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항상 벗고 있을 테니 익숙해지십시오.2022.01.13.
신혼여행지는 프랑스였다. 무혁이 신혼여행지로 어딜 가고 싶냐고 물었을 때 재희는 조심스럽게 프랑스를 입에 올렸다. 그날 바로 프랑스로 정해졌다. 긴 비행 끝에 입국 심사를 마치고 공항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늦은 밤이었다. 공항 밖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구나.’
낯선 땅, 낯선 풍경이어서 그런 걸까. 한국과 다른 공기와 비 냄새도 신기했지만, 할머니가 없는 땅에 도착했다는 작은 해방감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멍하니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무혁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재희 씨. 가시죠.”
“아, 네.”
재희는 그 손을 차마 잡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의 거절에 무혁은 묵묵히 손을 거둬들였다. 호텔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도 재희는 무혁과 조금 떨어져서 앉았다. 무혁은 눈길만 잠깐씩 줄 뿐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순 없는데.’
비행기 안에서도 무혁이 권하는 와인 잔을 받아들다가 손가락 끝이 스친 적이 있었다. 화들짝 놀란 재희가 와인 잔을 그대로 놓쳤고 옷이 와인으로 얼룩졌다. 창피한 와중에도 무혁이 닦아 주려는 것도 뿌리치고 스튜어디스의 안내를 받으며 그 자리를 도망치듯 벗어났다. 그 후로 계속 이 상태. 이미 깊은 관계까지 간 사이에 무혁의 샤워 가운 입은 모습을 한번 봤다고 요동치는 감정에 재희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다. 이런 제 감정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무혁에게 거리를 두고 말았다. 이래선 안 된다고 수없이 다독였지만, 감정은 재희를 착실하게 배신했다. 자신에게 떨어지지 않는 무혁의 시선에 숨이 막히는 버거운 상태로 호텔에 도착했다.
“와.”
객실에 들어서자마자 재희가 감탄을 터뜨렸다. 엔틱한 가구로 고풍스럽게 꾸며진 객실이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았다. 장거리 비행의 피로도 잊고 정갈하게 정리된 내부를 훑어보는 재희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호텔에 도착할 때쯤엔 비가 그친 터라 재희는 객실에 딸린 테라스로 나갔다. 밤이라 추웠지만 정원의 풍경도, 저 멀리 보이는 에펠탑도 멋져서 재희는 정신없이 야경 구경에 여념이 없었다.
‘드디어 프랑스로 왔어.’
이국적인 풍경에 재희는 정말로 프랑스에 왔다는 걸 다시 한번 실감했다. 더불어 이제야 비밀 친구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재희는 무혁을 피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은 채로 밝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무혁 씨. 여기 좀 보…….”
세요. 라는 말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뻗어 나온 커다란 손이 재희를 가두듯 양옆으로 테라스 난간을 짚었다. 커다란 남자의 몸이 재희의 몸을 완전히 가렸다. 남자가 몸을 숙였다. 무혁의 숨결이 귓가와 목덜미에 훅 와닿자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렸다. 재희의 몸이 긴장으로 빳빳하게 굳었다.
“무, 무혁 씨.”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거대한 존재감에 재희가 목소리가 제멋대로 떨렸다. 온 신경이 등 뒤의 남자에게 쏠려 더 이상 멋진 프랑스의 야경도 시선에 들어오지 않았다. 숨 쉬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현기증으로 머리가 팽팽 돌았다. 움칠, 재희가 어깨를 움츠리자 무혁의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유가 뭡니까.”
“……무슨.”
“한국에서부터 날 피한 이유.”
“…….”
“아무리 생각해 봐도 실수한 건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말해보십시오.”
무혁은 기다렸다.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까지. 호텔에서도, 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도, 비행기 안에서도, 도착한 공항에서 호텔로 오기까지.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재희가 곤란할까 봐 장장 하루 이상을 참고 기다렸다. 몇 년을 기다렸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재희가 자신에게 멀어지려는 걸 두 눈으로 지켜보는 건 고통스러웠다.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무혁의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그게 아니라.”
재희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어떻게 이 남자에게 말하겠는가. 남편의 맨몸을 보고 부끄러워졌고 그 몸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 당황스러운 이 감정을. 거기다 곁에 있기만 해도 누가 꽉 쥐어짜는 것처럼 심장이 아프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도 그렇다는걸. 재희가 난간을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에 따라 남자가 가두듯 상체를 더욱 깊숙이 숙였다. 덕분에 아까보다 더 밀착한 자세가 되었다.
‘숨 막혀.’
재희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편안히 숨을 쉬기엔 뒤의 남자가 지나치게 신경 쓰였고 뜨거웠다. 눅눅한 비 냄새와 풀냄새도, 촉촉한 테라스의 감촉도, 추운 밤공기마저도 느껴지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을 겁니까.”
이미 참을성이 바닥난 남자가 초조하게 으르렁거렸다. 긴장으로 재희의 어깨가 움츠려지며 등이 움찔거렸다.
“앗!”
순간 재희의 시야가 뒤집혔다. 정신 차리고 보니 재희는 테라스 난간에 앉은 채였다. 무혁이 재희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제게 끌어당겼다. 덕분에 재희는 무혁의 품에 안긴 모습이 되었다.
‘어떡해. 숨 막혀.’
남자의 품 안이 좋으면서도 두근두근, 선명하게 느껴지는 남자의 심장 고동 소리에 재희의 심장이 더 격하게 뛰었다. 차라리 남자의 얼굴을 보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재희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곧 잘못된 판단이란 걸 깨닫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깊은 남자의 눈동자와 마주치자 어지러울 정도로 아까보다 더 격하게 심장이 뛰었다.
“무, 무혁 씨. 너무 가까워요.”
밀어내기 위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던 재희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치우려 하자, 무혁이 다른 손으로 덥석 잡았다. 재희가 손을 빼내려 버둥거렸지만, 무혁은 손을 놓기는커녕 오히려 꽉 쥐었다. 무혁이 한자씩 힘주어 말했다
“피하지 마십시오.”
“무혁 씨.”
“아직 대답, 못 들었습니다.”
“…….”
“기다렸습니다. 피하는 이유 말해 주기를. 하지만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습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무혁이 가끔 감정을 비칠 때가 있었다. 결혼하기 전에 한 번, 첫날밤에 한 번, 그리고 지금 한 번. 무혁은 한번 감정을 내비칠 때마다 재희가 감당하기 어려운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초조함. 격통. 안타까움. 한계에 다다른 남자의 인내. 그리고 상처. 무혁이 감정을 내비치는 원인은 모두 재희, 자신 때문이었다.
“전 그저…….”
재희가 어렵게 입술을 달싹였다. 파르르, 무혁에게 잡힌 손이 가늘게 떨렸다. 남자의 직선적인 감정에 더 이상 제 감정을 숨길 용기가 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망설인 끝에 재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끄…… 러워서요.”
“…….”
“호텔에서 무혁 씨가 씻고 나왔을 때 그때 본 몸이 너무 부끄럽고 신경이 쓰여서…….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게 내 마음처럼 안 돼서. 그래서, 그냥…….”
마주 볼 자신이 없어서 피했던 거라고서. 아프도록 심장이 뛰어대서, 숨이 막혀서, 이런 격렬한 감정이 낯설고 무서워서. 이 말 한번 꺼내기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결국 재희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솔직하게 제 감정을 내비치면 할머니에게 재수 없다는 소리를 들었었다. 신채근도 홍연화도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주지 않았고 재혁과는 사이가 어색했다. 무언가 말을 꺼내면 박정수는 지루해하고 귀찮아했었다. 그러나 무혁이라면 어리석은 이 감정조차도 진지하게 들어줄 것임을 알고 있다.
‘알아. 아는데.’
그런데도 재희는 아직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힘겨웠다. 고개를 푹 숙인 재희를 물끄러미 보던 무혁이 재희를 테라스 난간에서 내려주었다. 떨리는 두 다리로 간신히 선 재희가 고개를 든 순간
“무혁 씨!”
재희가 입을 가리며 낮게 비명 지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혁이 갑자기 셔츠를 찢듯이 그 자리에서 벗어버린 것이다. 빈틈없이 섬세하게 짜인 근육으로 이루어진 남자의 탄탄한 상체가 테라스 조명 아래 음영으로 얼룩졌다.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야해 보여서 충격으로 다리에 힘이 풀린 재희가 비틀거렸다. 무혁이 주저앉으려는 재희의 허리를 붙잡고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조명 때문에 평소보다 더 거대해 보이는 남자는 재희의 손을 잡아 제 가슴에 올려두었다.
“……!”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단단한 감촉에 재희의 눈이 경악으로 커다랗게 떠졌다.
“익숙해지십시오.”
남자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재희 씨 앞에선 이렇게 항상 벗고 있을 테니 내 몸에 익숙해지십시오.”
오히려 직설적으로 재희에게 파고들었다.
“그러니까 고작 그런 이유로 날 피하지 마십시오.”
덤덤하지만 강직한 목소리로 남자는 말했다. 그 목소리가 오히려 애원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익숙해질 리가 없잖아요.”
절대로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지금도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감당 안 될 정도로 심장이 뛰었으며, 둘 곳을 잃은 시선은 갈팡질팡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남자의 강한 심장 고동에 재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도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
재희는 속마음을 입 밖으로 내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친구인 희수에게마저도 잘 티를 내지 않아서 희수가 서운하다고 투덜거린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혁에겐 어렵긴 해도 아주 조금씩 제 속마음을 말할 수 있었다. 아마, 무혁이 자신의 말이 세상의 전부인 양 정성스럽게 들어주기 때문인 것 같았다.
“미안해요. 제가…….”
“사과를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
무혁은 재희의 머리를 소중하게 감싸고 제 품에 더욱 깊숙하게 가두었다. 두근두근. 남자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렸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등을 천천히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남자의 상체가 조금 숙여지며,
“……!”
재희의 귓가에 남자의 입술이 닿았다.
“날 피하지 않겠다. 그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귓가에만 피가 몰린 것처럼 화끈거렸다. 말문이 막힌 채 입술만 몇 번이나 달싹거리던 재희가 겨우 대답했다.
“……안 피할게요.”
억지로 겨우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는 작디작았다. 무혁이 원하는 대답을 했지만, 그는 재희를 풀어 주지 않았다. 오히려 팔에 힘이 들어가며 숨이 턱 막힐 정도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무혁…….”
무혁이 못 들었을까, 걱정이 들던 찰나 재희의 시선이 높아졌다. 재희의 엉덩이를 받치고 자신의 키보다 높게 들어 올린 무혁이 그대로 테라스 문을 닫으며 걸음을 옮겼다.
“무혁 씨.”
무혁은 고개를 젖힌 채 놀란 얼굴을 한 재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재희 역시 깊게 파고드는 무혁의 시선을 피할 수 없어 홀린 듯 그와 마주 보았다. 재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넘겼다. 매끈하고 넓은 이마와 짙은 눈썹, 그리고 강직한 눈매와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재희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처음엔 무섭기만 했던 얼굴. 사실은 거칠지만 남자답고 잘생긴 얼굴이란 걸 누가 알까. 심해와 같은 이 눈동자에, 꿰뚫는 듯한 시선에 한 번 사로잡히면 헤어나올 수 없다는 걸 누가 알까. 무뚝뚝하지만 사실은 열정적이고 그 누구보다 뜨거운 남자란 걸 누가 알까. 재희는 저만 알고 싶었다. 무서운 인상 뒤에 숨겨진 이 남자의 진짜 얼굴을. 성격을. 이면을.
‘큰 욕심인 건 알아.’
감히 제가 부릴 욕심이 아니란 것도. 그래도 속으로만 이렇게 욕심부리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달칵, 불이 꺼졌다. 신경 세포를 당기는 미묘한 긴장감 속에 여자의 등이 푹신한 침대가 닿았다. 겨울인지라 서늘한 이불의 감촉이 느껴졌지만 재희도, 무혁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롯이 서로의 눈에 서로를 담기 바빴다.
“사랑해.”
무혁은 재희가 대답할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줄곧 머금고 심었던 작고 통통한 입술을 듬뿍 베어 물었다. 중독. 그야말로 중독이었다. 보드라운 입술의 감촉도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결이 오가는 것도, 긴장한 듯 살짝 굳어 있는 가녀린 몸도, 그리고 흐트러진 모습으로 올려다보는 재희의 모습도. 그 어느 것 하나 중독적이지 않은 게 없었다. 철저하게 세워진 계획 아래 성과를 하나씩 쌓고 쌓아나가며 살아온 무혁에게 충동은 인연이 없던 단어였다. 달콤한 충동. 무혁에게 충동이 얼마나 달콤한지 처음으로 알게 해 준 처음이자 마지막이자 유일한 여자. 뜨거운 숨결과 긴장한 숨결이 오가고, 입술과 입술이 맞붙어 서로를 탐닉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뜨거운 입맞춤에 재희가 미간을 좁히며 무혁의 팔을 통통 두드렸다.
“…….”
무혁의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마자 재희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묵은 숨을 터뜨렸다. 무혁이 조심스럽게 손으로 재희의 보드라운 뺨을 쓰다듬었다. 그에 반응하듯 재희가 그 손바닥에 볼을 살짝 비볐다. 재희의 사소한 동작 하나에 혈류가 급격하게 온몸을 따갑게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단숨에 열감이 차오르며 무혁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재희는 무혁의 두꺼운 팔을 짚으며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 거대한 남자의 등 뒤로 주황색 조명 빛이 뿌옇게 내려앉았다. 문득 노을 서점이 떠올랐다. 처음엔 발을 들이기 어렵지만 한번 발을 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굳건하게 제 자리를 지키며 품어주는 노을 서점. 엉뚱하게도 재희는 마치 무혁이 노을 서점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가까이하기 어렵지만, 진짜 모습을 알고 나면 저도 모르게 빠져들고 마는 그런 남자.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마주쳤다. 깨지기 쉬운 얇디얇은 유리를 다루듯 남자의 거친 손이 섬세하게 여자의 몸의 곡선을 따라 훑었다. 남자의 커다란 몸이 여자를 한 번에 삼켰다. 남자의 욕망을 온몸으로 느끼며 여자는 눈을 감았다. 마치 얼마든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듯이. 프랑스에서의 첫째 날. 새벽까지 침실의 속삭임과 열기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 * * 새벽에 겨우 무혁에게서 도망치듯 벗어났다가 다시 품어오는 그를 받아들이다 기절하듯 잠들었다. 뻐근한 몸을 뒤척이며 불편한 잠을 청하던 재희는 옆이 허전한 느낌에 눈을 떴다.
“무혁 씨?”
조심스럽게 침대를 더듬자 이미 일어난 지 한참인 듯 옆자리는 식어 있었다. 재희는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어디 갔지.’
재희는 가운을 챙겨입고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렇게. 설계…… 업자…….”
사위가 고요해서인지 조금 연 방문 틈으로 한껏 목소리를 낮춘 남자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들렸다. 문을 조금 더 열자 테라스 쪽으로 몸을 돌린 채 서 있는 남자의 커다란 등이 보였다. 주황색 조명 빛이 상체 탈의한 남자의 등 근육의 굴곡을 따라 음영 졌다. 조명이 만들어낸 음영 때문인지 남자의 등이 평소보다 더 압도적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잘 만든 조각 같아서 재희는 아주 잠시 시선을 빼앗겼다.
“불가. 어떻게든 수정시켜.”
나지막하지만 단호한 무혁의 목소리에 재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지?’
힐끗 벽시계를 보니 새벽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이 새벽에 누구랑 저렇게 진지하게 통화하는 걸까.’
“상관없어. 일정대로 가.”
짧게 끊어 말하며 무혁이 옆으로 몸을 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