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조선전력공사-264화 (264/275)

264. 황제와 연인들의 산책로

문식이와 야코프를 떠나보낸 후 연은 앓아 누었다.

상실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동안 발달한 통신이 있기에 외롭지 않았다.

답답하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문식이와 야코프에게 수시로 연락했다.

그들이라면 마음 편히 속내를 모두 털어놓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다.

하지만 이제 더는 이 세상에 그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마음에 이어 몸이 느꼈는지 연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쓰러졌다.

한동안 연은 경복궁에서 기거했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도 허전했기에 가족과 함께 지내고 싶었던 거다.

"폐하, 옥체는 좀 어떠신지요?"

연은 유일한 반려자이자 사랑하는 연인인 태황후의 물음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생각 같아서는 태황후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 싶었지만, 그럴 기운도 없었다.

"나는 이제 괜찮소. 그나저나 그대의 안색이···."

"폐하께서 일어나실 수만 있다면 제 안색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태황후는 작고 주름진 손으로 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무척이나 소중한 것을 만지듯이 아주 조심스럽게.

연은 그런 태황후를 보고 힘을 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시오. 당신이 떠나기 전에 난 절대 먼저 가지 않을 테니."

"폐하···!"

자신의 품에 뛰어든 태황후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연은 그런 태황후가 안쓰러워 꼭 안고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사랑하오."

"저도요."

어린 나이에 태자비가 된 태황후는 무척이나 연을 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신에게 세상의 이치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항상 웃는 낯으로 말해주던 연은 내명부의 요청에도 후궁조차 두지 않았다.

오직 자신과 함께 세상을 둘러보며 지아비의 도리와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떨어져 지낸 적도 많았지만, 외롭지 않았다.

연이 들려준 신기한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그걸 그림으로 그리면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태황후는 자식들이 많았기에 그들을 돌보느라 연에게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하지만 연은 그러지 않았다.

돌아온 연은 항상 뭔가를 들고 왔다.

'이건 서역에서 유행하는 것이라 하오. 그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소.'

'이건 열도에서 가져온 편백으로 만든 욕조라오. 그대처럼 싱그러운 향기가 나는 것이라 특별히 주문해서 가져온 것이오.'

'이건 준가르 왕국에서 보낸 온 것이오. 이처럼 커다란 금강석(金剛石, Diamond)은 나도 처음 보는 것이오.'

'이건 프랑스에서 보내온 최상품 와인인데, 내명부 어른들에게도 나눠주시오.'

태황후는 그런 연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좋고 귀한 것은 모두 황제가 차지한다고 들었는데 연은 그러지 않았다.

좋고 귀한 것일수록 연은 그것을 자신에게 먼저 주었다.

그로 인해 내명부에서 말이 많았지만, 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 그렇다면, 그대가 전해주면 되겠구려.'

태황후는 연이 왜 이런지 나중에서야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주려고 했던 것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 한때는 원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의 눈길이 달라지자 연이 행 한 모든 것이 이해됐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다오. 하지만 주인이 돌보는 강아지는 그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소. 그렇다고 내가 주인이고 그대가 강아지라는 말은 아니오. 그대는 나는 같소. 내가 그대이고 그대가 나이니 내가 그대에게 행한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이자 그대를 위한 것이오.'

이런 남정네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도 다정한 자신의 부군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꼬르륵!

"폐하!"

"하하, 그대가 오니 내 배꼽시계가 밥을 달라고 요동치는구려."

그날 이후 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침 일찍 일어나 태황후와 함께 식사를 하고 산책에 나섰다.

경복궁 뒷산인 북한산 백악정까지 이어진 길을 산책하면서 흐트러진 마음과 망가진 몸을 다시 바로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참 신기하오. 매일 오는 길인데 올 때마다 모습이 변하는구려."

연의 말에 태황후를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이 길은 훤이 주도해서 정비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꽃들은 명화와 명선, 명혜, 명안이 단장한 것이옵니다."

"아, 그렇소?"

"네, 폐하."

연이 태황후와 함께 경복궁 뒷산을 산책한다는 말에 자식들이 나선 거였다.

훗날 이 길은 '황제의 산책로'라 명명된다.

몸을 추스른 연은 다시 은동리로 돌아갔다.

태황후도 따라가고 싶어 했지만, 연이 말렸다.

"내가 주말마다 찾아올 거니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소."

너무나 다른 세상인 은동리가 싫다는 태황후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연은 자신이 대신 수고하기로 했다.

갈수록 늘어나는 손주들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은동리로 돌아온 연은 연구에 몰두했다.

야코프가 떠나기 전에 남긴 양자 얽힘을 이용한 양자통신을 완성하기 위해.

* * *

세상을 크게 바꾸었다는 문식이와 야코프라는 두 거인이 사라졌지만,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경강을 정비했지만, 장마철처럼 비가 많이 오면 물에 잠기던 모래섬인 여의도에 동쪽에 이어 서쪽에도 핵융합 발전소가 세워졌다.

한 개의 핵융합 발전소만 해도 한양 전체에 전력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지만, 비상시를 대비해 여유분으로 만들어 놓은 거다.

여의도 정 중앙.

끝에서 끝까지의 길이가 500m나 되는 오각형 모양으로 쌓아 올린 성지가 있었다.

이를 따라 조성된 공원을 걷던 두 사람은 단단한 화강암으로 된 벽면을 어루만지더니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너 그거 알아?"

"뭘 또?"

"세상에서 세 번째로 위대한 과학자인 야코프 선생님은 돌아가신 게 아니래."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분명 여기 여의도 성지에 안주(安住)하셨다고 공식으로 발표되었는데."

"나도 알아. 그런데 왜 아파치 왕국의 제로니모 왕께서도 함께 여의도 성지에 안주하셨을까?"

"그야 폐하와 친하셔서 그런 것 아냐?"

"아무리 친하다고 자신의 왕국을 두고 이곳에 묻히셨을까? 이상하지 않아?"

"흠, 좀 이상하긴 한데. 그래도 제로니모 왕께서는 조선의 문학에 심취(心醉)하셨으니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냐?"

말년에 문식이는 수많은 저서를 남겼다.

주로 역사에 관한 내용이었지만, 마지막에 쓴 3권의 책은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에 관한 내용이었다.

과학과 기술로는 풀 수 없는 인간적인 삶에 관한 그의 철학이 모두 집대성(集大成)되었다고 평가하는 '홍익 조선'이란 그의 저서는 어마어마한 판매량을 기록했고, 수많은 학자들을 연구에 몰두하게 했다.

"그렇다 해도 신처럼 떠받드는 아파치 왕국을 두고 이곳 여의도 성지에 묻힌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흠···, 그건 좀 이상한데."

의심은 의문을 낳고, 의문은 이론이 되어갔다.

그래서인지 여의도 성지를 찾아 벽면을 어루만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뭔가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나선 거였다.

그런데 훗날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달라는 '연인들의 산책로'가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철학자인 제로니모.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두 번째와 세 번째 과학자인 연과 야코프가 묻힌 곳이라 그 기를 받아 똑똑하고 현명한 자식을 달라는 소망에서 출발했던 거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성지 입구로 들어가는 문을 발견하지 못했다.

* * *

은동리 남쪽.

해발 433m인 천장산 정상에는 거대한 위성 안테나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런 위성 안테나는 지구의 경도와 위도의 기준인 백령도 용기포를 따라 지구 전역에 건설됐다.

조선 통신 규약 1과 2에 이어 3이 발표되면서 위성 통신을 이용한 통신망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세상은 참 묘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석기 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바로 넘어간 짐바브웨처럼 철기시대에서 전기시대로 바로 넘어갔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

예맥 북로를 따라 건설된 도시 중 하나인 울란바토르에서 사는 아무르는 친구인 명식이를 보고 소리를 질렀다.

"명식아! 지금 뭐 하는 짓이야?"

"보면 몰라? 이걸로 못된 곰탱이들을 다 조져 놓을 거야."

"뭐라고? 곰들이 철망을 넘어오면 바로 신고해야지 네가 나서겠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거야?"

"누가 죽는지 지켜보라고."

명식이는 새로 주문한 기물들이 도착하자 뭔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아무르가 물어봤지만, '기다려봐'란 말만 되풀이하면서.

"그런데 진짜 움직이기는 하는 거야?"

"그럼! 은동리 연구원들이 공개한 설계도와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라 한 건데 당연히 작동하겠지."

"참말로?"

"내가 언제 거짓말하는 것 봤어?"

"그건 아니지만···, 이 쇳덩이가 움직인다니 믿기지 않아서 말이야."

명식이가 만들고 있는 것은 외골격 로봇이었다.

예맥 북로도 예맥 남로처럼 야생 동물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철책을 쳐놓았다.

하지만 나무를 잘 타는 곰에게 철책은 소용없었다.

연이 야생 동물 보호구역을 벗어난 맹수는 무조건 사살하라 했기에 한동안 맹수들이 민가에 접근하는 일은 없었다.

넘어가면 죽는다는 것을 아는지 근처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 또한 야생 동물 보호구역에 가지 않아서 그런지 맹수들의 개체 수가 늘어났다.

그로 인해 맹수들이 산을 벗어나 나타나기 시작했다.

늑대나 나무를 잘 탄다는 호랑이라도 철책을 넘을 수는 없었기에 인사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곰에 의한 피해는 생각보다 자주 발생했다.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까지는 접근하지 않았지만, 가축을 키우는 목장에는 자주 나타났다.

아무르와 명식이가 사는 목장에도 밤만 되면 곰들이 나타나서 골치를 앓고 있었다.

"아무르?"

"왜?"

"우리가 키우는 산양들이 얼마나 비싼 놈들인지 잘 알지?"

"그럼! 캐시미어 섬유는 없어서 못 팔지."

"그런데 이 곰탱이들이 우리 산양들을 도륙 내고 있단 말이야.

"그거야 알지만, 위험하니 그렇지. 그냥 신고하자고."

"신고하면 뭐 해. 수렵꾼들이 나타나면 사라져 버리는데."

"그러게. 큰곰들이 영리하기는 하지."

예맥 남로와 북로 사이에 있는 사막과 황무지에도 고비 곰이라 부르는 작은 곰들이 살고 있었다.

하지만 고비 곰은 사람에게 위험하지 않았다.

큰곰이라 부르는 불곰의 아종인 고비 곰은 체구가 작았다.

주로 식물의 뿌리나 열매, 줄기들을 먹거나 가끔 작은 설치류를 잡아먹었기에 맹수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생 동물 보호 구역이 아니더라도 고비 곰은 따로 단속하지 않았다.

하지만 북쪽에서 내려온 불곰은 대형 포식동물이었기에 매우 위험한 맹수였다.

그런 불곰들을 때려잡기 위해 명식이는 외골격 로봇을 만들고 있었던 거다.

목장에서 사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쉽게 신청하고 살 수 있는 산탄총은 큰곰을 잡기에는 무리였다.

큰곰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산탄총이 아닌 강력한 총이 필요했는데 이런 총은 신청해도 수렵꾼이 아니면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

"자! 보라고. 이제 전원을 넣을 테니까."

명식이가 외골격 로봇에 전원을 넣자. 웅크리고 있던 외골격 로봇의 일어서더니 뒤가 벌어졌다.

명식이가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자.

외골격 로봇이 요동쳤다.

"조심해!"

"걱정하지 마! 지금 각종 센서를 점검하는 중이니까."

부르르 떠는 것처럼 보이던 외골격 로봇이 정지하자 로봇의 눈에 파란 불이 들어왔다.

"우와! 파란불이 들어왔는데 정상 작동하는 거야?"

"그럼! 이제 곰탱이들은 다 죽었어."

높이가 3m나 되는 외골격 로봇은 험지에서 작업할 때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만큼 그 자체로 훌륭한 일꾼이었다.

그런데 명식이가 산 외골격 로봇의 부품과 프로그램은 격투용이었으니 캐시미어 산양들을 잡아먹던 곰들의 앞날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처럼 세상의 기술은 묘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연구했고, 그 이유는 바로 은동리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너무나 앞서가는 은동리의 기술이 전부 세상에 풀리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맞습니다. 은동리에서 공개되는 첨단 기술은 안전에 관한 것뿐이라 시중에서 그걸 활용하여 만들다 보니 엇박자가 날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연이 만든 세상은 더는 군대가 없었다.

조선의 우방국이 된 나라들이 자진해서 군대를 없애버렸기에 그런 거였다.

그래서인지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평화로운 시대라 할지라도 싸움에 관한 인간의 욕망은 남아있었다.

그 욕망을 외골격 로봇을 입고 격투 대회에 참가하면서 풀고 있었던 거다.

아무튼 말썽 많은 큰곰을 모두 쫓아버린 명식이는 아무르와 함께 남쪽에 있는 높은 산에 올랐다.

"어때?"

"이거 진짜 물건인데. 외골격 로봇을 입으니 하나도 힘들지 않아."

"그러라고 만든 거잖아."

"그런데 이 밤중에 이곳까지 웬일이야?"

"오늘 밤, 우주 잔치가 열리잖아."

"그날이 오늘이야?"

"응. 좀 있으면 저 달에서 화려한 잔치가 열릴 거야."

명식이와 아무르는 커다랗게 뜬 둥근달을 보며 눈을 반짝였다.

"양자통신이 성공할까?"

"성공해야지. 그래야 잔치가 열릴 거니까."

양자 얽힘을 응용한 양자통신이 가능하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하지만 그걸 데이터를 주고받는 건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0과 1로 표현되는 일반 연산기와 달리 양자 연산기는 그사이에 무수히 많은 수를 표현할 수 있기에 프로그램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꼭 성공할 거야. 폐하께서 나서셨으니."

"그러게, 그나저나 폐하께서 오래 사셔야 할 텐데."

연은 세상의 일에 더는 나서지 않았다.

하지만 연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더욱 많아졌다.

전쟁과 기근으로 혼란스러웠던 시대를 끝내고 평화와 문명의 시대를 이룩한 연에 대한 존경심이 맹목적 믿음으로 변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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