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결혼식2021.12.30.
무혁이 굳은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자 되려 당황한 건 재희였다.
“무혁 씨?”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혁이 정중하게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차에 올라타자 이어 무혁이 운전석에 올랐다. 차가 출발하자 재희는 힐끔, 무혁을 훔쳐보았다. 늘 표정이 없는 무혁이지만 오늘은 한층 더 표정이 없어 보였다.
‘아까 뭔가 실수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사한 거 외에는 실수한 건 없었다. 혹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 싶어 차창에 비친 얼굴을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시선이 다시 무혁에게 향했다. 눈가가 거뭇거뭇한 게 어쩐지 무혁이 피곤해 보였다. 재희가 머뭇거리며 무릎 위에 올려놓은 종이가방을 내려다봤다. 아직 숍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좀 남아있었다. 재희는 용기를 내기로 했다.
“저, 무혁 씨.”
마침 신호를 받고 차가 멈추자 재희가 조심스럽게 불렀다. 무혁이 힐끗 보자 재희가 가지고 있던 종이가방에서 작은 샌드위치를 꺼내 내밀었다.
“저……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느라 아직 식사 못 했을 것 같아서. 어제 싸 봤는데……. 요기 정도는 가능할 거예요.”
“저 주는 겁니까.”
평소보다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무혁이 물었다.
“……네.”
샌드위치를 내밀었지만, 무혁은 물끄러미 샌드위치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무혁이 받을 생각조차 없어 보이자 재희는 손이 민망해졌다.
“그러고 보니 한식 좋아한다고 하셨죠. 그냥 김밥 같은 걸 쌀 걸 그랬나 봐요. 이건 그냥…….”
얼굴을 붉히며 민망해진 손을 거둬들이려는 순간 재희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혁이 상체를 기울이더니 그대로 샌드위치를 덥석 물었기 때문이었다. 샌드위치를 내민 채로 재희가 굳어있자, 무혁은 천천히 샌드위치를 씹어 삼켰다.
“맛있습니다.”
그러곤 재희가 들고 있던 샌드위치 하나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운전 중이라 손을 뗄 수 없어서.”
신호가 바뀌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차는 다시 출발했고 무혁의 표정 역시 변화가 없었다. 재희는 차마 무혁에게 시선을 두지 못하고 손을 조심스럽게 오므렸다. 심장이 손가락 끝에 달린 것처럼 두근거렸다. 재희는 마치 100m 달리기를 전속력으로 질주한 것 같은 숨 가쁨과 어지러움을 느꼈다. …… 그래서 덤덤한 표정으로 운전에 집중하는 무혁의 목덜미가 붉어지고, 손에 심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핸들을 세게 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 * * S 호텔 예식장. 대한민국 최고급 예식장으로 손꼽히는 호텔 예식장은 이른 오전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곳곳에 경호원이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고, TV에서나 볼 수 있는 정, 재계의 유명인사들이 홀에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예식홀과 이어진 야외 테라스가 셀링포인트로 유명한 예식장은 마치 세상에서 단 하나의 커플을 축하해주듯 곳곳에 신랑 신부의 웨딩 사진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신부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마치 제 딸을 시집보내는 엄마처럼 희수는 재희를 보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흐어엉. 재희야. 너 진짜 너무 예쁘다. 어쩜 이렇게…… 으흑. 예쁘냐. 우리 재희를, 쿨쩍. 데리고 가다니. 나쁜 놈. 안 돼. 나 너 못 보내.”
“희수야.”
“우리 재희 아까워서 어떻게 보내. 흐어엉.”
“우선 눈물부터 닦아. 너 화장 번져.”
당황한 재희가 티슈를 건네주며 달래 주었다.
제게 이목이 쏠렸음에도 희수의 울음은 좀처럼 그치지 못했다. 한참이나 달래주고 나서야 울음을 그친 희수가 평소처럼 짓궂게 웃었다.
“쿨쩍. 이거야? 시원하게 한방에 샀다는 그 웨딩드레스가?”
“응.”
재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진짜 예쁘다. 나 이렇게 예쁜 웨딩드레스는 처음 봐.”
눈물을 닦으며 드레스를 보는 희수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팔을 감싸는 듯한 꽃 넝쿨 레이스가 인상적인 드레스는 한땀 한땀 수제작으로 장식된 비즈가 화려한 조명에 반사되어 신부를 한층 더 빛나게 해 주었다.
“다행이다. 행복해 보여서. 나 사실 계속 걱정했지, 뭐야. 네가 워낙 티를 안 내니까 억지로 결혼하는 게 아닌가 해서.”
“아직도 그 소리야?”
“어. 근데 오늘 너 웃는 거 보니까 마음이 놓인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어.”
“죽기는. 손자 손녀까지 다 봐야지.”
실없는 농담을 하며 둘은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재희 씨! 세상에 너무 예쁘다. 내가 알던 그 재희 씨 맞아?”
이윽고 차례대로 전 회사 동료들이 찾아와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비록 신채근도, 홍연화도, 할머니도, 그리고 할머니에게 붙잡힌 재혁도 아무도 신부대기실에 오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니까, 행복한 날이어야만 하니까 차라리 오지 않은 게 재희에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잠시라도 이 행복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 * * 홀에 서서 부모님과 함께 손님에게 인사를 나누던 무혁의 시선이 초조한 듯 이따금 신부대기실로 향했다. 전날까지 일에 매진했던 터라 눈가가 거뭇했지만 강렬한 인상 덕분에 티가 나지 않았다. 빨리 들어가라고 민석이 재촉하지 않았다면 사무실에서 밤을 새웠을 터였다.
“새신랑 얼굴이 마치 누구 한 대 때리러 갈 얼굴 같네.”
곁에서 들리는 오만하고 차가운 목소리에 무혁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넓은 어깨와 탄탄한 몸, 무혁과 거의 비등할 정도로 키가 큰 남자가 슈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차가운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김서원. 그리고.”
무혁의 시선이 서원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향했다. 서늘한 인상의 남자, 서원의 옆에는 까만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여자가 고개를 까딱여 인사했다. 무혁도 마주 고개를 까딱여 주었다. 무혁은 어쩐지 익숙한 얼굴에 기억을 더듬었다. 이윽고 대학생이었던 서원이 결혼까지 생각했던 옛 연인임을 기억해 냈다. 여자가 한 발짝 물러나려 하자 서원이 여자의 팔목을 붙잡고 제게 끌어당겼다. 여자는 거의 품에 안기다시피 서원에게 붙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 드디어 볼 수 있겠네. 저번에 못 보도록 막았던 네 신부.”
“네가 남의 일에 관심 많을 줄은 몰랐군.”
“원래 그런 덴 관심 없는데 말이야. 사람 성격은 변하기 마련이라.”
서원의 서늘한 시선이 여자에게 닿았다. 여자는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고집스럽게 마주 보았다. 서원이 피식, 얕게 웃음을 흘렸다. 둘의 묘한 신경전을 지켜보던 무혁이 덤덤하게 말을 뱉었다.
“민석은 1층에 있다.”
“아아. 그래. 그나저나 박정수, 돌아왔다고 하던데.”
“그래.”
“박정수와 연락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선을 넘은 적은 없어서.”
“너답다. 그럼 예식 때 보지.”
서원이 무혁의 어깨를 두드리며 여자를 데리고 1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무혁은 여자의 허리에 팔을 두른 채 걸음을 옮기는 서원에게서 곧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손님들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무혁의 신경은 온통 신부대기실로 쏠렸다. 몇 년 동안의 기다림은 익숙한 무혁이었지만, 지금은 목이 탄 듯 갈증이 일었다. 아침에 맑게 웃던 재희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다시 한번 더 그 웃음을 보고 싶은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들끓는 갈증을 어쩌지 못해 애꿎은 주먹만 쥐락펴락할 때 직원이 다가왔다.
“신랑님. 곧 예식이 시작됩니다. 이리로.”
무혁이 직원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예식홀 입구 앞에 서 있자 곧 뒤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무혁이 힐끗 돌아보자 그곳에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을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한 뒤 웨딩 헤어밴드와 면사포를 길게 늘어뜨린 채 걸어오고 있는 재희가 보였다. 무혁과 시선이 마주치자 재희가 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무혁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안 그러면 재희를 끌어안고 단둘이 있을 곳으로 당장 뛰어나가고 싶은 격렬한 충동을 이기지 못할 것 같았다. 재희가 곁에 서자 무혁이 손을 뻗어 재희의 손을 움켜쥔다. 재희가 깜짝 놀라 올려다보자 무혁은 그대로 제 팔에 재희의 손을 끼워 넣었다. 그러곤 다시는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처럼 단단하게 옭아매었다. 당황한 재희가 입술을 달싹이는 순간, 예식홀 문이 열렸다. 드디어 식이 시작되었다.
예식홀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시선에 들어온 건 얼추 몇 억은 들였을 꽃 장식과 화려한 샹들리에였다. 하객의 모습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예식홀은 굉장히 화려했고 눈이 부셨다. 현실이지만 현실 같지 않았다. 세상에 무혁과 단둘만 덩그러니 떨어진 듯한 기분에 긴장으로 재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
힐끗, 무혁의 시선이 제 팔로 향했다. 자세히 보지 않는다면 눈치 못 챌 정도로 재희의 손이 약하게 떨렸다. 무혁이 무심하게 팔을 슬쩍 움직였다.
“……?”
아까보다 한층 더 단단하게 느껴지는 힘에 재희의 시선이 무혁에게 향했다. 무혁은 기꺼이 재희의 시선과 마주했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재희의 입이 부드럽게 풀렸다. 무혁 덕분일까. 재희는 조금 긴장이 풀린 채로 식에 임할 수 있었다. 식은 예정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한 뒤 예식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웨딩케이크 커팅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웨딩케이크 커팅식은 S 호텔 예식홀의 자랑이자 트레이드마크인 테라스에서 이루어졌다. 2월의 추운 날씨임을 감안하여 테라스에는 유리로 만든 벽이 세워져 있었고, 꽃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S 호텔의 메인 셰프가 정성 들여 준비한 웨딩케이크는 자르기 아까울 정도로 화려하고 예뻤다. 아치형으로 된 꽃장식 아래 무혁과 나란히 선 재희는 무혁과 함께 커팅 칼을 들었다.
“……!”
막 케이크를 자르려던 재희의 손이 허공에 멈춘 건 어느 시선을 느낌과 동시였다. 무심결에 그 시선과 마주한 재희의 눈동자가 당황으로 흔들렸다. 재희에게 시선을 주던 남자 역시 당황한 모양인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박정수. 저 사람이 어떻게 여기에.’
말끔한 슈트 차림으로 민석과 함께 앉아 있던 남자가 허겁지겁 도망치듯 예식홀 밖으로 나가버렸다.
“재희 씨.”
이상함을 느낀 무혁이 나지막하게 불렀다. 그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재희가 무혁을 올려다보았다. 의문이 서린 그의 시선에 재희가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손을 움직였다. 웨딩케이크가 커팅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꽃가루가 화려하게 허공을 물들였다. 하지만 재희의 눈에는 더 이상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허겁지겁 예식장 밖으로 나가버린 남자. 전 남자친구인 박정수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혁에게만 들릴 정도로 말한 재희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 재희의 허리에 커다란 손이 감기더니 순식간에 남자의 품에 파묻히듯 안겼다. 미처 상황파악을 하기도 전에 뜨거운 입술이 재희의 입술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