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68화 (268/275)

268. 새로운 시작

조선 제국력 399년(2057) 12월 31일.

한 청년이 '물길판'이라 부르는 서핑보드를 타고 파도가 심한 바다 위를 거침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이야호!"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파도타기를 즐기던 청년.

끈질기게 추적해온 파도에 잡혀 거품과 함께 바닷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그런데도 껄껄 웃으며 환호성을 지르는 청년.

그의 머리에는 투명한 둥근 통이 쓰여있었다.

터벅거리며 해변으로 걸어 나온 청년.

양어깨를 번갈아 툭툭 털었다.

그러자 전신 수용복에 가득 묻은 물기가 미끄러지며 모두 땅에 떨어졌다.

청년은 머리 보호구를 벗더니 해변에 놓여있는 탄산음료를 그대로 들이켰다.

"카···!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이지!"

아무도 없는 해변에서 혼자 놀던 청년은 물길판에 올라타더니 미끄러지듯 모래밭을 날아갔다.

-마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연결할까요?

"응, 연결해줘."

청년의 왼쪽 눈에 화면이 켜지고 아리따운 여인이 나타났다.

-진성아! 뭐 하고 있는 거야? 빨리 오지 않고. 오늘 저녁에 생방송 면담(Interview)과 경기 있는 것 몰라?

"에이···. 엄마! 내가 하기 싫다고 했잖아요."

-왜! 세상에 너를 알릴 기회인데?

"전 그냥 조용히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그러는 애가 검도 대회는 왜 나갔니?

"그거야 상금이 탐나서 그런 거잖아요."

-헛소리 말고 빨리 집에 오렴. 방송국에 가려면 서둘러야 해.

"알았어요."

이제 하루만 지나면 20세가 되는 진성이는 성인 교육대를 퇴소한 후 고향에 돌아와 한량처럼 지내고 있다.

성인 교육대를 퇴소하면 대부분 여행을 떠나지만, 진성이는 그러지 않았다.

교육대에 가기 전에 쓰던 판타지 소설을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독자들의 반응은 별로였지만, 누군가 보고 연락하길 바라며 쓴 소설이라 깔끔하게 끝냈다.

그런데도 오길 바랐던 연락은 없었다.

"문식이와 야코프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진성이로 다시 태어난 연은 누리넷에 접속한 후 약속했던 사이트에서 기다렸지만, 둘 다 오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 진성이는 기억을 점검한 후 한가지 가설을 내렸다.

'야코프가 계산을 잘못한 게 틀림없어.'

진성이가 생각하기에 야코프가 새로 만든 시공간 이동장치는 일인용이었다.

그런데 야코프와 문식이가 함께 사용했으니.

'젠장! 허당이네. 허당이야.'

아무리 생각해도 야코프가 가장 단순한 것을 놓친 것 같았다.

'처음에도 그러더니···, 젠장.'

소형원자로와 핵융합 발전기를 개발하여 인류의 문명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야코프다.

하지만 수학 문제를 풀턴 때와 달리 일상생활은 완벽하지 않았다.

나사(螺絲, Bolt) 하나가 빠진 것처럼 허둥대기 일쑤였다.

양순이가 아니었다면 영화에서나 나오는 박사처럼 엉망인 채로 살았을 게 틀림없었다.

어린 진성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자신의 실력으론 야코프가 만들어 놓은 공식을 이해하기조차 어려웠기에 포길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뜻밖의 길을 찾았다.

조선전력공사가 운영하는 인공지능 서버인 '세종'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용 비용이 엄청났다.

무지막지한 처리능력을 지닌 세종 서버는 일반인이라도 사고를 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래서 무분별한 접근을 막으려고 일부러 비싼 가격을 책정해 놓은 거다.

초등학생을 막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한 진성이는 그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출전 했던 검도 대회였는데.

"내가 우승할지 몰랐지."

우승 상금이 탐 나서 출전했지만, 막상 우승하자 놀랍기만 했다.

게다가 그 일로 인해 평온했던 생활이 깨져 버렸다.

진성이를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가 생긴 거다.

어느새 집에 도착한 진성이는 집 앞 잔디밭에 물길판을 던져 놓고 집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엄마! 저 왔어요."

"오, 빨리 왔네. 어디 보자 우리 잘생긴 아들."

"엄마까지 왜 이러세요. 전 이런 관심 싫다고 했잖아요."

"왜? 우리 마을 최고 미남이자 호역 제일검인데 관심은 당연한 거 아냐?"

"에이. 싫다고요. 요즘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데 아빠는요?"

"곧 들어오실 거다. 이것 좀 식탁에 올려 줄래?"

"알았어요. 전 좀 씻을게요."

전신 수영복과 머리 보호구 덕분에 몸에 물 한 방울 묻지 않았지만, 흘린 땀이 있기에 진성이는 욕실로 들어갔다.

1분이면 온몸을 씻을 수 있는 간편 목욕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집이지만, 진성이는 그러지 않았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는 거야말로 인생을 즐기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똑똑!

"네!"

"아빠 왔다. 빨리 나오렴."

"네."

진성이가 나오자 진성이 아빠가 방긋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오, 우리 아들 오늘 아주 멋진데. 오늘 밤이 지나면 이제 우리 아들 못 보는 것 아냐?"

"그럴 리가요? 전 이곳에서 엄마 아빠랑 사는 게 좋아요."

"나도 너 할머니에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진짜라고요."

"하하, 어서 먹자. 빨리 먹고 가야지."

아직 해가 지지 않았지만, 서둘러 저녁을 먹었다.

곧 있으면 엄마가 승낙해버린 생방송 면담과 경기가 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세기말을 축하하기 위해 이곳 화성에서도 축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구에 계신 시청자분들도 함께 축하해 주십시오.

-또한 우리에게 이런 삶을 살 수 있도록 제공해주신 폐하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보! 밥 먹을 땐 만물상자를 켜지 말라고 했잖아요?"

"미안, 미안."

진성이 아빠는 손을 내저어 허공에 표신 된 입체화면을 껐다.

"그런데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야."

"말해서 뭐 해요. 이렇게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게 다 저분들 덕분이잖아요."

진성이 엄마는 장식장에 놓여있는 동상들을 보며 커피를 마셨다.

이제는 저녁에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자는 데 지장 없었다.

수백 년 동안 묘하게 발달한 의료기술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침대 위에 달린 건강 센서가 수면에 들도록 유도하고 최적의 생체리듬을 만들어 준다.

몸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과음을 해도 하룻밤 푹 자고 나면 말끔히 회복된다.

그래서인지 술 판매량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었다.

연이 떠난 후 화성에 이어 태양계를 모두 정복한 인류지만, 먹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자원을 얻기 위해 소행성에 사는 사람도 먹는 것은 예전 그대로였다.

이제는 우주에서도 재배실에서 채소를 키우고 합성으로 고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요리만큼은 로봇을 시키지 않고 직접 하는 게 문화였다.

풍요로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인 것 같지만, 법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지 않아도 발달한 기계문명.

사람이 해도 될 일까지 로봇에 맡겼다.

그러다 보니 일자리가 줄어만 갔고, 사람들은 게을러지고 있었다.

낙천을 넘어 나태해져만 가는 인류를 보다 못해 조선 제국 황실 위원회에서 나섰다.

'앞으로 모든 요식업소는 사람이 직접 만든 음식만 판매하도록 한다. 또한 가정에서도 직접 요리하는 것을 권장한다.'

백성들의 삶에 나선 적이 없던 황실의 첫 번째 명령이 황당하기만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환호했다.

뭐라도 하고 싶었지만, 할 일이 없었는데, 황실 위원회에서 공식으로 명령이 떨어지자 이제 할 일을 찾았다고 좋아했다.

사람들은 다시 일자리를 찾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설렁하기만 했던 식당들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로봇이 아닌 감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진짜 사람이 응대하기에 웃음꽃도 활짝 피웠다.

너무나 풍요로웠기에 생기를 잃어갔던 인류가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이다.

"그나저나 자신 있어?"

"뭐가요?"

"지팡구 왕국의 제일검이랑 오늘 경기 있잖아? 내가 보기엔 만만치 않던 데."

"여보!"

"왜?"

"우리 진성이는 호역 제일검이라고요. 그까짓 지팡구 제일검과 비교하지 말아요."

"어, 미안. 앞으로 안 할게."

진성이는 항상 혼나는 아빠를 보고 쿡쿡 웃었다.

"아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이길 테니까요."

"고맙구나. 역시 이 아빠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우리 진성이뿐이구나."

이른 저녁을 먹고 난 진성이네는 무인으로 운행되는 공용차를 불러 타고 방송국으로 향했다.

* * *

방송국에 도착한 진성이는 깜짝 놀랐다.

자신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 광자(狂者, Big Fan)들이 이렇게나 많을 줄은 몰랐던 거다.

"우리 진성이 인기는 역시구나. 이 엄마는 무척이나 자랑스럽단다."

"전에는 빗자루로 애들을 모두 쫓아내고 선···."

진성이 아빠는 엄마의 매서운 눈초리에 말을 얼버무렸다.

"아, 미안. 그때 일이 생각나서. 그때 얼마나 웃겼는지 알아? 진성아, 너도 들었어야 했는데. 마귀할멈이 뭐냐? 킄!"

"여보!"

진성이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일부러 그런 것 같았다.

엄마가 저혈압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기에 일부러 화를 돋구려 하는 것 같았다.

묘하게 발달한 의학 기술로 고혈압은 바로 치료되지만, 저혈압은 아직도 단숨에 치료할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치료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인공 심장으로 교체하든지 핵산(核酸, DNA) 치료를 받으면 되지만, 엄마는 원하지 않았다.

최대한 '자연 인간'으로 살고 싶다는 소망이 있기에 그런 거였다.

진성이는 응접실처럼 꾸며 놓은 촬영실에서 면담을 시작했다.

"우리 호역의 자랑이자 초등부 축구 최고의 공격수였던 고진성 호역 제일검을 모시겠습니다.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고진성이라 합니다."

"갑자기 검도 대회에 나간다고 하자 많은 소녀가 실망을 금치 못했는데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축구를 그만두고 검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상금이 탐났거든요. 사고 싶은 게 있었는데 그 방법 말고는 없었어요."

"정말입니까? 축구를 계속했어도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건데···."

"제 검 끝은 상대를 속일지라도 제 입은 속이지 않습니다."

진행자는 믿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진성이는 나이답지 않게 진행자의 질문에 거침없이 응대했다.

은동리의 연구원들에 비하면 질문이라 할 수 없는 정도이기에 긴장조차 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오늘 자신 있습니까?"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안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있지만, 대보기 전에 장담할 순 없습니다."

"네, 오늘 면담 감사합니다. 꼭 이겨서 우리 호역을 빛내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면담을 끝낸 진성이는 주먹을 쥐고 흔들며 힘을 내라는 엄마를 보고 활짝 미소 지었다.

세 번째 맞이하는 생이지만, 엄마라는 존재는 언제나 포근하고, 힘이 되었다.

방송국에서 준비한 가상 경기장으로 들어간 진성이는 검수에게 배운 대로 심호흡을 하면 상대를 기다렸다.

태양계 전역으로 생중계되는 이번 검도 대결은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 특별히 준비된 이벤트이다.

열도 출신들이 세운 지팡구 왕국이 거의 모든 검도 대회를 휩쓸고 있을 때.

혜성처럼 나타난 진성이로 인해 열도검을 배우던 이들이 무참히 쓰러져 나갔다.

가상 격투장에서 열린 경기였기에 그 충격은 엄청났다.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피가 난무하는 잔인함이 그대로 전해졌기에 단숨에 몸을 가르는 진성이의 검은 경악을 불러일으켰다.

추종자만 배우던 검도가 이처럼 유행한 이유가 바로 잔인함 때문이었다.

그런데 진성이의 검은 그 잔인함을 넘어 호쾌함을 선사했다.

그러니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감고 있던 진성이가 고개를 들고 눈을 떴다.

준비가 끝난 것이다.

가상 격투장에서 하는 대결이기에 진검승부나 다름없는 검도 대회.

일말(一抹)의 판단 실수도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진성이는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허리에 차고 있는 가상 검을 꺼내 들었다.

'문식아, 꼭 보고 연락해.'

진성이는 그동안 쓰지 않았던 검수의 필살기를 준비했다.

지팡구 제일검이자 세계 순위 1위인 상대를 단숨에 이기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다.

문식이가 극찬했기에 알아보길 바라며 꺼내 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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