미리 말해주세요. 관장님께서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으니 마음껏 즐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비서가 그렇게 말한 뒤 관장실로 사라지자마자 비서실 직원들이 다시 참새처럼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화젯거리는 당연히 회식 장소로 정해진 S 레스토랑이었다.
“대박. 들었어? S 레스토랑이래. 거기 완전히 핫플이라서 예약 자체가 쉽지 않을 텐데. 관장님께서 힘 좀 쓰셨나 봐.”
“에이. 우리 관장님이 뭐 회식 장소까지 신경 쓰실 분이야? 비서실장님이 힘 좀 쓰셨나 보지.”
“하긴. 관장님은 회식 비용에는 아낌없으시긴 하지만 장소까지 생각하실 분은 아니지.”
“아무튼 우리만 좋지 뭐.”
소곤소곤 수다를 떨던 중 직원 한 명이 재희에게 물었다.
“재희 씨는 거기 가봤어?”
“아니요. 저도 가본 적은 없어요.”
“그래? 얼른 뭐 먹을지 정해 놔. 이왕이면 여러 가지 시켜서 같이 먹자구.”
비서실 직원들은 벌써부터 뭘 먹을지 검색하며 메뉴를 정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며 재희는 다른 생각에 잠겼다.
‘S 레스토랑은 무혁 씨랑 얘기 나눴던 곳인데.’
얼마 전에 출근길에 S 레스토랑이 보이길래 재희가 별생각 없이 흘러가듯 얘기했었다. 최근 입소문이 난 탓에 항상 문전성시라서 갤러리 직원들이 가보고 싶어 한다고. 그때 무혁이 물었었다.
“가보고 싶습니까.”
“한 번쯤은요.”
그런데 회식 장소가 S 레스토랑으로 잡히니 신기하면서도, 얼마 전 무혁과 나눈 대화가 생각나면서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러졌다. 조용히 웃는 재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미경이 의자를 끌고 와 말을 걸었다.
“고마워요. 재희 씨 덕분에 그런데도 가보고. 진짜 인맥은 무시 못 하겠네.”
“…….”
말에 가시가 섞인 미경의 말에, 재희의 입가에 걸려있던 미소가 흐려졌다. 미경이 서류를 재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거 오전 중에 좀 처리해 줘요.”
“네.”
재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하며 무거운 마음을 감췄다. * * * 한편 라윤 갤러리 관장실. 혜란은 한 비서가 가져다준 홍차를 마시며 물었다.
“미셸의 에이전트 측에서 답변 온 거 있어요?”
“미셸 본인이 5월의 연회에 참석할지에 대한 여부는 아직 정확한 답변이 없었습니다.”
“짜증 나게. 다시 연락해 봐요.”
당장 5월의 연회 초대장 제작에 들어갔는데, 미셸은 본인의 참석 여부를 정확히 밝히지 않고 있었다.
‘간 보는 것도 아니고.’
혜란은 신경질적으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일러스트레이터는?”
“쉽지 않습니다. 그 책을 출간한 출판사는 이미 폐업했고, 일러스트레이터에 대한 신상 또한 찾기 힘듭니다.”
연이어 들려오는 달갑지 않은 보고에 혜란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아니. 그게 말이 돼요? 계약서나 그런 무슨 작은 단서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유령이야, 뭐야.”
“죄송합니다.”
“좀 더 찾아봐요. 그 일러스트레이터 못 찾으면 라윤 갤러리 50주년 특별 전시회도 끝이니까.”
“네.”
화가 치미는지 물을 마시던 혜란이 물었다.
“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일은 잘하고 있고?”
혜란은 한 비서 앞에서 재희를 절대로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대부분 걔, 그 애로 불렀다. 아직 며느리로 인정하지 못하는 혜란의 속을 알기에 한 비서는 굳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 비서는 최대한 긍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잘 지내고 계십니다. 일도 잘하시고 게으름 피우는 일도 없으십니다. 일전에 디자인팀에서 5월의 연회 소품 디자인을 미스낸 일이 있었는데, 작은 사모님께서 업체에 넘기기 전에 잡아내셔서 다행히 손실은 면했었습니다. 거기에 원래 일러스트 일을 하셔서인지, 감각이 아주 뛰어나십니다.”
“당연하죠. 내가 직접 거기에 앉혔는데 일 못 하면 내 얼굴에 먹칠하는 결과밖에 더 되겠어요? 못 해도 잘 해내야지.”
혜란의 심기가 아까보다 더 불편해지자 한 비서가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회식 장소로 S 레스토랑으로 잡으니 직원들이 좋아했습니다. S 레스토랑은 예약 자체가 쉽지 않으셨을 텐데 감사합니다.”
“내가 잡은 게 아니에요.”
“네?”
“내가 잡은 게 아니라고. 무혁이가 잡은 거지.”
한 비서는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어제 갑자기 혜란이 S 레스토랑을 예약해 놨으니, 직원들에게 회식 장소로 알려주라고 얘기했었다. 예약 확인차 S 레스토랑에 전화하니 정말로 혜란의 이름으로 예약이 잡혀 있었다. 회식 비용이나 복지 등에는 아낌없는 혜란이었지만, 회식 장소까지 신경 쓴 적이 없었다. 한 비서는 의아했지만, 다른 바람이 불어서 혜란이 직접 예약을 잡은 줄로만 알았다.
‘이, 이를 어쩌지.’
남들보다 더 눈치가 좋아서 까탈스럽고 예민한 혜란의 비서실장 노릇을 할 수 있었는데, 오늘따라 자꾸만 어긋난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건 없고, 앞으로 걔 잘 지켜봐요. 꼬박꼬박 나한테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걔 지금 들어오라고 해요.”
한 비서가 나가자 혜란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마호가니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일전에 무혁이 이곳에 들어와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돌아간 뒤로 연락 자체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혁이 갑자기 전화를 해왔다.
“회식한다고 들었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꺼내는 본론에 혜란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을 쳤다. 잘못했다고 싹싹 빌 줄 알고 받아줬더니, 뭐?
“왜. 또 그 애 괴롭히지 말라고 나한테 따지려고 전화했니?”
뾰족한 혜란의 대꾸에 무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S 레스토랑 대관을 예약해 두겠습니다. 회식 장소로 쓰십시오.”
혜란은 더 기가 막혔다.
“뭐? 네가 뭔데 내 갤러리 회식 장소에 참견해? 그냥 대충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잡으면 끝날 일이야.”
“S 레스토랑은 제가 3개월 전에 건축을 맡은 곳입니다. 언제든 연락 준다면 자리를 비워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이름으로 예약해 드리겠습니다.”
“…….”
“제 작은 성의입니다.”
S 레스토랑은 혜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가끔 직원들이 저기 한번 가봤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그런 S 레스토랑을 회식 장소로 정하고, 혜란의 이름으로 예약한다면? 분명 직원들은 저를 다시 볼 것이고, 갤러리 내 자신의 명망도 두터워질 것이다. 그야말로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격이라 혜란은 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아직 감정이 남아 있는데 아들이 잡아준 S 레스토랑으로 회식을 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짜증 나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들 잔뜩 기대하고 있을 텐데 이제 와 회식 장소를 바꿀 수도 없고.’
득과 실을 계산하던 혜란은 자존심이 상하는지 미간을 좁히며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때, 관장실 노크 소리에 혜란이 자세를 바로잡았다. 얼마간의 여유 끝에 문이 달칵 열리며 재희가 모습을 드러내자 혜란이 냉랭한 얼굴을 했다.
“거기 앉아.”
재희가 인사하기도 전에 혜란이 말했다. 재희가 머뭇, 소파 끝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혜란이 턱을 괴고 재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응시했다. 역시 뭐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움츠린 자세도 그렇고, 얌전한 얼굴을 하고 내 아들을 뒤에서 조종하는 것도 그렇고.
‘역시 하루빨리 이혼시켜야 내 마음이 편하겠어.’
그렇게 마음을 굳힌 혜란이 입을 열었다.
“13일에 이 갤러리에서 모임이 있을 거야.”
“모임 말씀이세요?”
“그래. 5월의 연회가 시작되기 전에 하는 사적인 친목 모임이라고 해두지.”
혜란이 재희의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물론 갤러리 행사와 관련 없는 개인적인 모임이야. 그러니 너도 참석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재희를 못마땅한 눈으로 보던 혜란이 속으로 혀를 찼다.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원래는 무혁이나 우진이를 데리고 참석했었는데 두 녀석 다 지금 바쁘거든. 그러니 남는 게 너밖에 더 있어?”
“하지만.”
어머니는 저를 싫어하시잖아요. 재희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삼켰다. 무엇보다 유라가 왔을 때 혜란의 본심을 두 귀로 똑똑히 들었으니 더더욱 그 자리는 내키지 않았다.
“왜, 내키지 않니?”
“제가 참석하면 어머니한테 누가 될 것 같아서요.”
재희는 돌려 거절했지만, 되려 혜란이 코웃음을 쳤다.
“다들 자식이나 며느리 데리고 참석하는데 명색이 주최자인 내가 혼자면 난 뭐가 되니? 네가 마음에 안 들어도 없는 것보단 낫잖니.”
“…….”
“처음으로 사모님들에게 너를 소개하고 얼굴을 보여주는 자리야. 그러니 후줄근하게 입지 말고 제대로 입고 와.”
거절은 듣지 않겠다는 확고한 혜란의 어조에 재희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그렇게 할게요.”
재희는 이번 주엔 조금 바쁘겠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돌아갔다. * * * 평창동에 위치한 대한 그룹 한진근 회장의 저택. 저택에서 일하는 고용인이 말했다.
“사모님. 유라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한진근 회장의 부인인 유화연은 갑작스러운 유라의 방문에 반색을 띠었다.
“엄마. 저 왔어요.”
“유라야. 네가 웬일이니. 네가 먼저 집엘 다 오고.”
유화연이 유라를 껴안으며 반가워했다. 집이 갑갑하다며 귀국하자마자 아파트를 사서 나가 살았던 유라였다. 품 안의 자식이 나간다고 하니 내심 걱정되고 서운했던 터라, 유화연은 먼저 유라가 찾아온 것이 마냥 기뻤다.
“아주머니. 여기 유라가 좋아하는 과일이랑 음료 좀 내와요.”
소파에 앉아 금세 차려진 다과를 맛보던 유라가 말했다.
“엄마. 이번에도 라윤 갤러리 모임에 참석한다면서요.”
“그렇지. 매년 참석했으니 올해에도 가야지.”
“이번엔 저도 데리고 가줘요.”
“웬일이야? 그런 데는 지루해서 싫다며.”
유라는 지루하다는 이유로 모임에 불참한 지 오래였다. 그동안 유화연은 며느리를 데리고 갔었고, 이번에도 그럴 생각이었다. 그런데 유라가 먼저 참석한다고 하니 의외였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도 비추고 그래야지.”
“우리 유라 철들었네. 우리 유라랑 같이 가면 엄마야 좋지.”
유라는 곧 라윤 갤러리 모임에서 만날 재희를 떠올리며 과일을 한 입 먹었다. 간만에 즐거운 일이 생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