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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대관식 (95/126)


95. 대관식
2022.09.29.


모든 것이 확실할 때까지는 단정 지을 수 없었다.


‘신중해야 한다.’

성하의 목적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아내지 않는 이상, 데몬 혼자만의 무모한 추리라고 여겨질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었다.

분명 데몬의 눈에 로안은 흑마법의 주술에 걸린 이였으나, 평범한 눈에는 주술이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말과 신성국 왕의 말이 상반되는 상황이 온다면 사람들은 누구의 말을 믿을 것인가.

데몬의 눈빛이 어둡게 내려앉았다.

황후 프시케만 하여도 반응을 정확히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녀의 겉과 속이 같을지 데몬은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미카일 하나 정도인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벗인 점도 그렇고, 신성력이 있는 미카일의 눈에도 로안의 몸에 담긴 흑마법의 흔적이 보일 테니 미카일은 데몬의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로안의 몸에 담긴 흑마법의 주술이 과연 성하가 먹인 성수가 맞을까?’

확실한 정황과 증거가 필요했다.

대공가의 사람들이야 데몬을 믿고 따를 것이나, 지금 황궁에 있는 이들에게 데몬과 헬리오의 말 중에 하나를 골라 믿으라 한다면 결과가 그리 밝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성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 먼저다.’

그런 후에 프시케에게 이야기해야 설득할 수 있겠지.

지금으로서는 황후에게 성하를 조심하라는 말밖에는 할 수가 없다.

퓌익!

데몬이 손가락으로 휘파람을 불어 전서구를 불렀다.

짧게 쓴 서신 하나를 비둘기의 다리에 묶어 날려 보낸 후 데몬은 마구간으로 향했다.

주인만큼이나 매혹적인 검은 몸의 말에 그가 오르자, 윤기 나는 검은 갈기를 휘날리며 건장한 말이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미로니카 동쪽 시에델을 향해.


 

***

대관식이 진행되는 단상 위로 오른 엘리제는 시에델의 모든 이가 성스러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동안 몽롱한 기분을 느꼈다.

마치 지금도 간밤에 꾸었던 꿈의 연장선인 것만 같다.


‘내가 시에델의 성녀가 된다니 아직도 실감이 안 나.’

생각해 본 적 없는 미래라 그만큼이나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오히려 지난밤 꿈이 더 현실 같았다.

꿈속에는 그녀가 보고 싶고, 늘 함께이고 싶은 이들과 같이 있었으니까.

*

꿈속 그녀는 그리운 데몬, 미카일과 함께 어딘가 오래된 서고에서 책을 찾고 있었다.

데몬의 목소리를 듣고, 그녀가 보고 싶은 이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이쪽에는 없는 것 같은데요?”

엘리제가 중얼거리며 자리를 옮기려는 순간, 등 뒤에서 모르는 손이 쑥 나타나 엘리제 앞에 꽂힌 책을 끄집어내었다.


“찾으시는 게 이 책 아닙니까?”

‘누구지?’

고개를 돌린 엘리제의 눈이 커졌다.


‘지난번 꿈에서 나 혼냈던 그 선생님이잖아!’

열렬하게 혼이 나 진땀을 쏙 빼었던 그 꿈! 그 꿈속 선생님이 분명하다.

엘리제보다 키는 한참 크지만, 어딘가 뾰로통 못마땅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는 얼굴은 잘생기고 젊었다.


‘안 그래도 이 밝은 갈색 머리에, 갈색 눈동자 누군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었는데!’

눈빛만이 달랐다.

안경을 쓰고 있는 것까지는 똑같았지만 그 너머 따뜻하고 온화한 눈빛과 날카롭고 예리한 느낌이 상반되었다.


“당, 당신은!”

엘리제가 입을 열려는 찰나에 옆에 있던 미카일과 데몬이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꿈속에서 엘리제는 순식간에 세 명의 키 큰 미남자들 사이에 둘러싸였다.


“다니엘! 네가 어떻게 여길!”

기쁨과 놀라움이 섞인 얼굴로 미카일이 물었다.


“내가 불렀어.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했더군. 벌써 예전부터 영입하기 위해 대공가에서 연락을 취했었지.”

“나도 모르게?? 이렇게 비밀리에?”

데몬의 대답에 미카일이 얼빠진 표정을 짓자 모두가 웃었다.


“시에델에 가기 전에 이미 하임에게 시켜서 준비하던 일이야. 그 일에 꼭 필요한 인재고.”

예전부터 데몬이 준비하던 일? 그게 뭘까?

시에델에 오기 전부터라면 정말 한참 전의 일인데.

곧이어 데몬이 엘리제에게 그 남자를 소개시켜 주려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엘리제 님…….”

그녀가 좋아하는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마치 그녀의 세상이 데몬으로 가득 찬 것만 같았다. 설렘과 긴장으로 온몸에 찌르르 잘게 전율이 흘렀다.

그런데.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지더니 데몬의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동시에 단단한 팔이 엘리제의 거칠게 허리를 낚아챘다.


“오늘 제 것이 될 준비는 되셨습니까?”

“네??”

갑자기 달라진 분위기와 그답지 않은 언행에 엘리제는 깜짝 놀랐다.

단 한 번도 데몬은 엘리제를 ‘내 것’이라 한 적이 없었다.

자신을 엘리제의 것이라 칭한 적은 있었어도.

어느덧 정신을 차려보니 그곳은 더 이상 서고가 아니었다.


‘여기는…… 대공가 같은데?’

깔끔하면서도 우아하고 정제된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아무리 보아도 이곳은 대공가 가주의 방 같다.


“저는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네? 무, 무얼…….”

데몬의 붉은 눈 안에 엘리제 자신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점점 고개를 내려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서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

마침내 그의 품 안에 강력하게 갇히는 느낌에 몸이 뜨거워져 꿈속이지만 엘리제의 정신이 더욱 아득해지려는 순간. 마가렛의 음성이 들렸다.


“엘리제 님! 대관식 날이니 어서 일어나셔서 준비하셔야 해요!”

 

*

그렇게 달콤했던 꿈이 차라리 더 현실처럼 느껴졌지만, 엘리제는 숨을 한차례 뱉으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눈을 감았다 뜨자 대관식에 참석한 귀족들이 내려다보였다. 가장 앞줄에서 두 눈을 빛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자이드도.

이들에게 자신이 성녀로 필요하다면 그 첫 단추부터 확실한 성녀여야 할 것이다.

엘리제가 침착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화려한 연회 홀에 미리 준비된 수백 개의 크리스털 잔이 그들 앞으로 등장했다. 엘리제가 그레이스에게 부탁해 놓은 것들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눈부시게 새하얀 그녀가 두 손을 들어 정령의 힘을 일으키자, 향기롭고 푸른 기운이 마치 파도와 같은 형상으로 눈앞에 펼쳐졌다.

촤아아!


“와!”

동시에 연회장에 환호성이 일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투명한 크리스털 잔들이 푸른 정령수로 가득 채워졌다.

마치 빛나는 보석처럼, 푸른 물들이 크리스털 잔에서 찰랑이며 반짝였다.


“참석해 주신 여러분께 제가 드리는 답례입니다.”

“어머나!”

대관식의 참석자들은 엘리제가 가진 정령의 힘이 무척 강하면서도 순수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정령의 힘을 물의 형태로 담아낸다더니 사실이었군요!”

“과연! 이토록 많은 잔에 동시에 담아낼 양이라니, 정말 놀랍습니다.”

“강력해요. 이 정도의 힘일 줄은 몰랐습니다.”

듣도 보도 못한 이벤트라 모두의 입에서 감탄이 절로 나왔다. 뒤이어 경외하였다.

확실히 엘리제의 능력은 그들이 알던 힘을 초월했다. 성녀라 불리기에 충분할 만큼.

시에델 왕가가 그녀에게 왜 그리 전전긍긍하나 했더니 그녀의 아름다움만큼이나 능력 역시 상상 이상인 탓이 분명해 보였다.

루시아 공주를 저주하려던 흑마법의 기운도 엘리제가 물리쳤다는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라며 연회장에 수군거림이 끊이질 않는 그때.


“이토록 강력한 정령의 힘은 최초가 아닌가 싶소! 엘리제 님을 성녀로 모실 수 있는 것은 우리 시에델의 영광이오.”

분위기를 느낀 왕 페르만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희의 제안을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제 님.”

왕후 그레이스도 엘리제의 손을 잡으며 감사를 전하고 말을 이었다.


“정령의 힘은 우리 시에델에 존재하는 가장 신성스러운 힘. 이제 이 성스러운 힘이 이토록 강력하신 엘리제 님을 성녀로 모시어 마땅히 우리 시에델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고자 합니다.”

그레이스의 말이 끝나자, 페르만이 준비된 금관을 엘리제에게 내밀며 물었다.


“엘리제 님, 저희의 성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시에델의 왕가가 준비한 금관은 수없이 많은 파란색 보석들로 무척이나 화려하고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다.

최초의 성녀이기 때문에 시에델에서 그녀에게 왕관을 씌워줄 이도, 명할 이도 없었다.

그레이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엘리제는 스스로 관을 머리에 쓸 예정이었다.


“한 가지 말씀을 먼저 드리고 대답하는 것이 맞을 것 같아요.”

‘네’라는 대답만 있으면 이제 대관식은 마무리될 것이고 저 관(冠)까지 머리에 쓰고 나면 그녀는 진정 시에델의 성녀가 될 것이었다. 엘리제가 좌중을 둘러보며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는 성녀가 되어도 시에델에 머물지 않을 예정입니다.”

“네?”

모두가 당황하여 입을 턱 벌렸다. 성녀가 성지에서 살지 않으면 어디에서 산단 말인가?

엘리제 바로 곁에 있던 그레이스가 가장 놀랐다. 대화를 통해 엘리제가 성녀가 되어 시에델에서 살기로 마음을 굳혔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저는 미로니카에서 살고 싶어요. 그래도 괜찮으시면 성녀가 되겠습니다.”

그녀의 너무나 당당한 말에 다들 어안이 벙벙할 때 누군가가 외쳤다.


“엘리제 님께서는 지금 저희 힘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으십니다!”

“맞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시에델에 계셔야 합니다!”

여기저기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자, 엘리제가 다시 한번 손을 올렸다.


“솔직히 저는 성녀 자리에 욕심이 없어요. 다만, 제가 정령의 힘을 각성하는 과정에 왕후 마마의 도움이 있었기에 그 은혜를 갚는다는 마음으로 제안을 받아들였던 겁니다.”

하지만 그 은혜 갚음이 엘리제가 원하는 삶을 사는 데에 발목을 잡는다면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은혜는 다른 방법으로 얼마든지 갚을 생각이었다.


“허어, 그럼 어찌한단 말이오!”

“타국에 계셔도 우리의 성녀시면 되는 것 아니오?”

“애초에 아무리 좋은 자리여도 원하시지 않는다면 억지로 모실 수는 없지요.”

이래서야 엘리제는 원치 않는 자리를 왕가에서 안간힘을 다해 붙잡는 꼴이었다.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지만 엘리제를 설득해서 어떻게든 왕가를 유지하려고 했던 그레이스는 애가 닳았다.


‘가장 강한 정령의 힘이 계속 우리 왕가에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지금의 왕가는 오래지 않아 무너질 것이다. 몇몇 귀족은 벌써 엘리제를 등에 업고 다음 왕위를 노려볼 생각을 품고 있을지도 몰랐다.


“엘리제 님, 그럼 시에델에 머물지는 못하셔도 저희 왕가와 연을 맺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레이스의 애절한 부탁에 이어 누군가가 외쳤다.


“맞습니다. 시에델은 정령의 힘이 가장 높은 자가 대대로 왕이 되어 왔습니다. 왕좌가 싫으시다면 왕가와 인연이라도 맺어주십시오. 그것이 정령의 힘을 가진 자의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책임?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엘리제가 발언한 이를 돌아보았다.

자이드 옆에 선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귀족.

시에델의 재상으로 불리는 자였다.


‘이거구나. 어제 자이드가 믿고 있었던 거.’

“힘을 가진 이의 책임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정령의 힘은 시에델의 정통성이자 왕가의 근본입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엘리제 님을 다음 대의 왕 또는 왕후로 모시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입니다.”

“맞습니다.”

“부디 재고하여 주십시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그제야 모든 이가 같은 마음인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자신이 가진 힘 때문에 생각지도 못한 책임을 지게 생긴 엘리제는 난처해졌다.

게다가 스스로 왕후에게 은혜를 갚으려 한다는 말까지 뱉은 상황이니 어찌하면 좋을까?


‘이건 지금 대놓고 나더러 자이드와 연을 맺어달라 조르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연회장 한곳에 함께 난색이 되어 발을 동동 구르는 마가렛이 보였다. 그 품에 토리와 로떼도.


‘어……, 어쩌지?’

쾅!

그때 연회장 입구의 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누, 누가!”

“꺅, 무슨 일이죠?”

모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문 뒤로 펄럭이는 망토와 검은 인영이 보였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는 자의 얼굴을 알아보고 페르만, 그레이스, 자이드는 순식간에 얼어붙고 말았다.


“!”

데몬이었다.

그가 붉은 눈에 광채를 내며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저 잠깐의 발동만으로도 몸에서 발산되는 마력으로 인해, 공간 전체에 진동이 일었다. 참석자들의 눈에 긴장과 공포가 가득 담겼다.

곧이어 감미로운 저음이 연회장을 흔들었다.


“감히, 지금 누구를 상대로 겁박을 하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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