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69화 (269/275)

269. 가상 격투장

진성이로 다시 태어난 연이 의식을 찾았을 때 귀에 쏙 들어온 말이 있었다.

그건 바로 '조선전력공사'였다.

'야코프의 이론이 옳았군.'

야코프는 자신의 이론이 확실하다고 했지만, 장담하지 않았다.

천생 과학자인 그였기에 결과를 보지 않고 결론을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증명할 수 없는 이론은 진리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가 사는 우주에서 모든 것의 기준은 빛이야. 1초에 30만km나 이동하는 빛은 시간과 공간의 기준이지. 그런데 이 빛과 시간이 만들어내는 시공간은 무조건 직진만 해.'

'그럼 미래가 같은 우주일 확률이 높은 거 아냐?'

'내 이론에 따르면 거의 99.99%야. 하지만 가보지 않고서는 장담할 수 없어.'

100% 장담하지 않았던 야코프의 이론은 '조선전력공사'란 말 한마디로 증명되었다.

다른 우주로 갈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다른 우주에는 조선전력공사가 존재하진 않을 테니까.

연은 그동안 어떻게 세상이 변했는지 알아보려 했다.

전과 다르게 같은 우주의 미래에서 다시 태어났다고 확신했기에 그런 거였는데 문제가 있었다.

전처럼 눈조차 뜰 수 없는 아기였던 거다.

'하···, 미치겠네.'

한번 겪은 일이기에 더 힘들었다.

전에 테크트리를 수도 없이 짜고 개선하는 짓을 했던 이유도 이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해야 한다니 미칠 것만 같았다.

'견뎌야 해. 이곳에서 내 지식은 쓸모없어.'

심심함을 견디지 못하고 뭐라도 할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그런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간간이 들려오는 방송과 부모님의 대화에서 유추해본 세상은 연이 알고 있던 지식은 유물이나 다름없었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세상은 경이로울 정도로 변했다.

사람 사는 거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환경 자체가 완전히 달라졌다.

'일기예보가 아니라 일기 안내라···.'

핵융합 발전으로 무한한 에너지원을 얻은 인류는 자연을 정복했고, 자연은 인류에게 굴복했다.

더는 이상기온이나 갑자기 변해버린 날씨로 고통받는 지역은 조선 영토에서는 없었다.

인류는 날씨조차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한 거다.

아직도 건재(健在)한 은동리에서 이 모든 기술을 개발했다니 연은 무척이나 뿌듯했다.

자신이 만든 조선 제국과 조선전력공사가 자신이 남긴 뜻에 벗어나지 않고,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자랑스러웠다.

'그럼 이제 즐겨야지.'

연은 문식이와 야코프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번 생은 평범하게 살면서 세상을 즐기기로 했다.

전처럼 세상을 바꾸려고 노력할 필요도, 연구소에 처박혀 사는 짓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남들처럼 유치원도 다니고, 초등학교도 다니고, 고등학교도 다니고, 성인 교육대까지 다녀야지.'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연에게는 평범하게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30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지만, 교육제도는 변한 게 없었다.

아직도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는 예절교육을 가장 중요하게 다뤘다.

고등학교도 다르지 않았다.

바뀐 과목은 있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초기 교육 이념은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대학교는 많이 달라졌다.

학문에 뜻이 있는 사람은 늦은 나이에도 대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다 보니 대학교는 더는 젊음과 낭만의 장소가 아니었다.

넘칠 정도로 풍요로운 세상에서 수명까지 길어졌다.

그래서인지 나이에 상관없이 배움의 길로 들어선 이들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교수가 학생으로 수업을 받고, 학생이 교수로 강의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대학교 안에서는 누가 교수이고, 누가 학생인지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평생 공부만 하고 사는 사람도 많았다.

교육에 관련된 모든 것은 황실에서 무한정 지원해 줬기에 그런 거였다.

풍요로운 만큼 욕심을 내지 않고 예의를 지켰기에 조선 전역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곳도 많았다.

대표적인 곳이 중원이었다.

시대의 흐름을 파악한 현안이 있었던 정성공이 세운 대명은 중원에서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5호 16국, 춘추전국시대를 능가할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진 중원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도 처음부터 조선의 우방국이었던 대명은 굳건하게 자리 잡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백성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비리를 잡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지.'

남을 속여 이득을 보는 행위를 영웅시했던 중원 사람들.

제 버릇 버리지 못했다.

그들은 비리를 비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남을 속여 이득을 얻는 자신들이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들이 하는 말이 있었다.

'우리는 같은 고향 출신 아닌가?'

'좋은 게 좋은 거야.'

'꽌시(关系) 없이 어떻게 살려고 하나?'

'우리만 잘살면 되지, 남은 왜 생각 하나?'

서로 주고받는 관계야말로 최고라고 생각했던 그들이기에 비리를 저질러도 꽌시가 있다면 못 본 체하기 일쑤였다.

가기의방(可欺宜方)을 따랐기에 그럴듯한 방법으로 남을 속이는 짓도 거침없었다.

가렴주구(苛斂誅求)까지 등장하여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고 백성들의 재물을 빼앗고 괴롭혔다.

그러다 보니 30여 개국으로 분리된 중원의 소국들이 삐걱거렸다.

중원의 유일한 대국인 대명 또한 무너졌다.

조선의 원조가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원조가 들어오면 모두 비리로 얼룩진 관리들과 기업인들의 차지가 되었으니 그럴 수밖에.

결국 조선은 중원에 원조는 물론 국교까지 단절해버렸다.

조선이 제시한 우방국 조건에 따르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로 인해 중원 사람들은 아직도 낙후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그와 달리 조선은 비리에 자비가 없었다.

'잘했군! 정말 잘했어.'

연이 떠난 후에도 조선은 변함없이 발전했다.

연이 남긴 수많은 책자 덕분이었다.

연이 떠난 후에 보라고 했던 마지막 책자에 쓰인 첫 문장.

'황실은 가장으로서 노력해야 한다.'

도리(道理)에 관한 거였다.

연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의미를 달리 해석했다.

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분리하지 않고 동일시 본 거였다.

'백성에게 기대하지 마라. 백성은 자식이나 마찬가지니 돌봐야 하는 대상이다.'

연은 절대 백성에게 기대하지 말라고 했다.

기대하다 실망하면 어찌 될지 알 수 없기에 그런 거였는데, 다행히도 후손들은 그 뜻을 좋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강하게 나갈 때는 거침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썩으면 도려내야 한다. 그대로 놔둬서는 절대 안 된다.'

연이 떠난 후, 100여 년이 지났을 때.

대대적인 처형식이 있었다.

지켜만 보던 황실 위원회에서 나선 거였다.

'진실을 알려야 할 언론이 이익을 위해 선택적 기사만 쓰다니, 이는 사기다.'

조선에서 가장 무서운 죄는 '사기'였기에 이에 연루된 800여 명이 넘은 언론인과 기업인, 정치인들이 공개적으로 처형됐다.

서로 짜고 주가를 올리고 특정 기업과 정치인을 옹호하다가 적발된 거였다.

그들의 작태를 지켜만 보던 조선 황실은 조서원의 최종 보고서를 받자마자 냉엄한 사법의 칼을 휘둘렀다.

그동안 잘못되었다고 생각한 일들이 모두 그들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안 백성들의 절대적인 지지도 있었기에 자비는 없었다.

조선 정부와 정치인들은 단 한마디 말도 꺼내지 않고, 암묵적인 지지를 보냈다.

외교와 사법은 황실 위원회에서 관리하고 있기에 무서워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정치인의 숙명인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아직도 조선의 사법 제도는 검사나 판사 따위가 없었다.

오직 판관만 있을 뿐이다.

민사든 형사든 경찰서에 사건을 접수하면 경찰은 경중을 따지지 않고 순서대로 조사해야 했고, 그 내용은 법무원에 넘겨졌다.

판관들은 사건을 검토했고, 그에 따른 처벌을 내렸다.

이때 희비가 엇갈렸다.

무고(誣告)라고 밝혀지면, 고발자가 두 배에 달하는 벌을 대신 받았기에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가끔 그런 결과가 나오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언론에서 대서특필했고, 한동안 저잣거리에서 회자 됐다.

이처럼 황실이 연의 뜻대로 가장으로써 확실히 했기에 조선은 지금까지 태양계의 유일한 제국으로서 그 위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위상을 탐내는 나라가 있었다.

지팡구 왕국이었다.

조선인처럼 예맥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지팡구인들.

조선인보다 더 조선인처럼 행세했다.

그런 대도 조선 황실은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처음 살았던 세상 같군.'

조선 황실은 친일파 매국노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팡구 정치인들이 그랬기에 모른 체하고 있었던 거다.

지팡구 왕국에서 친조파(親朝派)라 부르는 정치인들은 대놓고 조선을 찬양했다.

'위대한 대조선 제국을 섬기고 따르는 것이 우리 지팡구 왕국이 나가야 할 길입니다.'

두 번이나 왜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역사가 있는 그들은 그 누구보다 조선을 따르고 섬겼다.

조선인을 보면 같은 예맥족이라 말하며 잘 보이려 노력했고, 친하게 지내자며 아양까지 떨었다.

그런다고 조선의 위상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따지지 않고 시키는 대로 일 잘하는 열도인들이 세운 지팡구 왕국은 고심 끝에 자신들이 잘하는 것을 찾았다.

검도였다.

비리로 얼룩져 망해버린 나라들을 제쳐놓으면. 풍요를 바탕으로 한 세상은 평화로웠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격투장을 만들어 놓고 개인 간 분쟁을 해결하라고 했지만, 이 또한 문제가 대두됐다.

핵산(DNA, RNA)을 이용한 의료 기술의 발달로 사람마다 능력치가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운동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정상적인 경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 간 능력치가 달라지자 가장 인기 있는 프로축구도 시들해졌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가상 경기장이었다.

가상 경기장에서는 개인 능력치가 모두 같았다.

이기기 위해서는 빠른 판단력만 필요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열광했다.

추종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발달한 기계 문명.

장비만 착용하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동등한 힘을 부여했기에 새삼스러운 상황이 아니었다.

가상 경기장에서는 프로게이머처럼 판단력에 의한 능력이 경기의 승패를 좌우하게 된 거였다.

이를 눈여겨보고 있던 지팡구 왕국은 가상 격투장을 제안했다.

그러지 않아도 쓸모없어진 격투장 때문에 고민하던 조선은 이를 받아들였다.

조선 정부는 은동리에 정식으로 가상 격투장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있었다.

처음 가상 격투장을 제안한 지팡구 왕국에서 검도 대회용 격투장을 먼저 만들어 달라고 한 것이다.

'우리가 제일 먼저 제안했지만, 그 권리를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우리 지팡구 왕국에서 제일 인기 있는 검도 대회를 바탕으로 먼저 만들어 주십시오.'

신의 한 수였다.

다치거나 죽을 일은 없지만, 피가 난무하는 가상 검도 대회를 본 사람들은 열광했고, 가상 프로축구에 이어 가장 인기 있는 대회가 되었다.

또한 가상 격투장에서 가장 먼저 열린 경기였기에 선점 효과를 톡톡히 봤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검도 대회는 단일 경기로서는 엄청난 상금이 걸렸고, 그 인기는 갈수록 높아져만 갔다.

진성이가 된 연이 검도 대회에 출전한 이유도 막대한 상금이 걸려 있기에 그런 거였다.

호역 검도 대회의 우승상금이 무려 백만 원(약 10억 원)이나 되었기에 당장 돈이 필요한 진성이는 축구를 포기하고 검도 대회에 나갔다.

약속한 사이트에 접속조차 하지 않은 문식이와 야코프를 찾기 위해서는 많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진성이는 영원한 조선 제일검이라 찬양받는 검수로부터 배우 검술이 있기에 자신 있었고,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에서 우승했다.

평생을 검에 바친 검수의 검술이 가상 공간에서도 통했던 거다.

진성이는 이 상금으로 야코프의 공식에서 문제점을 알아냈다.

상금으로 받은 돈을 모두 써야만 했지만, 인류가 만든 최고의 양자 컴퓨터라는 세종 서버는 원인과 문제점을 찾아냈다.

'기억 상실증과 같은 거란 말이지.'

진성이는 눈썹을 치켜들고 달려드는 지팡구 왕국의 제일검이자 세계 대회 우승자의 긴 칼끝을 쳐내며 발끝에 힘을 주고 몸을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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