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응징(8) >
압바스 2세는 아무리 다시 생각해봐도 이스파한 성 앞에 조선군이 나타난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제국에서 최고의 무력을 가진 자들만 보냈는데···, 어찌 된 일이지? 설마 하미드 장군이···?'
유능한 장군은 조선을 치기 위해 모두 북쪽으로 떠났다.
그렇다 해도 충성심이 남다른 하미드 장군을 신임했기에 3만 명이나 되는 성 수비 병력을 딸려 보냈다.
그런데 떠난 지 며칠이나 됐다고 조선군이 이스파한 성이 들이닥쳤단 말인가.
압바스 2세는 떨리는 눈빛으로 가신에게 물었다.
"설마 모두 죽은 건 아니겠지?"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절대 무리하지 않는 하미드 장군입니다."
"그러긴 하지."
"질룰라, 하미드 장군이 떠나면서 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철로 만든 방패로 방어막을 만든다면 놈들의 총탄을 충분히 막을 수 있고 모두 사로잡을 수 있다고 장담했습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일은 설명이 되지 않잖느냐?"
"그, 그게···."
"에잇!"
가신의 대답이 시원치 않자 압바스 2세는 단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게 틀림없었다.
반란이 일어날 때를 대비하여 만들어 놓은 철제 방패가 있었다.
이번에 그 방패를 이용하여 적들을 사로잡을 계획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조선군이었다.
"전쟁에 패했다고 해도 전부 죽었을 일은 없다. 살아남은 병사가 분명 있을 건데 그들 중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하미드가 배신을···?"
"설마, 하미드 장군이 배신을 하겠습니까?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럼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한단 말이냐?"
박격포와 기관총 공격에서도 살아남은 병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스파한 성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그들을 다른 곳으로 유인해 버렸다.
그랬기에 압바스 2세와 가신은 전황을 전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조선군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강 건너에 도착한 후,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 성이 텅 비어있는지 모르는 것 같습니다."
"크흠."
압바스 2세는 도망간 대신들이 생각나는지 단상에 주저앉으며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죽일 놈들!"
한쪽 성벽의 길이가 5km나 되는 거대한 이스파한 성안에 남아 있는 병사라고는 3천 명이 채 되지 않았다.
성을 지키는 병사들을 모두 조선군을 잡아 오라고 내보냈기 때문이다.
넓은 성을 지키기에 병사가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이스파한 성안은 난리가 났다.
조선군이 왔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은 가산을 챙겨 성을 빠져나가 도망쳤다.
대신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자신의 영달과 치부에만 관심 있는 대신들은 조선군이 강을 건너는 건 시간 문제라고 봤다.
강인한 성격이 아닌 압바스 2세보다 조선군이 더 두려웠는지 대신들은 기겁하며 제일 먼저 도망쳤다.
사태의 심각성이 온몸으로 느낀 압바스 2세는 깊은숨을 내쉬며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자신이 낸 계책이 실패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을 빠져나가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세상과 바꿀 수 없는 이 아름다운 이스파한을 두고 말이냐?"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북쪽으로 가서 이맘과 합류하여 때를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벌써 요새를 점령했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두고 갈 순 없다."
압바스 2세는 보물도 보물이지만, 수많은 후궁과 자식을 버리고 떠나기가 싫었다.
"질룰라, 질룰라께서 잡히시면 어찌 될지 모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그 순간.
묘한 소리가 들리더니.
'쿠앙!' 소리와 함께 궁전이 흔들렸다.
"이, 이게 무슨 소리냐? 놈들에게는 대포가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질룰라, 피하셔야 합니다. 지금 그걸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가신은 압바스 2세를 억지로 끌고 나가며 소리쳤다.
"경비대장! 경비대장! 어디 있느냐? 빨리 질룰라를 모시지 않고!"
* * *
조선전력공사 육경 제2사단장 신수는 이스파한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높은 곳에 이렇게 거대한 성이 있다니···. 놀랍네!"
"정말 아름답지 않습니까?"
1,500m가 넘는 높은 고지대에 있는 이스파한 성까지 오면서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면서 바라본 이스파한은 말로만 듣던 천상의 세계 같았다.
강을 따라 우거진 숲과 반듯하게 정렬된 도시와 도로들.
황금색으로 칠해진 돔과 웅장해 보이는 궁궐은 넓고 반듯한 대지 위에 펼쳐져 있었다.
"파괴하고 싶지 않군!"
"너무 아름다워 욕심이 납니다."
신수의 말에 참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맛을 다셨다.
왠지 이곳을 파괴하면 벌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이스파한 성은 황홀한 정도로 환상적이었다.
"그렇다 해도 놈을 잡아 죽여야 한다. 감히 조선을 넘본 놈을 살려둘 수 없다. 그러니 궁궐 옆 빈터에 박격포를 쏘라고 해라. 실수가 없어야 할 것이다."
"넵! 사령관님."
이스파한 성 한가운데에서 포탄이 터지자 남아 있던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가진 게 있는 자들이 모두 짐을 싸서 떠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었기에 떠날 수가 없었다.
이스파한 성을 벗어나면 황무지라 더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 숨죽이고 사태를 지켜 보고 있었다.
조선군이 성안으로 쳐들어오면 어찌해야 할지 대책을 세우며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성안은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밤이 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조선군이 성안으로 들어오지 않자, 약탈과 방화가 시작됐다.
신수와 참모들은 이스파한 성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자 허탈하게 웃었다.
"도대체 이곳에 사는 놈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까워서 쳐들어가는 것도 보루하고 있는데 이러다 다 망가져 버리겠습니다."
"그렇게 둘 순 없지!"
신수는 화가 났는지 이를 빠듯 갈았다.
아라비아 관리에게 돈을 주고 얻은 이스파한 성의 지도를 점검한 신수는 단호하게 명을 내렸다.
"지금 즉시 성안으로 진입하여 돌아다니는 자는 무조건 쏴 죽여라!"
"전부 말입니까?"
"누가 약탈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
"알겠습니다."
신수는 이스파한 성이 망가지는 것도 서로 약탈하는 행위도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아름다운 이스파한 성이 탐이 났다.
그래서 지키고 싶었다.
"사람이길 포기한 놈들은 제거하는 게 답이지."
이렇게 아름다운 자국의 성에 불을 지르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자들이라면 살려둘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신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작전 참모는 대대장들을 불러 모아 진격로를 분배했다.
"이 정도로 방화가 일어날 정도면 왕은 이미 도망갔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놈을 잡는 일을 예맥 기병대에 맡기고 궁궐부터 점령한다. 2대대와 3대대, 4대대는 궁궐로 직행해서 사수한다. 그곳에 있는 모든 것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 너희들의 목적이다."
""넵!""
"5대대와 6대대, 7대대는 동쪽으로, 8대대와 9대대, 10대대는 서쪽으로 진격하라. 성 밖으로 도망가도록 유도하면 더 좋다. 자국의 성을 불태우다니 절대 사람 취급하지 마라! 알았나!"
"""멸!"""
대대장들이 모두 떠나자 1대대장인 정봉이가 작전 참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는 이곳에 남아 사단장님을 지킨다."
"넵!"
제일 먼저 기관총 사수들이 강 건너 성 위에 대포가 있을 것 같은 곳을 향하여 총알을 난사했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모두 도망간 것 같다. 대원들은 즉시 강을 건너 성안으로 진입하라!"
몸이 날랜 대원들이 먼저 밧줄을 걸어 성벽 위로 올라갔다.
휴대용 전구를 꺼내 주변을 살핀 대원들이 허탈해하더니 소리쳐 외쳤다.
"아무도 없다!"
서둘러 성벽을 타고 위로 올라간 대원들은 기가 막혀 풀리려고 하는 긴장감을 입술을 깨물어 잡았다.
"모두 도망갔나?"
"그런 것 같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성루를 지키는 병사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성루뿐만 아니었다.
성안에도 병사로 보이는 자는 없었다.
대신 방화를 하며 겁탈과 약탈을 일삼는 무리가 넘쳐났다.
"보는 즉시 사살하라!"
"""멸"""
저격병들이 성루와 높은 곳에 올라가 자리를 잡고 지원하는 수색이 시작됐다.
방검복과 철모까지 쓴 대원들은 거침없이 전진하여 궁궐 앞에 도착했다.
"저놈들 뭐야?"
"도적놈들이지 뭐겠습니까?"
궁궐에서 약탈한 것으로 보이는 비단과 물품을 가지고 나오는 놈들을 향해 대원들은 가차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소총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지자 약탈에 나선 이들이 쓰러져 갔다.
겁이 났는지 놈들은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팽개치고 도망쳤다.
하지만 대원들은 용서하지 않았다.
도적놈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수도 없이 교육과 받았기에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
환상적으로 화려하고 아름다운 알리카푸 궁전에서 총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런 일은 궁전뿐만 아니었다.
신을 위해 기도한다는 모스크에서도 발생했다.
황당하게도 조선전력공사 경비대원들이 궁전과 모스크 같은 귀중품이 많은 장소에서 자국민에 의한 약탈로부터 지키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궁전 안으로 들어갈수록 상황은 더 기가 막혔다.
총소리가 들리는 되도 이성을 잃고 허리를 놀리는 놈이 있었다.
-탕!
고통에 울부짖는 여인의 비명에 화가 난 대원은 놈의 머리통에 총알을 안겨주었다.
"아주 지옥이 따로 없군."
뇌리 쇠를 후퇴시킨 후 총알을 다시 장전한 대원은 침을 뱉었다.
조선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눈앞에 벌어졌기 때문이다.
총알을 다시 장전한 대원이 궁전 안으로 뛰어 들어가려 하자, 누군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놀라 고개를 확 돌린 그의 눈앞에 연대장이 보였다.
"흥분하지 마라!"
"네? 넵. 알겠습니다. 연, 연대장님."
제2사단 제2연대장인 명득이는 대원에게 고개를 짧게 끄덕인 후 조201 권총을 꺼내 들고 터벅터벅 궁전 안으로 향했다.
대원 또한 소총을 움켜 주고 명득이의 뒤를 따랐다.
-탕! 탕! 탕!
초록빛과 황금빛이 어울려진 궁전 한 곳.
흔들리는 촛불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곳에 비단으로 온몸을 감싼 여인들이 몰려 있었다.
그 앞에는 명득이가 쏜 총알을 맞고 푹신한 페르시아 카펫을 피로 더럽힌 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총소리를 듣고 달려 온 대원들이 휴대용 전구로 여인들을 비췄다.
"연대장님, 이곳은 하렘이란 곳인가 봅니다."
"하렘?"
"네, 연대장님. 왕비들을 모아 놓는 곳이라 합니다."
"크흠···."
명득이는 이해되지 않았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찌 왕비들을 한곳에 모아 놓는단 말인가.
첩을 두고 사는 일반 백성도 하지 않는 짓인데.
"문화가 다를 수 있지만···."
조선의 태자이자 조선군 총사령관인 사장님께서 '우리 문화가 소중하듯 다른 이의 문화도 인정해줘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인정하기 싫었다.
"죽은 놈들을 밖으로 꺼내 놓고 아이들과 여인들을 찾으면 이곳에 가둬 놓아라."
"""멸!"""
경비대원들이 이스파한 성안으로 진입하자 약탈과 방화는 빠르게 사라졌다.
다행이라면 흙과 돌로 지어진 집들이 많아 불이 번지지 않았다는 것뿐.
날이 밝아 오자 곳곳에 널린 죽은 자들로 인해 천당처럼 아름다운 이스파한 성은 지옥과 겹쳐진 것 같았다.
* * *
효종으로부터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들은 연은 다시 은동리로 돌아갔다.
결정되지 않았기에 태자비를 만나러 가는 것도 포기했다.
"젠장, 신혼여행 겸 가보려고 했는데···."
새로운 단어가 나오자 옆에 있던 은쌍식이 연을 슬쩍 바라봤다.
은쌍식은 입을 열려고 하다가 다물었다.
사장님 심기가 불편해 보여서였다.
그래도 궁금함을 참지 못했는지 슬쩍 물었다.
"사장님, 사파비 제국을 치고 나면 어찌할 계획이십니까?"
"어찌하긴 어찌해? 그냥 왕 놈과 이번에 전쟁을 일으킨 놈들 모가지를 다 잘라 버리고 돌아와야지."
"그래도 아깝지 않습니까?"
"아까워도 할 수 없지 않으냐? 그곳까지 관리할 여력이 되지 않는데."
연은 자원 때문에 더는 영토를 확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내실을 다시 잡아야 해.'
이미 확보한 땅만 해도 자손 대대로 쓸 수 있는 자원이 있다.
그러기에 더는 욕심 내지 않기로 했다.
'괜히 욕심내다 무너질 수 있어.'
반란이라도 일어난다면 골치 아플 게 뻔해 보였다.
그때 포기하고 떠나기엔 투자한 비용이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석유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기에 조경함을 3척에 1개 사단 병력을 실어 보냈다.
사파비 제국을 치고 난 후 세상에 석유가 가장 많다는 아라비아반도를 차지할 계획이었다.
사파비 제국에도 석유가 많이 있다고 알고 있지만, 사람이 많은 사는 곳이라 포기할 생각이다.
대신 나라도 없고, 마을도, 사람도 거의 없는 아라비아반도를 차지할 계획을 세웠다.
"골치 아프게 생각할 것 없다. 우리와 사고방식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굳이 받아들여야 하겠느냐? 그것보다 더 좋은 곳이 빈 땅인데."
"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빈 땅이라니요?"
"사파비 제국 남쪽 바다 건너에 사막으로 된 아라비아반도라는 곳이 있다. 그곳에 석유가 엄청나게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니 그곳을 먼저 점령해야 하지 않겠느냐?"
"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석유란 말에 은쌍식은 입술을 훔치며 입맛을 다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