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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운명(運命) (77/126)


77. 운명(運命)
2022.07.28.



“아무 일도 없었는데 엘리제 님께서 거짓말을 하시고 내게 무언가를 숨기신다고?”

데몬의 말에 마가렛의 얼굴이 순식간에 희게 변했다.


“우선 엘리제 님께 가봐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데몬이 마가렛에게 말을 남긴 채 방 밖으로 나갔다.


‘당장 말하라 다그치시는 것보다 더 무서워.’

털썩.

마가렛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버리고 말았다.


“애초에 각하께 비밀이라니…… 가능할 리 만무하지.”

어리석은 자신을 탓했다.

가여운 엘리제를 위해서라도 마가렛은 처음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드르륵.

마음을 잡은 마가렛이 엘리제의 준비를 돕기 위해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처음부터 성검이 황궁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임이 미카일에게 물었다. 황궁은 아직 막대한 피해로 정신이 없는 상태였지만 그래도 각자 역할을 하며 조금씩 체계적으로 방어와 치료에 만전을 기하는 중이었다.

모두 프시케가 로안을 도와 현명하게 대처하고 있는 덕분이었다.


“하아……,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미카일의 입에서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비밀 창고에 들어가기 위해 자물쇠를 부수었으니 황가에서 이 사실을 알아차리면 경비가 더 삼엄해질 것이 분명했다. 그때 미카일의 방에 시종 하나가 찾아왔다.


“성하께서 내일이면 도착하실 것 같다고 기별을 보내셨습니다. 황후 폐하께서 사제님께도 알려드리라 하셔서 말씀 전합니다.”

반가운 소식이었다. 미카일과 하임의 표정이 환해졌다.


“혹시 성하를 뵙고 여쭈면 어떨까요?”

하임이 미카일에게 물었다.


“……괜찮을까요?”

“안 괜찮을 이유가 있습니까?”

“만약 제가 알고 있는 대로 성검이 황궁에 있는 것이 맞다면 말입니다.”

“예, 그러면요?”

하임이 정말 궁금하다는 듯 미카일 쪽으로 몸을 쭉 내밀었다.


“본래 신성국에 있어야 했는데, 어떠한 이유로 황궁에 있게 되었는지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네요!”

“어쩌면 황가에서 몰래 가져갔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신성국에서 선물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두 사람은 주거니 받거니, 가능성들을 나열해 보았다.


“그건 아닐 겁니다. 성검을 황가에 선물로 줄 만한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애초에 성검이 신성국의 것이 맞는지부터 따져봐야 할 듯합니다.”

하임의 말에 미카일이 단호하게 답했다.


“성검은 고대 신성국의 왕들께서 몇 대에 걸쳐 신성력을 응집시켜 만드신 것입니다. 그러니, 신성국의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가 있어 그게 지금 황궁에 있다는 말씀이시고요?”

“그렇습니다. 비밀에 부치고 있지만, 신성국에 없는 것은 제가 확인을 했으니까요.”

“그렇다면 누가, 왜 황궁에 성검을 가져다 두었을까요?”

“…….”

답을 찾지 못한 채 다시 제자리였다.

어휴.

우리가 그걸 알면 여기서 이러고 있겠냐는 표정으로 미카일과 하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성하께 섣불리 여쭈면 안 되겠네요.”

“맞습니다. 성하께서 말씀은 안 하셔도 성검을 찾는 중이실 수도 있으니까요.”

하임의 결론에 미카일이 맞장구쳤다.

끙.

두 사람 모두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같은 사람을 떠올리고 있었다.

붉은 눈의 그는 왜 이렇게 어려운 수수께끼를 우리더러 풀라고 맡기고 간 것일까?

***

단단하고 따스한 데몬의 팔을 잡은 엘리제의 하얀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제 일상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던 그와의 순간, 행동 하나하나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다.

너무나도 소중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것들이어서.


“다녀올게요.”

그레이스의 방까지 데몬의 에스코트를 받은 엘리제가 눈을 한 번 감았다 뜨더니, 평소보다도 밝게 그에게 인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말없이 미소 지으며 그녀를 보내준 데몬은 방 밖에서 기다렸다.

어둡고 깊은 눈을 하고.

안으로 들어간 엘리제는 자신을 반기는 왕후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엘리제 님.”

“보내주신 분으로부터 용건을 전해 들었어요. 제안을 받아들이러 왔습니다.”

엘리제의 대답을 들은 왕후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훌륭한 선택을 하신 거예요.”

딸로도, 아들의 짝으로도 맞이하고 싶었던 그녀였다. 이렇게 성녀로 맞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찌 되었든 시에델의 일원이 될 것이니 한시름 놓았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엘리제 님.”

그레이스는 그동안 해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제 꺼낼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시종을 시켜 차를 가져오라 일렀다.


“대관식을 통해 정식으로 성녀로 모실 것입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도록 하지요. 그리고 그 전에 한시라도 빨리 알고 계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왕후가 방 안의 모든 이를 밖으로 물렸다.

흑마법에 대한 불안으로 정령수를 달라 부탁할 용건도 있었지만, 사실 엘리제에게 전부터 전하고 싶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동안 말을 아껴왔던 이유는 엘리제가 아직 시에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위해서라도 어서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이제 성녀가 되기로 했으니 알리는 것을 미룰 이유가 없었다.


“정령의 힘에 대한……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정령의 힘에 비밀이 있어요?”

그레이스가 방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시에델 밖에서는 그 힘이 약해집니다.”

“…….”

“그런데, 힘만 약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그럼…….”

“생명도 줄어듭니다.”

“!”

엘리제는 적잖이 놀랐다.


“그러니 시에델의 성녀가 되겠다고 결정하신 것은 참으로 현명하신 선택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에델이라는 곳에서 운명을 함께할 공동체라고.

엘리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레이스가 그녀를 위해 조금 더 설명했다.


“그래서 타국인이 정령의 힘을 갖는 경우, 힘이 단계별로 열리는 것을 감당하지 못해 죽기도 하지만, 사실 정령의 힘을 갖고도 오래 살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생명력이 이곳 시에델에서 비롯되니까.


‘아! 나는 그럼 어차피 미로니카에서는 얼마 살지 못하는 운명이었어?’

그렇게 생각하니 허탈해졌다.

성녀이든, 로안의 첩이든 결국 미로니카에서는 죽는다.


‘역시.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가 봐.’

그렇다면 어쩌면.


‘데몬이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만, 결국에는 원작대로 프시케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나의 의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곧 ‘사라질 것’이라니. 그리 정해져 있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내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분과 슬픔이 끌어 올라 눈물이 되어 쏟아졌다.


“엘리제 님, 괜찮으십니까?”

갑자기 눈물이 터진 엘리제를 보고 깜짝 놀란 그레이스가 다가왔다. 그녀가 걱정되었다.

이토록 우는 이유를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엘리제가 가여웠다.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일는지도. 함께 있던 사람들과는 헤어져야 할 것이었다. 그런 이유일 거라 왕후는 짐작만 할 뿐이었다.


‘어차피 미로니카에서는 사라질 존재였다면 내가 떠난 후 남겨지는 사람들에게 크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런데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한 사람의 모습에 엘리제의 눈과 입이 절로 벌어졌다.

붉고 깊은 눈빛으로 자신을 슬프게 바라보던 그의 얼굴.


‘설마……!’

자신을 곧 잃을 사람처럼 소중하게 대하고, 애처롭게 바라보고, 간절하게 입 맞춰 왔던 그가.


“!”

알고 있었구나.

틀림없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그는……!

눈물이 마구 솟구쳤다.


‘그런데도 나를 살리고, 나에게 사랑한다, 제발 곁에 있어 달라 말한 거잖아.’

내가 곧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걷잡을 수 없이 한번 시작된 울음은 참아도 끅끅 소리를 내며 엘리제를 비집고 나왔다.

애써 눌러보아도 흐느낌이 점점 커지고 어깨가 들썩였다.

결국 터져버린 슬픔에 엘리제는 그레이스의 품에서 한참을 목 놓아 울었다.

그리고 왕후의 방 앞. 서 있던 그의 눈이 한 번 더 깊게 내려앉았다.

***

방으로 돌아온 엘리제는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

사실 어제부터 거의 쉬지 못했으며, 정령수를 무리해서 만들어냈고, 조금 전 많이도 울어서 기력이 모두 소진되었다.

그레이스의 방 밖으로 나올 때 엘리제가 휘청일 정도여서 데몬은 아예 그녀를 안아 들고 방으로 돌아왔다.

잠든 엘리제를 침대에 눕히자 토리와 로떼가 쪼르르 달려와 그녀의 곁에 몸을 웅크렸다.

깊이 잠든 엘리제를 확인하고 데몬이 낮게 이름을 불렀다.


“마가렛.”

마가렛이 바로 바닥에 풀썩 엎드려 고개를 숙였다.


“잘못했습니다, 각하. 엘리제 님을 위해 제 몫을 다 하고 난 후에 벌을 달게 받겠습니다.”

감히 주군을 속이려 한 죄에 대한 무서움을 왜 모를까.

다른 이도 아닌 데몬 크레미언에게 사실을 감추려 했다니.


“엘리제 님께서 부탁하셔서 그랬다는 변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지금 네 죄를 묻겠다는 게 아니다.”

데몬은 무척이나 슬픈 눈빛으로 잠든 엘리제를 바라보았다.


“엘리제 님께서 알게 되셨다.”

“!”

가능하면 더 확실해진 후에 알려주려고 했다. 정령의 힘이 그런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자신에게 해결책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리고 방법에 어느 정도 확신이 생기고 있던 차에 이런 일들이 생기고 말았다.


“그러니 가능하면……, 앞으로는 더욱 티를 내지 말고 즐거우실 수 있도록 해드려라.”

데몬의 당부에 마가렛은 말을 잃었다. 그저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차오를 뿐이었다.

한참 후 그가 물었다.


“미로니카에서 연락은 아직인가?”

마가렛이 눈물을 삼키고 품에서 꺼낸 종이를 전했다.


“서신이 도착해 있습니다.”

하임과 미카일이 함께 보낸 서신이었다.

돌돌 말린 종이를 크고 긴 손가락이 펼쳐 들었다.

***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 잠들었던 엘리제의 금안이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엘리제 님! 깨셨어요?”

마가렛이 얼른 달려가 엘리제의 상태를 살폈다.


“너무 무리하셔서 거의 기절하듯 잠드셨어요. 시장하시죠? 좋아하시는 거 해드릴게요.”

마가렛이 평소보다 더 활기차게 그녀에게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주겠다며 웃었다.

말없이 마가렛을 바라보던 엘리제가 천천히 대답했다.


“고마워, 마가렛. 그리고…….”

어쩐지 오늘따라 차분한 엘리제의 음성에 마가렛이 걱정이 되어 물었다.


“혹시 어디 편찮으세요? 기분이 좀 가라앉아 보이셔요.”

“아니야. 잠이 덜 깼나 봐. 대공 각하…… 계시지?”

“그럼요. 방 앞에 계셔요.”

엘리제가 문 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안으로 모셔줘. 드릴 말씀이 있어. 미로니카에 가봐야 하거든.”

“미로니카에요?”

자고 일어나 갑자기 미로니카로 가야 한다 말하는 부분이 걱정스러웠지만, 마가렛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대공에게 말을 전했다.


“찾으셨습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한 음색으로 그가 다가와 물었다.


“네. 시에델에서 대관식을 준비해주겠다 하셨어요. 그에 맞춰 먼저 미로니카에 가서 독립을 요구하고 오고 싶어요.”

성녀가 되는 순서로 보자면 그게 옳았다. 로안에게서 독립하고, 시에델로 돌아와 성녀가 되는 것이 순리와 법도에 맞다. 하지만 지금 미로니카는 안전하지 않았고, 또 하나 데몬이 걱정되는 것은 엘리제의 몸 상태였다.


‘미로니카에 지금 다녀오셔도 무리가 없으실지…….’

그녀가 지금처럼 정령수를 펑펑 만들어낸다면, 시에델에서도 체력이 받쳐주지 않을 것이었다. 하물며 그런 상태로 미로니카로 간다면 아찔한 상황이 될까 데몬은 두려웠다.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엘리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미로니카에 다녀오는 것에 데몬이 조건을 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저와 떨어지시면 안 됩니다. 미로니카에서는 더더욱.”

‘불안해서 그러는구나. 미로니카에서는 내 생명력이 빠르게 닳아 없어질 테니까.’

“그리고 저와 일정 이상 접촉하셔야 합니다.”

다음 말은 엘리제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무슨 말씀이셔요?”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확실해질 때까지 신중을 기하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진지하고 황홀한 음성이 이어졌다.


“엘리제 님께서 가지고 계신 힘이 저의 마력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아, 그런 이유라면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자신은 곧 데몬을 떠나야 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당신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기도 하지요.’

그러니 만남과 접촉은 앞으로 줄여야 했다. 기운 없는 금안을 들어 올렸다.

그나마 이제 작품 속 자신의 정해진 운명과 역할이 무언지 알게 되었다고 그녀는 확신했다.

그런 그녀에게 데몬이 떨리는 저음으로 간절하게 말을 이었다.


“……제 마력이 당신의 생명력을 이어줄 수 있습니다.”

“네?”

뭐라고?

믿을 수 없다는 눈을 한 그녀에게 데몬이 조금 더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러니 그곳에서 언제든 입 맞추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것이 그가 내민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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