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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입을 더 벌려 (4/126)

4. 입을 더 벌려202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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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9590897435.jpg“찾으셨습니까.”

낮은 이 음성의 주인공을 어릴 적부터 얼마나 시샘했던가. 로안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린 시절부터 다 가진 황태자였음에도 로안은 크레미언가의 장자가 싫었다.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감정은 넣어두어야 했다. 엘리제의 생사가 지금 그에게 달려 있었다.

16549590897439.jpg“하아, 하아…….”

가쁜 숨을 몰아쉬는 엘리제는 아까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여전히 큰 금색 눈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고, 가는 팔과 다리는 계속해서 로안에게서 벗어나려 했다. 엘리제가 대공과 마주하였을 때, 그녀는 고통에서 벗어날 것인가.

16549590897442.jpg‘주술의 주인이 대공이라면…….’

그를 이 자리에서 베어버릴 것이다. 물론 불가능하겠지. 검술도, 마력도 이 나라 최고인 데몬이니까. 로안의 벽안은 진지했다.

16549590897442.jpg‘그렇다 해도, 만약 그가 엘리제를 고통 속에 몰아넣은 자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으리라.’

하지만 대공이 주술의 주인이 아니라면, 엘리제의 주술을 풀어줄 유일한 자이니 절대 감정적으로 대해서는 안 되었다. 로안은 그 짧은 순간 무섭도록 몰아치는 질투와 증오, 분노와 절박을 동시에 느꼈다.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뛰어넘어 간절함이 자리 잡았다. 이 순간, 엘리제의 주술을 푸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16549590897442.jpg“대공.”

로안은 몸을 돌려 크레미언 대공가의 가주 데몬을 마주 보았다. 젊은 미남자의 붉은 눈이 로안을 거쳐 그의 품에서 헐떡이고 있는 엘리제에게 닿았다. 그것만으로도 로안은 엘리제를 빼앗긴 것만 같은 더러운 기분이 들었다. 당장에라도 제 것을 탐하는 듯한 그 음험한 눈빛을 거두라고 명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16549590897442.jpg“엘리제가 주술에 걸린 것 같다.”

16549590897435.jpg“…….”

대공은 말이 없었다.

16549590897442.jpg“그대의 도움이 필요해.”

붉고 강렬한 데몬의 눈이 엘리제의 금안을 주시하였다. 그의 두 눈이 더욱더 붉게 물들었다.

16549590897435.jpg“주술인 것은 맞습니다.”

16549590897442.jpg“풀어 줄 수 있는가?”

네가 건 주술이라면 당연히 풀 수 있겠지. 네가 건 게 아니더라도 너는 풀 수 있어야 할 거야.

16549590897442.jpg‘그렇지 않으면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사랑하는 엘리제를 고통 속에 두는 것도 견딜 수 없었고, 주술로 인해 그녀가 망가져 가는 것을 지켜볼 자신도 없었다. 주술에 걸린 자들은 주인의 쓰임이 다하면 버려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되는 일이었다.

16549590897435.jpg“강력한 주술입니다.”

16549590897442.jpg“그대는 이 나라 최고의 마력을 가졌지 않나.”

지금 풀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로안의 얼굴이 무섭게 변하고 있었다.

16549590897435.jpg“주술을 거는 대가로 주인이 목숨을 사용했습니다.”

16549590897442.jpg“목숨이라고?”

누군가를 죽여서 엘리제에게 주술을 걸었단 말인가. 그 정도로 악랄한 방법을 사용할 자가 누굴까. 게다가 그 정도의 주술이라면 상당한 마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16549590897442.jpg“설마, 데몬 자네…….”

그만큼 잔인하고 강력한 마력을 가진 자가 로안의 눈앞에 있었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이 타오르는 저 악마 같은 대공 말이다.

16549590897442.jpg‘역시 대공과 황후였던 건가!’

진실을 마주할 시간이 왔다. 엘리제에게 주술을 건 것이 대공과 황후일 거라 생각하니 분노로 손이 떨려왔다. 그러고 보니 데몬이 엘리제에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그가 방에 들어온 이후로 그녀는 더는 비명을 지르지 않고 있었다.

16549590897442.jpg“네가 지금 짐을 능멸하는…….”

로안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히려는 순간,

16549590897439.jpg“아악!!!”

16549590897442.jpg“엘리제!”

엘리제의 비명이 다시 시작되었다.

16549590964988.jpg[엘리……제, 아름다운 엘리제.]

16549590897439.jpg“그만! 그만!”

엘리제가 격하게 도리질하며 울부짖었다. 데몬이 주술의 주인이 아니었나? 로안이 다급히 외쳤다.

16549590897442.jpg“데몬! 제발 엘리제를 구해다오!”

그제야 검은 제복을 입은 데몬이 마치 사신과도 같은 모습으로 로안과 엘리제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로안의 품에 안긴 엘리제를 향해 두 손을 뻗었다. 데몬의 크고 거친 두 손이 엘리제의 여린 두 볼을 감쌌다.

16549590897439.jpg“아…….”

울부짖던 엘리제의 금안이 마침내 피처럼 붉은 데몬의 두 눈을 마주했다. 순간 엘리제가 움직임을 멈췄다. 로안이 드디어 품에서 그녀를 내려놓았다.

16549590897435.jpg“입을 더 벌려.”

낮은 음성으로 데몬이 명했다. 그런데 오히려 엘리제가 입을 다물더니 스르륵 데몬의 손에서 그녀의 얼굴이 미끄러져 내렸다. 로안이 비명을 질렀다.

16549590897442.jpg“엘리제!”

정신을 잃고 무너져내리는 그녀를 데몬이 받쳐 안았다.

16549590897442.jpg“데몬!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곁에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로안이 정신을 잃은 엘리제를 빼앗듯 다시 제 품에 안았다. 그녀의 가슴 위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확인한 후에야 로안은 이성을 되찾았다.

16549590897442.jpg“도대체 왜 혼절한 것이냐?”

16549590897435.jpg“보셨으니 아시겠지만, 저는 주술의 주인이 아닙니다. 주술에 걸린 자는 주인의 명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이 맞았다. 데몬이 주술을 건 자였다면 입을 벌리라는 명령에 엘리제는 입을 더 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16549590897435.jpg“그리고 제 마력이 주술보다 강하기 때문에 두 힘이 부딪혀 혼절한 것입니다.”

데몬의 마력이 더 강하니, 이대로라면 데몬이 엘리제에게 걸린 주술을 깨게 될 것이었다. 그래서 주술을 건 이가 그 전에 엘리제를 혼절시켜 버린 것이었다.

16549590897435.jpg“주술의 주인은 매우 영리한 자입니다.”

로안도 그 말에 동의했다. 주술을 깨지 못하게 혼절시켜 버리다니. 누구인지 밝혀내는 것도, 주술을 푸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16549590897442.jpg“하지만 엘리제가 혼절하였어도, 입은 열 수 있지 않은가?”

입을 열어야만 주술을 풀 수 있는 거라면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었다. 데몬이 대답했다.

16549590897435.jpg“주술을 풀기 위해서는 주술을 건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16549590897442.jpg“너는 그 방식을 알 수 있다는 거고?”

16549590897435.jpg“그렇습니다.”

데몬의 눈이 붉은 것은 대대로 크레미언 대공가에 내려오는 강한 마력 때문이었다. 마력을 사용할 때 그들의 눈은 더욱더 붉게 물들었다. 이미 그는 방에 들어온 직후 마력을 통해 주술의 형태와 방식을 파악한 상태였다.

16549590897435.jpg“주변의 모든 이를 물려주십시오.”

대공이 황제에게 요청하고 있었다. 주변 사람 모두를 방 밖으로 내보내 달라고.

16549590897442.jpg‘황궁에 첩자가 있구나!’

로안의 몸에 소름이 돋았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대공이 이번 일의 배후가 아닌 것에 솔직히 감사해야 함을 로안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는 이 남자가 싫지만, 지금 그가 꼭 필요했다. 모두를 물린 후 황제가 입을 열었다.

16549590897442.jpg“엘리제에게 저주를 건 이가 황궁에 있는 것이냐?”

16549590897435.jpg“그것까지 속단하긴 이릅니다. 다만…….”

16549590897442.jpg“무엇이냐?”

16549590897435.jpg“음식을 통해 몸을 지배한 것이 분명합니다.”

16549590897442.jpg“뭐?”

엘리제에게 직접 음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사람, 또는 그것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모두 용의자였다. 그 수가 너무 많았다.

16549590897435.jpg“일단, 주술을 깨기 위해서는 주술이 걸린 방식의 반대로 해야 합니다. 주술이 걸린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면, 반대로 목에서 벗겨내야 주술이 풀립니다.”

16549590897442.jpg“그렇다면 엘리제는?”

16549590897435.jpg“입으로 주술이 들어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입을 벌려 주술을 꺼내야 합니다.”

아, 그래서 입을 벌리라고 했던 것인가?

16549590897442.jpg“그렇다면 내가 엘리제의 입을 벌릴 테니 자네가 그사이 주술을 꺼내면 되지 않는가?”

하지만 그것은 비유일 뿐이지, 실제 주술을 푸는 것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16549590897435.jpg“물건에 주술이 담겼을 때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몸 안에 주술이 담겼을 때는 그냥 꺼내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16549590897442.jpg“그럼, 대체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아까부터 데몬이 빙빙 돌려 말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게 로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16549590897435.jpg“신체적인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16549590897442.jpg“접촉?”

이거였구나. 네가 즉시 답을 말하지 못한 이유가.

16549590897435.jpg“이 경우 입맞춤이 주술을 푸는 방식입니다.”

듣고 싶지 않았던 대답이 마침내 로안에게 들렸다. 분노와 경악으로 두 눈이 열렸다.

16549590897442.jpg“그러니까, 지금…… 내 엘리제에게 네가 입맞춤을 하면 주술이 풀린다는 말이냐?”

16549590897435.jpg“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강력한 주술이라고.”

분노로 떨리는 로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16549590897442.jpg“그 뜻은…….”

16549590897435.jpg“한 번의 입맞춤으로 끝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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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안은 그만 손에 힘이 탁 풀려버렸다. 과연 주술을 건 이는 영악했다. 음식을 통해 들어간 주술은 이미 엘리제의 몸 안에 담겨버렸다. 형체가 있는 물건에 담긴 주술은 물건을 파괴하거나 꺼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엘리제가 먹은 주술은 이미 그녀의 몸에 흡수된 상태였다. 그러니, 파괴하거나 꺼낼 수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주술을 깰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자가 입맞춤을 통해 주술을 흡수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조금씩. 하나뿐인 애첩이 자신 외의 사람과 입맞춤하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 있을까? 그것도 로안이 평생을 질투하고 시샘해 온 데몬이 엘리제와 입맞춤 할 대상이라면? 절대 허락할 리 없을 것이다. 그러니 황제 로안은,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엘리제가 다른 사람의 품에서 입맞춤하는 것을 지켜보든지, 그녀가 주술 속에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로안에게 지독히도 잔인한 형벌이었다. 주술을 건 이는 로안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로안에게 가장 가혹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그게 누구일까…….

16549590897442.jpg‘엘리제를 죽음으로 몰아 넣어가며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자라.’

반드시 찾아서 찢어 죽여주마. 로안의 푸른 눈이 분노와 오기로 가득 찼다.

16549590897442.jpg“데몬, 정녕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냐?”

16549590897435.jpg“없습니다. 게다가 미리 알고 계셔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알고 있어야 할 것? 분노하는 로안의 옆에서 데몬이 말을 이었다.

16549590897435.jpg“주술을 푸는 대가(代價)가 상당히 큽니다.”

16549590897442.jpg“무슨 말이냐! 입맞춤이면 된다지 않았느냐!”

로안은 더는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엘리제를 구할 유일한 마력만 아니었다면 당장에 대공을 눈앞에서 치워버렸을 거다.

16549590897435.jpg“입맞춤은 대가가 아니라, 주술을 푸는 방법입니다.”

16549590897442.jpg“그럼 대가는…….”

16549590897435.jpg“제 막대한 마력이 손상될 것입니다.”

16549590897442.jpg“!”

16549590897435.jpg“엘리제 님은 폐하의 소중한 분이지, 제게는 그 정도의 손실을 감당할 만큼의 존재가 아닙니다.”

데몬은 지금 엘리제의 주술을 풀어줄 황국의 유일한 존재다. 그런데 그가 막대한 손해를 감당하며 주술을 풀어줄 이유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데몬의 입장에서는 타당했으나 로안에게는 날벼락 같은 말이었다.

16549590897442.jpg‘엘리제에게 입맞춤을 명하기도 싫은데, 데몬의 눈치까지 보며 주술을 풀어달라 사정해야 할 참이라니!’

로안은 속이 타들어 갈 지경이었다. 데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데몬이 크레미언 대공으로 가진 마력은 곧 대공가의 힘 그 자체이자, 황국의 강력한 전투력이었다. 대공의 마력이 크게 손상을 입게 된다면, 나라 안팎의 적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공격당할 수 있었다.

16549590897442.jpg‘젠장!’

엘리제의 목숨을 걸고, 로안은 황국과 대공가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다. *** 데몬은 황제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문 크레미언 대공가에 있던 하녀 엘리제. 그녀는 분명 대공가에서도 유명한 미인이었다. 데몬도 소문을 들어 그녀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제법 의미가 생긴 하녀였다. 그녀는 이전부터 데몬이 되찾아 오려던 사람이니까. 방금 로안에게는 손실을 감당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라 말했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황제가 빼앗아 가듯 데려간 가문의 사람이다.

16549590897435.jpg‘내가 대공가에 있었다면 절대 데려가지 못하게 했겠지.’

자신의 탓이 아니라 해도 지켜주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엘리제는 황제의 애첩 자리를 거부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지금 엘리제의 마음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에게는 엘리제를 되돌려 받을 명분과 이유가 있었다. 그녀를 데려가는 과정에서 가주인 자신과 그녀의 의사가 무시되었다. 게다가 지금 로안의 품에 안긴 엘리제를 직접 보자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엘리제뿐 아니라 대공가의 그 무엇도 황가에게 빼앗기기 싫다.

16549590897435.jpg‘이번 일을 계기로 엘리제를 다시 찾아와야겠다.’

그녀가 이미 로안의 첩이 된 것을 당장 어쩔 수는 없으나 우선 주술을 풀기 위해서도, 그녀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대공가로 데려가는 것이 먼저다. 데몬의 붉은 눈이 그도 알 수 없는 욕망으로 더욱더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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