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무혁의 후회2022.01.03.
“……!”
숨이 막힐 정도로 뜨겁고 진한 키스에 재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여자의 가늘게 떨리는 숨을 남자의 거친 숨이 삼켰다. 여자의 신경이 그 어느 곳에도 쏠리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 남자의 단단한 팔은 여자의 몸을 감쌌고 품에 가두었다.
“무혁……!”
잠시 입술이 떨어져 나간 틈에 재희가 숨을 틔우며 뭐라 말하려던 찰나, 다시 그의 입술에 말이 먹혔다. 돌발사태에 하객석이 웅성거렸다. 한참 뒤에 예정되어 있던 키스 타임의 순서를 무시하고, 그것도 모자라 무혁이 재희에게 뜨거운 키스를 퍼붓자 당황하던 사회자가 능숙하게 표정을 갈무리하며 활기차게 말했다.
“아, 신랑분. 급하셨나 보네요. 모두 뜨거운 시작을 알리는 신랑 신부에게 박수를 보내 주시길 바랍니다.”
하객들의 박수 소리도, 연주자의 감미로운 피아노 소리도, 화려한 조명도 그 무엇도 두 사람에겐 닿지 않았다.
“……하.”
재희의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긴 입맞춤 끝에 무혁이 진득한 시선으로 재희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재희의 몸이 휘청거렸지만, 무혁이 단단하게 허리를 안고 있는 덕분에 다행히 무너지지 않았다. 재희의 머릿속에 더 이상 박정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상견례를 했던 그날 밤. 한옥 거리에서 했던 키스와 다른 뜨거운 키스. 강렬한 입맞춤과 제 몸을 가두듯 안고 있는 남자, 강무혁만이 재희를 가득 채웠다.
* * * 예식이 끝난 후 VVIP에게만 제공된다는 S 호텔 로얄 스위트 룸. 갓 부부가 된 무혁과 재희가 하루 묵을 룸이기도 했다. 예식이 길고 긴 탓에 하루는 객실에서 묵고 내일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으로 일정을 잡았다.
“그럼 내일 아침에 모시러 오겠습니다.”
“부탁하지.”
윤 비서가 깍듯하게 인사한 뒤 돌아가자 무혁이 문을 닫았다. 거실로 걸음을 옮기자 창가에 서서 바깥을 내다보고 있는 재희가 보였다. 무혁은 잠시 멈춰 서서 재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혁이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한 듯 재희는 멍한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입술을 깨물더니 눈을 감았다. 그 모습을 본 무혁은 조용히 주먹을 말아쥐었다. 분명 식장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재희는 맑게 웃어 주었다. 그런 재희가 웨딩케이크 커팅식 때 갑자기 동요했었다. 이유를 물었지만 재희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혹시 이 결혼을 후회하는 걸까.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무혁은 그 생각을 지워 버렸다.
‘이제 와 무를 수 없는 일.’
무혁은 다시는 재희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후회는 그때 한 번이면 족했다. 단 한 번도 재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어리석었던 그때 그 겨울.
“왜 그 아이 앞에 나서지 않는 게냐.”
언젠가 무혁의 종조부인 서점 할아버지가 물었다.
“지금 이대로가 좋습니다.”
무혁은 그렇게 대답했다.
“정말이냐?”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되물었다. 무혁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는 돋보기안경을 추어올리곤 닳고 닳은 책장을 넘기며 노랫가락 읊듯 말을 이었다.
“진중하고 말이 없는 게 네 장점이긴 하다만,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거라.”
“종조부께서는 사랑 때문에 족보에서 제명되었는데 후회한 적은 없으십니까.”
KJ 그룹의 창업주이자 명예회장인 강운 명예회장이 별세하기 전 하나뿐인 친동생을 애타게 찾았었다. 강직하고 저돌적인 강운 명예회장과는 달리 동생인 서점 할아버지는 부드러운 성정이었고 집안에서 반대한 여자와 결혼을 강행한 대가로 KJ 그룹에서 제명되었다. 무혁은 강운 명예회장의 부탁을 받고 종조부인 서점 할아버지를 찾아내었고 그 인연으로 여태껏 서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글쎄다. 내가 후회한 적이 있다면…….”
노을 서점은 아내의 것이었다. 이 서점에서 아내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결국 집안 대신 아내를 선택했다. 비록 아이는 없었지만 단 한 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한 적이 없었다. 서점 할아버지는 서점 한 편에 놓인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 년 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의 사진이었다.
“내 아내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더 많이 못 해 줬다는 것. 그거 하나뿐이구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반응하지 않는 무혁을 보며 서점 할아버지가 인자하게 웃었다.
“나는 네가 후회하지 않았으면 한다.”
무혁은 한 번도 후회할 일은 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계획대로 움직였고 철두철미하게 계산된 상황 안에서 움직였다. 그런 그가 딱 한 번. 딱 한 번 후회했었다. 입시 미술 준비하느라 잘 만나지 못했던 재희를 다시 본 건 서점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만난 것이다. 서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KJ 그룹에서 비밀리에 장례를 진행했고, 무혁이 상주를 자처하며 자리를 지켰다. 삼일장을 치르는 내내 무혁은 상주 자리를 떠나지 않았었는데, 딱 한 번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다. 비보를 듣고 희수와 함께 조문을 온 재희를 피한 것이다.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 재희의 얼굴도 모르는 비밀 친구로 계속 남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재희가 자신을 보며 실망을 할까 걱정이 돼서였을까.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무혁은 재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얼마 후 유학을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재희와 다시 만나지 못했다. 무혁은 후회했다. 재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다시는 재희를 만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야, 강무혁! 지금 삼 일째 밤새웠어. 그만해! 그러다 쓰러져!”
그 마음을 해소하듯 무혁은 미친 듯이 공부에 매진했다. 같이 유학 온 민석이 뜯어말려도 소용없었다. 무혁은 뒤늦게 덮쳐 오는 그리움을 해소할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게 바로 공부였다. 그렇게 돌고 돌아 맞선 자리에서 만난 재희.
‘간신히 이렇게 몇 년 만에 만났는데.’
무혁은 더 이상 후회하고 싶지 않았다. 무혁이 재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재희 씨.”
재희가 돌아보았다. 딴생각에 잠겨 있던 재희의 눈동자에 무혁이 담기기까지 시간이 소요되었다. 재희가 완전히 몸을 돌리자 무혁이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자 재희가 한 발짝 물러난다. 무혁의 걸음이 뚝 멈췄다. 무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동시에 재희의 표정이 굳어졌다. 파르르 떨리는 시선을 어쩌지 못하던 재희가 이윽고 시선을 내렸다. 그 모습을 보자 무혁은 화가 나기보다는 안타까웠다. 아직도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사실에, 그리고 재희가 상처받은 작은 동물 같아서. 그때도, 지금도. 재희는 아직도 상처받은 작은 동물이었다.
“안색이 안 좋아 보입니다. 피곤합니까?”
무혁의 말에 재희가 고개를 들며 눈을 느릿하게 깜박였다.
“아니요. 괜찮아요.”
“예식장에서 무슨 일 있었습니까.”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도 있는데 무혁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집 분위기 자체도 그랬고 장남으로서 어깨에 얹어진 짐도 무거웠다. 그 영향 때문인지 무혁은 어릴 때부터 어른스러웠고 무뚝뚝했으며 말이 없었다. 뭐든 필요한 내용만 직설적으로 짧게 말했다. 딱딱한 무혁의 말에 재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찰나의 떨림이었지만 무혁의 예리한 눈에 고스란히 잡혔다. 무혁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뭐라 할 말이 있는 듯 재희가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꾹 다물었다.
“아무 일도 없어요.”
“정말입니까.”
재희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무혁이 손을 뻗어 재희의 볼을 감쌌다. 크고 거친 손에 작고 재희의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혁은 가만히 재희와 시선을 마주했다. 크고 맑은 저 눈동자 안에 오롯이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 누구도 아닌, 재희의 눈동자에.
‘그런데 왜.’
미친 듯이 갈증이 일까. 그때와 달리 무혁은 재희 앞에 나섬에 주저가 없었다. 자신만 바라보길 바랐고, 재희의 시선에 자신이 오롯이 담기길 갈망했다. 조금 돌아오긴 했지만 결국 재희와 결혼을 했고 이제 헤어질 일도 없다. 그러나 제 손에 닿는 이 온기가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초조함이 몰려왔다. 이 기분을 예식장에서도 똑같이 느꼈다. 결국 참지 못하고 키스를 했다. 잠시나마 해소되었던 초조함이 다시금 일었다. 신재희. 넌 모르겠지. 네가 내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꿈같은지. 몇 날 며칠 내 품에 가둬 두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그 눈동자에 담지 못하게 하고 싶은 이 지독한 탐욕을 알 수 없을 거야. 몰라도 좋아. 안다면 네가 놀라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평생 몰라도 좋아. 그러니 신재희. 너도 나만을 바라보고 사랑해. 내색할 수 없는 탐욕 가득한 마음을 꾹 누르며 무혁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재희의 입술 바로 앞에서 멈춘 무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사랑해.”
그에 화답하듯 재희의 눈이 이내 허락하듯 감겼다. 그 사소한 움직임에도 무혁은 안도를 느끼며 눅진하게 입을 맞췄다.
* * * 폭풍 같은 예식을 끝내고 정신을 차렸을 땐 호텔이었다. 스위트 룸에 들어서자마자 재희는 얕은 한숨을 흘렸다. 예식 후 이리저리 인사 다니느라 정말이지 혼이 쏙 빠져나간 기분이었다. 스위트 룸을 구경할 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피곤했다. 무혁이 윤 비서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재희는 통유리로 되어 있는 창가로 다가갔다. 한강 야경 뷰가 아름답다고 명성이 자자한 S 호텔답게 뉘엿뉘엿 지는 노을의 주황빛이 물든 한강도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결혼……했구나.’
뒤에서 무혁이 윤 비서와 나누는 대화 소리가 언뜻언뜻 들렸다. 내일 신혼여행 떠날 일정 때문에 나누는 대화 같았다. 낮고 진중한 무혁의 목소리에 재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득 재희는 조금 부풀어 오른 입술을 매만졌다. 케이크 커팅식 때 무혁이 갑자기 키스를 해서 당황스러웠지만 곧 속수무책으로 그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거칠지만 정중한, 그런 이상한 키스. 강인한 턱과 목울대, 단단하고 뜨거운 품. 그리고……. 입술에 닿았던 그의 숨결까지 되짚던 재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저었다. 어쩐지 더워진 재희는 손으로 부채질하며 스위트 룸 안을 둘러보았다. VVIP만 머무는 룸답게 넓고 아늑했다. 재희의 시선이 침실로 향했다.
‘저기가 침실이겠지.’
잠시 무혁과 한 침대에 누운 모습을 그려보던 재희가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던졌다. 부부라면 당연히 같은 방을 쓰는 게 맞겠지만 그런데도 얼굴이 후끈거렸다. 엄한 생각을 잊기 위해 멍하니 창밖을 보던 재희는 문득 예식장에서 본 뒤로 잊고 있었던 박정수가 떠올랐다.
‘박정수.’
대학 들어가서 사귄 첫 남자친구이자 마지막 남자친구. 갓 복학한 박정수는 교양 시간에 처음 본 재희에게 첫눈에 반했다며 끊임없이 다가갔고, 적극적이었다. 애정에 목말랐던 재희는 결국,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음에도 사귀었고 끝은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