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신혼여행2022.01.17.
이미 씻은 듯 그의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고, 진지한 통화 중이었는지 평소보다 미간이 더 좁혀 있었다. 희미한 플로어 조명에 비친 그의 표정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진지했다.
‘못 보던 표정.’
거의 대부분 덤덤한 얼굴을 봐왔던 터라 지금 그의 얼굴이 낯설었다. 미처 자신이 알지 못하는 무혁의 또 다른 단면을 목도한 기분이다. 묘한 기분에 관찰하듯 그를 빤히 보던 재희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엿듣고 있는 모양새가 되자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통화 내용이 궁금했지만 그를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아 재희가 다시 문을 닫으려 할 때였다.
“재희 씨.”
“……!”
어떻게 눈치챘는지 무혁이 휴대 전화를 든 채로 성큼 다가왔다. 얼른 침대로 가서 자는 척을 하면 될 텐데 재희는 제게 다가오는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겨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문이 활짝 열리며 문틀에 손을 짚은 무혁이 상체를 살짝 숙였다.
“안 자고 여기서 뭐 하고 있습니까.”
“아, 그게.”
재희가 놀란 얼굴로 올려다보았다가 얼굴을 붉혔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 그리고 그 아래로 보기 좋게 갈라진 복근과 치골이 눈에 들어왔다. 특히 복근에 툭 불거진 핏줄이 시선에 콱 박혔다. 한국에서처럼 그 몸을 봐버리고 만 재희의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졌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수없이 닿고 안겼고 온기를 나누었다. 그래서인지 몇 시간 전의 일이 떠올라 절로 열이 올랐다.
“…….”
재희의 반응을 보던 무혁이 미간을 좁혔다.
말없이 방에 들어선 무혁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던 셔츠를 주워 입었다. 무혁이 완전히 옷을 입자 재희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할 텐데 안 자고 뭐 하고 있습니까.”
피곤함의 원인인 무혁이 다시 한번 물었다.
“목이 말라서…….”
옆이 허전해서 잠에서 깼다는 소리를 하기가 왠지 부끄러워 아무렇게나 변명했다. 잠시 재희를 보던 무혁이 부엌으로 향했다. 무혁의 걸음을 따라 재희의 시선도 옮겨졌다.
‘통화 엿들은 걸 알고 기분이 상했나 봐.’
재희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서 있을 때 무혁이 물을 따른 컵을 내밀었다. 무혁과 컵을 번갈아 보던 재희가 어색하게 컵을 받아들었다.
“고, 고마워요.”
“별말씀을.”
무혁이 팔짱을 끼고 문에 비스듬하게 기대선 채 재희를 응시했다. 컵을 입술에 가져가던 재희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서렸다. 무혁이 대놓고 쳐다보니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저, 무혁 씨.”
“…….”
잠시 고개 돌리면 안 되냐고 말하려 했지만,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시선에 재희는 말을 꿀꺽 삼켰다. 결국 재희는 무혁이 지켜보는 가운데 물을 억지로 삼켰다. 물만 마셨는데도 왠지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저기.”
다 마신 컵을 내밀자 무혁이 받아들고 몸을 돌리자 재희가 다급하게 불렀다. 무혁이 힐끗, 고개만 돌려 쳐다보자 재희가 우물쭈물했다.
“저, 화났어요?”
“화?”
“통화를 엿들어서…….”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순수하게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무혁을 보며 재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아까 그 통화, 뭔지 물어봐도 돼요?”
“아아.”
냉장고로 향한 무혁이 남은 생수를 재희가 마셨던 컵에 따르더니 그대로 마셨다. 단순히 물만 마시는 것뿐인데도 남자의 목울대가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별거 아닌 모습에도 심장이 제멋대로 뛰어서 재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별거 아닌 게 아닐지도.’
입술에 묻은 물을 손등으로 닦는 무혁을 보던 재희의 눈이 그의 입술에 가만히 머물렀다. 남자의 입술이 닿았을 때 얼마나 뜨겁고 부드러운지, 그 온기와 감촉이 절로 떠올랐다.
‘나 좀 봐.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무혁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지레 찔린 재희는 허둥지둥 소파에 앉았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재희는 두 손으로 뺨을 꾹 누르며 진정시켰다. 재희의 마음도 모르고 무혁이 거의 밀착하다시피 옆에 자리 잡고 앉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별거 아닙니다. 현장 진행 상황을 좀 듣고 있었습니다.”
“현장이요?”
“네.”
무슨 현장? 한국에서의 일 말인가요? 그게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할 정도로 급한 일인지,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재희는 묻지 못했다. 벌써부터 참견하냐며 무혁이 싫어할 것 같았다. 대화가 끊겼다. 재희는 어디까지 묻는 게 적정선인지 가늠하고 있었고, 무혁은 소파 등받이에 팔을 기댄 채 비스듬하게 앉아 재희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내 손을 거치지 않으면 만족하지 못합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혁이 입을 열었다.
“신경 쓰지 않으려 해도 몸에 밴 습관인지라 그렇게 됐습니다.”
“그럼…….”
“한국 시각으로 오늘이 현장 점검의 날이라 민석에게 물었을 뿐입니다. 다음 진행 상황도 듣고.”
잠든 재희가 깨지 않게 거실로 나온 무혁이 전화를 걸었을 때 민석이 신혼여행까지 가서 일을 해야겠냐며 화를 냈지만 무혁은 무시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바쁠지도 모릅니다.”
“지금보다 더요?”
“조금.”
재희를 얻기 위해 내걸었던 아버지와의 약속. 그 약속을 지키려면 지금부터 미리 하나씩 정리해 둬야 했다. 얼마나 바빠질지 굳이 무혁은 재희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무엇보다 무혁은 일의 진행 상황을 확인하고 직접 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무혁이 건설 현장을 자주 찾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통화를 마무리하려던 무혁은 문틈으로 엉거주춤 서 있는 재희를 발견했다. 민석이 ‘일 중독자야. 너 그 기질 때문에 언젠가 반드시 호되게 피 볼 거다.’라고 욕하는 걸 무시하고 전화를 끊으며 무혁은 서둘러 재희에게 걸음을 옮겼다. 자리를 비운 그 잠깐 사이 재희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심장이 잠시지만 철렁 내려앉았다. 다행히 아무 일이 아니어서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혁이 손을 뻗어 재희의 머리카락을 끝을 잡고 장난스럽게, 그러나 집요하게 매만졌다. 재희가 얼굴을 붉히며 얌전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내주었다.
“말해 줘서 고마워요. 무혁 씨.”
재희가 맑게 웃었다. 몇 번 보지 못했던 그 웃음에 불시에 당한 무혁의 다른 의미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무혁은 저도 모르게 커다란 손으로 재희의 볼을 감쌌다. 그러자 무혁의 심장을 내동댕이쳤던 그 웃음이 재희의 얼굴에서 단숨에 사라졌다. 무혁은 저도 모르게 재희의 볼을 감싼 제 손을 원망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엄지로 몇 번 재희의 하얀 볼을 매만지던 무혁이 이내 아쉬운 손을 거둬들였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내일 일정이 있으니 이만 들어갑시다.”
“꺄!”
재희는 대답 대신 얕은 비명을 질렀다. 무혁이 그대로 재희를 공주님 안기 자세로 들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잠시 버둥거리던 재희는 제 몸을 놓지 않겠다는 듯 꼭 끌어안은 무혁의 힘에 곧 반항을 멈추었다. 대신 그의 가슴에 어색하게 고개를 기댔다.
‘착각일까.’
덤덤한 그의 표정과는 다르게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 같았다. * * * 신혼여행은 자유여행이었다. 현지 전용 운전기사와 차는 물론 모든 필요한 것은 윤 비서가 준비해 둔 덕에 따로 신경 쓸 일은 없었다. 재희는 신혼여행 일정을 짤 때부터 티는 안 냈지만 잔뜩 기대한 상태였다. 항상 집에서 짜준 대로 살아온 재희에게 처음으로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대로 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기회였다. 중간중간 무혁에게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냐고 물었지만 무혁은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여행 코스 짤 때 무혁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결국 마음 가는 대로 여행 코스는 열심히 짜다 보니 박물관, 미술관 등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거 봐요, 무혁 씨.”
오르세 미술관. 재희는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감탄을 터뜨렸다. 1900년도에 파리 만국 박람회 때 쓰였던 기차역을 개조하여 오늘날의 오르세 미술관이 되었다. 기차역을 떠올리게 하는 아치형의 천장과 커다란 시계가 퍽 인상적이다. 인상파가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오르세 미술관은 재희가 꼭 와보고 싶었던 곳이었다.
“조심.”
재희가 사람들에게 치일 뻔하자 무혁이 가볍게 끌어당겼다.
“고마워요.”
드물게 들뜬 얼굴을 한 재희는 보며 무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워낙 찰나여서 재희는 눈치채지 못했다. 무혁은 재희의 걸음에 맞추며 천천히 걸었다. 프랑스는 질리도록 온 나라 중 하나였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김혜란은 유럽을 사랑해서 자주 무혁을 데리고 왔었다. 오르세 미술관 역시 어머니 김혜란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무혁은 눈 감고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고 재희가 여행 코스 짤 때도 옆에서 슬쩍 거들어서 효과적인 동선을 짜는 데 도와주었다. 그러니 질리도록 온 오르세 미술관에서 무혁이 즐기는 건 딱 하나였다. 바로.
“이걸 꼭 실제로 제 눈으로 보고 싶었어요.”
밀레의 이삭줍기 작품에 흠뻑 빠진 재희가 감탄을 내뱉었다. 무혁은 옆에 서서 힐끗,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마치 작품 하나하나 뜯어보기라도 할 것처럼 재희는 작품 앞에서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수많은 사람이 도슨트의 설명을 듣고 금세 다음 작품으로 이동했지만 재희는 마치 미술관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좀처럼 움직일 줄 몰랐다. 무혁은 슬쩍 옆으로 몸을 물렸다. 그러곤 깊은 시선으로 재희를 바라보았다. 작은 움직임 하나 놓치지 않고 작품을 감상하며 감탄하는 재희의 순수하게 즐거워하는 웃음을 뇌리에 박아넣을 것처럼. 오르세 미술관을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이튿날,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 재희는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한참이나 올려다보았다. 비밀 친구에게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늘 사진으로만 보고 상상했으며 동경해 마지않던 장소에 서 있자 감회가 새로웠다.
“무혁 씨는 이곳에 온 적이 있어요?”
재희만을 바라보던 무혁이 그제야 시선을 옮겨 시큰둥한 눈으로 계단을 올려다보았다.
“네. 자주 왔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프랑스에 질리도록 자주 왔었기에 눈을 감고도 지리를 훤히 알 정도였다. 몽마르트르든 어디든 무혁에겐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는 익숙한 나라.
“그렇구나. 전 프랑스는 처음이에요.”
재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몽마르트르로 향하는 계단에 한 발짝 내디뎠다. 곧이어 다른 발도 한 발짝. 마침내 두 다리가 몽마르트르로 향하는 첫 계단에 올라섰다. 재희의 얼굴이 환희로 물들였다. 이 사소한 한 발자국이 뭐라고 이렇게 가슴이 벅차고 기쁠까. 가장 오고 싶었던 이곳에 드디어 한 발짝 내디뎠다는 벅찬 기분이 서서히 번져 간다. 재희는 콩콩, 계단을 두어 개 더 올라갔다. 몇 계단 올라가던 재희가 그대로 돌아서 무혁을 내려다보았다. 무혁은 계단 아래에 서서 재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줄곧 오고 싶었어요.”
한 번도 온 적은 없었지만 몽마르트르 언덕은 재희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다른 여러 나라도 가보고 싶었지만, 특히 여기 몽마르트르에 꼭 와보고 싶었어요.”
“유명한 관광지여서 말입니까.”
무혁이 성큼 다가왔다. 이해되었다. 몽마르트르는 프랑스에 여행 온다면 꼭 들러야 하는 유명 관광지 중 한 곳이었으니. 특히 일러스트를 업으로 삼은 재희라면 꼭 와보고 싶은 곳 중 한 곳이었을 것이다. 여행 계획을 짤 당시 재희는 몽마르트르를 동선에 넣을 때 특히 더 기대한 얼굴이었다. 재희가 웃으며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뇨.”
재희가 뒷걸음질을 치며 계단 두어 개 더 올라갔다. 그러다 계단 턱에 걸려 재희가 비틀거리자 무혁이 빠르게 손을 뻗었다.
“위험…….”
무혁이 재희의 손목을 잡는 순간, 재희가 웃음을 머금었다. 마치 무혁이 잡아줄 걸 미리 알았던 것처럼 놀란 기색이 없었다.
“제 비밀 친구가 저한테 꼭 여기에 갔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무혁의 커다란 몸이 그대로 우뚝 멈췄다. 똑바로 계단을 딛고 선 재희가 웃으며 다른 손으로 무혁의 손등을 포갰다.
“이건 비밀인데요. 제가 중학생 때 몇 년 동안 알고 지내던 비밀 친구가 있었어요.”
무혁은 저도 모르게 잠시 숨을 죽였다.
“…….”
“얼굴도, 나이도 모르지만 제가 힘들 때 가장 많은 위로가 되었던 친구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