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그가 무시무시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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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그가 무시무시한 이유
2022.07.25.
엘리제는 마가렛에게 당부를 마치고 잔에 가득 정령수를 만들어 담았다.
그녀의 손끝을 따라 파란색 빛나는 물이 찰랑이며 담겼다.
변함없이 향기로운 바람이 불어 방 안을 달콤하고 은은한 향으로 가득 채웠다.
‘잠도 못 주무시고 계속 울며 기도하셨는데…….’
마가렛은 엘리제가 걱정이었다. 조금 전 루시아에게 이야기를 들을 때 그녀는 곧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지금 정령수까지 만들고 있으니 무리가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데몬을 치료하기 위해 정령수를 만드는 그녀를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엘리제 님께서도 좀 쉬셔야 해요.”
보다 못해 마가렛이 말했다.
“그럴게.”
엘리제가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대답만 그렇게 했을 뿐, 그녀는 잔에 이어 병에까지 정령수를 담아내었다.
“그렇게나 많이요?”
“혹시나 모르니까.”
“안 돼요. 나머지는 나중에 하세요.”
결국 마가렛이 병을 빼앗아 들었다. 씻고 나온 데몬이 엘리제를 보더니 놀라는 것이 보였다.
“엘리제 님!”
그녀의 창백한 모습에 놀란 것이었지만, 엘리제와 마가렛의 외침이 좀 더 컸다.
“각하, 피가!”
어깨와 다리 등 무수히 많은 상처에서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갈아입은 셔츠와 바지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잠시 후면 멎을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엘리제와 마가렛이 구급상자를 들고 데몬에게 달려들었다.
“그대로 계세요.”
마치 중환자를 다루듯 두 여인이 데몬을 눕히고 여기저기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기 시작했다.
“그러시지 않으셔도…….”
난처했지만 엘리제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려보아서 데몬은 꼼짝없이 그 뒤로는 인형 취급을 받아야 했다.
상처치료가 끝나자 엘리제가 푸른 물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가 정령수를 다 마실 때까지 엘리제는 진지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이제 한숨 주무세요.”
“!”
아니, 지금 자라고?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목숨을 건 격렬한 전투를 한 것이 불과 몇 시간 전이었다. 게다가 엘리제가 이렇게 말똥말똥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데 잠이 올 리 만무했다.
“저도 옆에 누울게요.”
엘리제가 마가렛에게도 자자며 커튼을 치고 불을 껐다.
이제 해가 떠서 다른 이들은 아침을 준비할 시각에.
“마가렛과 저도 밤을 새워 피곤해요.”
그 말에 데몬은 그 둘을 재우기 위해 자리에 누웠다. 슬그머니 토리와 로떼가 데몬의 품 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
다람쥐와 토끼가 자신에게 와서 잠을 청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각하께 좋은 향기가 나서인가 봐요.”
엘리제가 웃었다. 곧 이별을 고할 그 향기로운 품에 저도 안기고 싶다고 생각하며.
***
미로니카의 황제 로안과 황후 프시케는 다시 헬리오에게 사람을 보냈다.
데몬이 흑마법사의 팔 하나를 잘라내면서 일단 위기는 넘겼다.
땅으로 떨어진 타나는 곧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데몬의 말로는 그녀가 제법 큰 상처를 입었으니 바로 공격해오지는 못할 것이라 했다. 그러니 그사이 성하를 모셔오는 것이 좋겠다고.
그러고는 엘리제를 지키는 자신의 임무를 마저 하겠다며 바람같이 사라졌다.
로안 역시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시에델에도 흑마법의 기운이 스며 왕태자 자이드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하께서 오시면 그래도 안정을 되찾을 것이니, 그때 엘리제를 데리고 돌아오라.”
황제의 명을 받은 데몬은 바로 시에델로 향했다.
미카일과 하임은 데몬이 남긴 서신을 통해 그 사실과 그의 부탁을 확인하였다.
『성검(聖劍)을 찾아다오』
“성검이란 것이 있습니까?”
여전히 위급한 환자들에게 신성력을 쏟아붓고 있는 미카일에게 하임이 조심스레 물었다.
“들은 적이 있긴 합니다.”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있다면 신성국에 있지 않겠습니까?”
하임이 또다시 물었다. 그리고 미카일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게 이상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데몬의 부탁을 받아 정보를 찾던 중에 그도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제가 알아본 바로는…… 황궁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게 왜 황궁에요?”
성스러운 검이 왜 신성국이 아닌 황궁에 있단 말인가? 하임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변했다.
“성검을 찾으라는 각하의 말씀이, 흑마법사를 처단하기 위해 검이 꼭 필요하다는 뜻일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황가는 처음부터 흑마법사를 없애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말 아닙니까?”
“!”
하임의 예리한 질문에 미카일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그런데 왜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께서는 성검을 사용하지 않으신 걸까요?”
“!”
미카일이 잠시간의 침묵 후에 입을 열었다.
“사용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예?”
“사용하지 못한 것일 겁니다.”
미카일은 황가가 그토록 크레미언 가를 질투하고 두려워한 이유를 하나 더 알 것 같았다.
“아마도 성검은 어떤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말하자면 ‘마력’ 같은.
그 말을 듣고 하임 역시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황가에서 성검을 이용하여 흑마법사를 없애고 싶었다면 데몬에게 검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면, 검을 찾는다고 해도 각하께서 사용하기 위해서는 훔쳐야 한다는 말이잖아!’
아마도 그 도둑이 될 운명으로 보이는 하임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
‘잠드셨구나.’
엘리제는 옆으로 누워 마주한 데몬의 얼굴을 눈으로 새기는 중이었다.
커다란 금안을 뜬 상태로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빤히 보고, 곧 눈을 감아서 잠시 방금 보았던 얼굴을 떠올려보았다. 감았다가, 떴다. 그렇게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그려 넣고 있었다.
‘짙은 눈썹, 수려한 콧날, 긴 속눈썹, 깊고 그윽한 눈매……. 아…… 빠지는 곳이 없으시네.’
나의 데몬.
따뜻하게 자신을 감싸고 배려하던 그의 말과 행동 그 모든 것이 그리웠다.
바로 곁에 두고도 몹시도.
‘이토록 완벽한 이가 나를 사랑해주었으니 그것으로 되었어.’
거짓말. 될 리가 있는가.
하지만 그렇게라도 단념하지 않으면 자꾸만 욕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설움이 복받쳤다. 내가 왜 죽어야 하느냐 따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
‘데몬이 슬퍼할 테니까.’
그러니 이건 나만 알자. 그리고 내가 마음먹은 대로, 내가 정한 대로 결말을 짓자.
‘그리고 가능하면 많은 양의 정령수를 남기고 가야겠어.’
엘리제는 조용히 일어나 책상으로 가서 종이를 한 장 꺼내었다.
뒤보리 부인의 지분과 정령수의 소유권은 모두 마가렛에게 넘긴다는 내용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가 조용히 자신의 신변을 정리하는 문서를 작성하는 동안,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을 뜬 데몬이 붉은 눈으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
수십이 넘는 위급한 환자들에게 신성력의 빛을 사용하고 나자, 미카일에게도 휴식이 필요했다. 자리를 다른 사제에게 넘기고 미카일은 하임과 함께 잠시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검을 몰래 가져오려면 이렇게 황궁이 다른 일로 정신없을 때가 좋겠습니다.”
바로 지금처럼요.
“예?”
하임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당장요?
“사제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미카일이 도둑질을 제안하다니 너무 현실감이 없었다.
“오늘 밤이 좋겠습니다.”
“!”
청렴하고 아름다운 이 젊은 사제는 기대 이상으로 매우 추진력이 좋았다.
“이렇게 중요한 일은 신중한 것도 필요하지만, 이런 기회가 다시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임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긴장으로 손이 덜덜 떨려왔다.
“오늘 밤, 제가 망을 보고 주위를 분산시킬 테니 다녀와 주십시오.”
“어디 말씀이십니까? 비밀 창고에요?”
거기가 어딘지 알아야 가지 않겠습니까?
하임의 외침을 들은 미카일이 손바닥 크기의 종이를 품속에서 꺼내었다.
“!”
맙소사, 설마 저게 황궁의 도면인 것은 아니겠지?
놀라서 하임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황궁에서 기도 의식을 행하는 100일간 제가 기도만 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모두 예전에 데몬이 부탁한 것들이었다. 미카일이 접혀 있던 종이를 펼쳤다.
“!”
하임은 눈앞의 종이를 바라보았다. 구불구불 미로 그림과 한 지점에 작게 엑스 표시가 있는.
‘이 정도면 사제님은 각하와의 우정을 위해 미로니카 황가를 배신하는 거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아, 배신은 아닐 수도 있겠다. 애초에 미카일은 황국의 시민이 아닌 신성국의 사람이니까.
‘잠깐! 내가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하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그날 밤.
두 명의 남자가 소리 죽여 황궁에 드리워진 어둠 아래에서 만났다. 황궁은 아직 부상자 치유와 무너진 잔해들 복구로 정신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은 두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게 어찌 된 일이지요?”
하임이 헐레벌떡 뛰쳐나오며 미카일에게 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방금 두 사람 다 어둠 속 미로를 거쳐 어느 지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분명 미카일이 찾아낸 곳은 비밀 창고가 맞았다. 자물쇠를 부수고 들어가자 황궁의 보물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귀한 보물에 이어 정령석까지 발견한 하임은 깜짝 놀랐었다. 이 세상 귀한 물건은 모두 모아놓은 것 같았다. 성검만 빼고.
“어떻게 하지요? 없는데요!”
하임이 먼저 들어가서 성검을 찾지 못하고 나오자, 애가 닳은 미카일은 이번엔 직접 자신이 다녀오기까지 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쩔 수 없지요…….”
체념한 듯 한숨을 내쉰 미카일이 침착하게 말했다.
그 모습에 하임은 의미를 깨닫고 다시 한번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시무시한 주군께 사실대로 보고하는 수밖에.
***
점심때가 되자, 일어난 세 사람은 간단한 식사 후 함께 차를 들기로 했다.
엘리제가 데몬과 마가렛에게 말을 꺼냈다.
“그레이스 왕후 마마의 시종이 다녀갔다고 해요. 제가 잠든 사이에.”
데몬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서 뵙고 오는 길에 시에델의 성녀가 되는 일에 동의를 전하고 올까 하는데요.”
“혹시 급히 결정하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까?”
데몬의 물음에 엘리제가 흠칫했다.
그는 속마음을 읽을지도 모르니 진실은 되뇌지 말자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딱히 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 각하 말씀대로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아서요.”
엘리제가 최선을 다해 침착하게 마가렛이 준 차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데몬은 말이 없었다. 다만 하루 사이 더욱 깊어진 듯한 붉은 눈이 아주 조금 가늘어졌다.
“예, 뜻대로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데몬이 편안해진 얼굴로 웃으며 답했다. 그 모습에 엘리제는 마음을 놓았다.
“그럼 저는 뵈러 갈 준비를 할게요.”
엘리제가 욕실로 들어갔다. 시중을 들러 마가렛이 뒤를 따르려는데, 데몬이 마가렛의 앞을 막아섰다.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예? 아, 아무 일도…….”
마가렛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데몬의 눈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아무 일도 없었는데 엘리제 님께서 거짓말을 하시고 내게 무언가를 숨기신다고?”
“!”
서로 다른 나라에 있었으나 오라비 하임과 마찬가지로 마가렛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경험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