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당신과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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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당신과의 하룻밤
2022.10.03.
“각하!”
마가렛이 반가워 외쳤다. 데몬이 성큼성큼 연회장을 가로질러 엘리제가 서 있는 단상까지 나아가는 동안 등 뒤로 검은 망토가 나부꼈다.
“겁, 겁박이라니요! 저희는 단지…….”
그가 떨고 있는 시에델 재상의 말을 단번에 잘랐다.
“엘리제 님이 필요한 건, 당신들 아닙니까?”
엘리제에게 당신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원치 않는 이를 상대로 조건을 달고 책임지라 종용하는 게 겁박이 아니면 무업니까.”
데몬의 말에 아무도 토를 달지 못했다.
그에 기에 눌렸을 뿐만 아니라 그가 하고 있는 말이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성녀 자리라면, 제가 허락할 수 없습니다.”
단호한 한 마디, 한 마디에 시에델이 그대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가 지난번 사냥 대회 때 보여주었던 엄청난 괴력도 자꾸 떠올라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시에델 왕가와 귀족들이 엘리제에게 이런 무례한 요구를 하는 이유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었다.
정령의 힘을 가진 엘리제가 시에델을 떠나서는 오래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이렇게 당당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겠지.’
비겁하게도.
간청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데몬의 눈에는 사실 자신들 유리한 방향으로 엘리제를 이용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녀를 성녀로 칭하며 자신들이 가진 정령의 힘을 더욱 신성시하고 싶을 뿐, 엘리제를 위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어떻게든 자이드와 엮으려는 저 음흉한 속까지.’
당장에라도 혼쭐을 내주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이유는 그래도 명색이 엘리제의 대관식이기 때문이었다. 눈앞의 그녀는 예상했던 만큼이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떻게 오셨어요?”
다가오는 데몬을 향해 엘리제가 활짝 웃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과 붉어지는 뺨을 보자 데몬의 표정이 순식간에 온화해졌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다니요. 대관식에 못 오실 줄 알았는걸요.”
금세 부드러워진 눈빛으로 그가 엘리제에게 다정히 눈을 맞추며 웃었다.
어서 그녀를 데려가서 대관식 말고 다른 식을 올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엘리제 님께서 뜻하시는 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 성녀가 되겠다 선언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차피 그녀에게는 그 자리가 필요치 않으니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그가 엘리제의 두 손을 잡고 다정하게 속삭였다.
순간, 그곳에 있는 모두가 조금 전 위압적인 태도로 좌중을 압도하던 그 데몬이 맞나 싶어 두 눈을 깜박여야 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뜨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제가 곁에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데몬이 한쪽 무릎을 꿇고 엘리제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 위에 입을 맞추었다.
“아!”
귀족 영애들과 부인들 중 여럿이 그의 달콤한 말과 행동에 탄성을 뱉었다. 당사자가 아님에도 황홀감에 현기증을 느끼는지 머리를 짚으며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는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데몬이 시에델의 왕족과 귀족을 향해 다시금 날카로운 눈빛을 날렸다.
“단 한순간도 아까우니, 저는 이만 제 아내가 될 분을 모시고 돌아가야겠습니다.”
아내라고? 그 말을 듣고 보니 엘리제의 하얀 의상과 정복을 입은 데몬의 모습이 마치 결혼식장의 신랑과 신부를 연상시켰다.
“잠, 잠시만요!”
“엘리제 님!”
“성녀님!”
각자의 이유로 모두가 웅성대는 사이. 휙!
“앗!”
엘리제의 외마디와 함께 데몬이 그녀를 순식간에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고는 무섭게 빠른 속도로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
시에델 왕가의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데몬을 쫓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제를 안은 채 말에 올랐다.
데몬의 지시를 받은 마가렛 역시, 토리와 로떼 그리고 엘리제의 물건만 챙겨서 올 때 타고 왔던 마차에 오를 준비를 순식간에 마쳤다.
데몬의 말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마가렛도 서둘러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에 시에델의 왕과 왕후가 마가렛을 붙잡았다.
“이대로 가버리시면 안 되네!”
마가렛이 침착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저는 주군의 명을 따를 뿐입니다.”
그녀의 주군은 크레미언 대공이었다. 마가렛은 공손히 인사를 마치고 곧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 그럼 우리 시에델은…….”
멀어지는 마차를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눈이 마구 떨렸다.
이대로 엘리제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녀의 힘을 조금 전 왕족과 귀족들이 모두 직접 보았다. 이제 그들은 누가 시에델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그들 위에 군림했던 지금 왕가인가 아니면.
‘자신들에게 정령수를 나누어 주는 엘리제인가.’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자명하다. 게다가 엘리제는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 고귀한 귀족 입장에서는 더욱 구미가 당길 것이었다.
머리를 조아릴 필요가 없는 지도자.
새로운 세력에게 그녀는 너무나 편리하고 적합한 명분이 되어줄 것이었다. 귀족들이 엘리제를 어떻게든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할 모습이 벌써 눈에 선했다.
‘무슨 수가 있어도 엘리제 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해!’
“자이드.”
“예, 어마마마.”
“엘리제 님께서 주신 정령수를 챙겨서 미로니카를 다녀와라.”
“……엘리제 님을 되찾아오라는 말씀이십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설득하여 다시 모셔와야 한다. 다른 귀족이 아니라 네가.”
“알겠습니다.”
“너도 타국에 오래 있을수록 위험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니, 최대한 빠른 것이 좋다.”
“예, 어마마마.”
잠시 후 시종이 데려온 백마의 푸른 안장 위로 자이드가 서둘러 몸을 올렸다.
***
데몬은 쉬지 않고 시에델에서 미로니카로 말을 달렸다.
말에 타고 있었지만 엘리제는 느낌상 데몬의 몸에 올라탄 기분이었다.
그녀가 떨어지지 않도록 데몬이 몸을 단단히 밀착시킨 탓에 그의 넓은 가슴과 향기, 심장 소리가 정신없이 모든 감각기관을 자극했다.
“조금 전 시에델의 국경을 지났습니다.”
“벌써요? 아! 아까 구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정말 곤란한 순간에 때마침 그가 나타나 주어서 엘리제는 마치 빠져나오기 힘든 덫에서 구출된 기분이었다.
“엘리제.”
갑자기 불린 이름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그가 곧바로 입맞춤을 해왔다. 뜨겁고 말캉한 것이 그녀의 입안을 빠르게 얽으며 깊이 들어왔다.
“!”
동시에 맞닿은 입술 사이로 그가 자신에게 마력을 불어 넣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시에델을 벗어났기 때문이구나.’
시에델이 아니니 정령의 힘이 없는 땅. 빠르게 달리는 말 위에서 나누는 열정적인 입맞춤 때문인지, 그가 주는 강력한 마법의 기운 때문인지 엘리제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얼마를 더 달려 데몬은 미로니카 황궁 근처에서 말을 바꾸어 타고 대공가로 곧바로 달렸다. 지친 말은 쉬게 하고 새 말로 더 속도를 내기 위해서였다.
덕분에 마차로 하루 반나절의 거리를 그 반도 걸리지 않고 도착할 수 있었다.
입맞춤 후에 데몬의 따뜻한 품에 안겨 그의 심장 소리를 듣다 엘리제는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는데, 깨어보니 어느새 그의 영지였고 주변은 어둑한 밤이었다.
“깨셨습니까?”
몽롱한 상태였지만 엘리제는 두고 온 식구들이 걱정되었다.
“아……, 네. 마가렛은요?”
“저희 뒤를 곧장 쫓았을 테니 내일이면 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데몬이 대공가로 바로 왔다면 황궁은 이제 가보지 않아도 되는 건가?
“황궁에는 별일 없는 건가요?”
“성하께 수상한 점을 발견하여 미카일이 아직 조사 중입니다.”
“성하요?”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엘리제 역시 깜짝 놀랐다.
“그렇다면 정말 큰일 아닌가요? 황후 폐하와 미카일은 성하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잖아요!”
걱정하는 엘리제를 더욱 꼭 안으며 데몬이 빙긋이 웃었다.
“제 말을 바로 믿으시는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사이 대공가에 도착한 데몬이 엘리제를 그대로 안고 정문으로 들어섰다. 검은 망토에 둘둘 말린 사람을 안아 들고 데몬이 말에서 내리자 하임과 제레미가 달려 나왔다.
“각하, 다녀오셨습니까.”
“내일쯤 마가렛이 탄 마차가 도착할 것이니, 그때 마가렛으로부터 사정을 듣게.”
“예? 그럼 각하께서는…….”
“더 급한 일이 있으니 방해하지 말도록.”
곧바로 가주의 방으로 향하는 주군을 바라보다 하임과 제레미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설마요, 아니겠죠?”
“아니긴, 우리 예상이 맞을 걸세.”
끄덕. 두 사람은 데몬이 망토로 가린 가냘픈 실루엣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데몬이 늦은 밤 저렇듯 품에 안고 올 사람 자체가 그녀밖에 없다.
“저렇게 티를 내시면 어떡합니까! 살아계신 거 광고하시는 것도 아니고.”
“쉿! 조심하게. 우리라도 비밀을 지켜드려야 하네.”
속닥속닥. 서로에 귀에 대고 열을 내며 귓속말을 하는 두 사람을 대공가의 사용인들이 그저 의아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
데몬은 자신의 방에 들어와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품에 안았던 그녀를 조심스레 내려주었다.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리느라, 아직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그녀를 감추느라 그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덮어주었던 망토를 살며시 내리자, 은빛 머리카락이 쏟아지며 하얗고 아름다운 얼굴이 달빛을 받아 더욱 눈부시게 빛났다.
“제가 각하 말씀을 믿는다니, 무슨 뜻이셨어요?”
엘리제는 아까 대공가에 도착하느라 미처 듣지 못했던 대답을 재촉했다.
데몬은 잠시 대답 대신 자신을 올려다보는 맑고 투명한 금색 눈을 응시하였다.
사랑스러운 그 금빛 눈 안에 자신만이 가득 담겨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흡족했다.
가슴이 벅찰 만큼.
“다른 사람에게 제가 똑같이 말했다면 대부분은 성하가 그러실 이유가 없지 않냐며 믿지 못할 것이니까요.”
미카일부터가 성하를 염탐해달라 부탁했을 때 비슷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 그야 각하께서 근거 없는 말씀을 하실 리 없으니까요.”
데몬의 성격을 알고 있으니 엘리제는 그에게 그만한 이유와 확실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데몬의 판단을 믿는 거야 당연한 결과였다.
그래도 어쩐지 그를 좋아하는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바쁜데, 아는지 모르는지 데몬은 그저 그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을 할 때마다 오물오물 움직이는 분홍빛 입술과 발음할 때마다 유영하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분홍 혀를 보며 그의 입안이 바짝 말라 들었다.
“엘리제, 저는 고백하건대 나름 보수적인 남자입니다.”
“네?”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엘리제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그런데 오늘 대관식의 당신을 보고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무슨 생각을요? 대체 제가 어땠기에…….”
이토록 순식간에 먹이를 앞에 둔 굶주린 야수의 눈빛이 되시는 거죠?
“평생 여유가 없어 본 적이 없었지만, 당신 앞에선 아님을 실토하겠습니다.”
하아.
“그리고 결혼식 이후까지 기다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눈을 감으며 뱉어내는 데몬의 숨이 마치 아픈 사람처럼 뜨거웠다.
“열이 있으신가 봐요, 각하!”
엘리제가 놀라 하얀 손을 그의 이마에 올렸다. 앞머리가 올라가며 잘생긴 이마와 반듯한 콧날이 드러났다.
붉은 눈에도 열기와 물기가 올라 더욱 그의 눈빛이 강하게 느껴졌다.
“당신에게 반응하는 것뿐입니다.”
“!”
“오늘은 저를 받아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 말씀은…….”
“함께 밤을 보내고 싶습니다, 엘리제.”
풀썩.
내렸던 검은 망토를 던져버리고 데몬은 새하얀 그녀와 함께 침대 위로 쓰러졌다.
***
꿈에서 보았던 그 모습처럼 데몬이 단단한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나 역시 무척이나 기다렸던 순간이고 콩닥콩닥 너무 좋아죽겠지만, 우리 지금 이러고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조금 전 미로니카가 엄청 위험한 상황임을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성하에게서 수상한 점이 있다면서요. 그거 엄청 위험한 이야기 같은데요.
“황궁에 가보지 않으셔도 되겠어요?”
다른 이는 몰라도 프시케는 걱정되었다. 마치 친언니와 같이 다정한 그녀가.
하지만 그런 건 전혀 상관없다는 듯이 데몬이 고개를 내려 다시 입을 맞춰왔다.
“!”
당황한 내가 버둥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했지만 단단한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직 대화 중이었잖아요. 몸으로 하는 대화 말고.
이런 거 싫다는 게 아니라 지금 더 급한 게 있는 거 아니었어요?
푸하!
겨우 숨을 돌리고 나는 얼른 자유를 찾은 입으로 외쳤다.
“데몬! 이러다 미로니카 큰일 나요!”
그런데 놀라운 말이 그의 입에서 떨어졌다.
“미로니카의 멸망보다 제게는 당신과의 하룻밤이 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