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10 - 대치
“술률노속! 거란 승상이 직접 오다니!”
황보제공은 여진 기병들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곳에 온 거란군의 숫자가 우리의 예상보다 많습니다. 서둘러 물러나야 합니다.”
황보금산이 형인 황보제공에게 다급하게 말했다.
“거란군이 한 부대씩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때 우리가 친다면? 거란 대군이 강을 건너는 데 한참 걸릴 거다.”
황보제공은 처음에는 거란 대군을 보고 놀라서 무조건 군사를 뒤로 물렸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자 공격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이미 원군이 당도한 것을 보고 거란군의 사기가 올라서 쉽게 깨뜨리기 어렵습니다. 또한 만에 하나 우리 패서 군사들이 단독으로 싸우다가 무너지면, 폐하께서 거느리신 군사들만으로는 거란군을 당해내기 어렵습니다.”
황보금산이 황보제공에게 그리 말했다.
이미 박수문, 박수경 형제도 거란 대군을 경계하며 군사들을 뒤로 물리기 시작했다.
“그래 우선은 물러나자.”
망설이던 황보제공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머리를 돌렸다.
거란 대군도 섣불리 고려군의 뒤를 쫓을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거란 군사들은 송화강을 건너와서 강 양안의 수비를 굳히는 데 집중할 뿐 후퇴하는 황보제공 등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거란군은 부여진을 확고하게 장악하는 것을 우선순위로 여기는 듯했다.
거란의 여러 대장들과 요인들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계속 강을 건너왔다.
“단완태후도 왔다! 술률평도 참전했다.”
“야율이호도 왔다!”
거란 정세에 대해 아는 여진 출신 기병들이 계속 그런 식으로 부르짖었다. 그 와중에 면밀하게 상황을 살피던 박수경이 황보제공에게 다가와 말했다.
“다행히 적이 우리를 추격할 마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너무 뒤로 군사를 빼서 거란 대군이 쉽사리 부여진에서 벗어나게 해서도 안 됩니다. 거란 군사들이 강을 뒤에 두고 싸우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나마 거란 기병들이 움직이는 공간을 좁힐 수 있습니다. 이제 상황을 살피며 저들을 견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켜보다가 적이 우리를 쫓으면 더 물러나면 됩니다.”
“맞소.”
황보제공이 그 말에 동의했다. 고려군의 선봉을 맡은 패서군은 후퇴를 멈추고 거란군의 도하를 지켜봤다.
“원래 발해령에 있던 거란 군사들과 합치면 저들의 규모가 족히 4만은 되겠습니다.”
유심히 거란군사들의 수를 헤아리던 박수경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4만이라니.”
황보제공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거란군을 노려보고 있던 패서 군사들의 후방에서도 거대한 북소리와 함께 먼지구름이 일었다.
“폐하께서 오신다!”
패서 군사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왕무가 고려군의 주력을 이끌고 마침내 부여진에 당도한 것이다.
“와아아아.”
거란 대군이 당도한 것을 보고 잠시 위축되어 있던 패서 군사들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서쪽에서 달려오는 고려군 주력도 여기에 호응해서 외치니 부여진에 고려군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고려 국왕 왕무를 중심으로 그 심복인 박술희, 이 외에 경주도독 윤신달, 명주도독 김순식, 서경유수 왕식렴 등 삼한통일전쟁에서 활약했던 고려 대장들이 좌우를 호위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또한 발해 지군국사 대광현, 정안국왕 열만화를 비롯한 발해의 장수들, 고려를 따르는 여진 군장들이 그 뒤를 따랐다.
고려군의 군세도 대단했다.
처음에 고려는 여진 기병까지 끌어모아 기병 5만을 일으켰다. 여기에 정안국 기병 8천과 대광현이 모은 옛 발해 기병 3천이 합세했다.
고려 후군에 배치된 다치거나 노쇠한 기병 4천을 제외해도, 부여진에 당도한 고려 기병의 수만 5만 7천에 이르렀다.
거란 군사들보다는 확실히 많은 숫자라서 고려군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그 와중에 거란 군사들 역시 거의 모두 부여진을 통해 강을 건너왔다. 대광현의 말대로 확실히 이 인근은 수위가 낮아 거란군사들은 말에 탄 채로 그대로 도하했다.
다만 모든 거란 군사들이 송화강을 건넌 것은 아니었다. 2천 명 정도 되는 거란 군사들은 송화강 서편을 굳게 지키고 있었다. 퇴로를 확고하게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거란 기병들도 승상 술률노속을 중심으로 좌우로 진을 펼쳐 고려군과 대치했다. 진형을 펼치는 거란 기병들의 움직임이 기민했다.
가만히 고려군의 대형을 살피던 거란 승상 술률노속은 몇몇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나서더니 당당히 외쳤다.
“고려의 도적들아! 너희들이 너희 나라에 숨어 있지 않고 이리 기어 나와 우리 영토를 침범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러자 고려 측에서는 서경유수 왕식렴이 나와서 외쳤다. 국왕인 왕무가 직접 거란 승상과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격이 안 맞는다는 생각에 왕족이기도 한 왕식렴이 나선 것이다.
“너희들 땅이라니? 본래 우리 형제인 발해 사람들의 땅이었고 그를 회복시켜 주기 위해 왔을 뿐이다.”
“으하하하. 좋다. 좋아. 어쨌거나 너희들이 산세가 험한 너희 소굴에 숨어 있어서 토벌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너희들 스스로 이리 나와주니 내가 이번에 너희들을 소탕해 고려 땅까지 평정하겠다. 정안국의 무리들도 나왔구나. 오늘 우리 거란의 후환을 모두 뽑아낼 수 있겠다.”
술률노속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그리 호언장담했다.
술률노속과 왕식렴이 말싸움을 벌이는 사이 왕무와 고려군 수뇌부는 어찌할지 논의하고 있었다.
“거란 군사들이 멀리서 달려오느라 지쳐 있으니 그냥 바로 공격을 가하는 것이?”
황보제공이 결연하게 외치는데 대광현이 이마에서 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고려 군사들도 두만강을 건넌 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계속 행군했습니다. 지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차라리 기마술에 능한 거란 기병들이 덜 지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황보제공이 어두운 표정으로 고려 기병들을 살펴보았다. 확실히 고려에서 출진해 상경 용천부를 거쳐 부여진까지 달려온 고려 기병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지금 거란 황제가 진나라와 싸우느라 중원에 들어가 있습니다. 시간이 급한 쪽은 거란입니다. 차라리 검차를 늘어세워 벽을 만들고 그 뒤에서 우리 기병들을 쉬게 하며 거란의 공격을 받아치는 것이 좋습니다.”
윤신달이 그리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여기저기서 찬동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확실히 이 싸움은 고려의 운명이 걸린 한판이었다. 만약 이 회전에서 패한다면 그야말로 국운이 쇠할 것이다. 고려에 호응해서 달려와 준 발해유민들과 정안국도 한 번에 그 세력이 소멸할 수 있었다.
왕무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명을 내렸다.
“경주도독의 말을 따르겠다. 검차를 전개하라.”
급하게 부여진에 달려오느라 고려 측은 보병을 데리고 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고려 기병들도 유사시에는 말에서 내려 검차를 움직이는 훈련을 이미 거쳤다. 고려군은 검차를 좌우로 길게 늘어세우고 거란군이 검차벽을 우회하지 못하도록 좌우 측면을 경계했다.
그 광경을 보고 술률노속도 말싸움을 멈추고 자신의 진영으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일부 거란 기병들이 출진해 길게 우회할 태세를 취했다.
고려 기병들은 바짝 긴장해서 대응을 하려고 하는데 거란 기병들은 다시 자신의 진영으로 물러섰다.
술률노속도 이 전투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만약 거란이 여기서 패한다면 기껏 20년 전 발해를 멸망시킨 일이 모두 허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한 지금 거란군은 어쩔 수 없이 송화강을 뒤에 두고 배수진을 치고 있었다. 퇴각할 때 부여진의 여울 외에는 길이 없었다. 퇴로가 좁기 때문에 술률노속도 쉽사리 고려와 결전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와 거란 모두 부여진에서 대치하는 사이 시일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나는 후군 군영에서 왕규를 추궁했다.
“아니, 외교를 어떻게 했기에 부여진에 달려온 거란 군사들의 규모가 4만이나 돼! 진나라군은 뭘 하고 있어?”
나는 왕무의 명령대로 우선 군사들을 이끌고 부여진과 백두산 사이의 송화강변에 주둔했다. 그리고 하루에 전령을 20명씩 보내 상황을 실시간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부여진에 모인 거란군의 숫자가 4만에 이른다는 소리를 듣자 울화가 터지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4만이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대군이었다.
“진나라도 나름 애를 쓰고 있는데. 거란의 무리들이 뭔가 낌새를 채고 일부 군사는 뒤로 뺀 것 같습니다.”
왕규가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 곁에서 최지몽이 말했다.
“우리를 막기 위해 거란 승상 술률노속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태후 술률평도 출전한 것은 거란에 여유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거란은 수도 상경 임황부의 병력을 모두 긁어모아 4만 명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텅 빈 상경 임황부에 태후며 요인들을 남겨둘 수 없으니 함께 온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건……맞아.”
나는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어쨌든 부여진에서 이기기만 하면 거란은 반쯤 멸망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부여진에서 이긴다면 우리 고려군이 거란 수도 상경 임황부로 진군해도 막을 거란 군사들이 없습니다. 그러면 중원에 들어가 있는 거란 황제 야율덕광은 놀라서 퇴각할거고 석중귀와 진나라군이 그들을 추격하면……”
왕규가 내 마음을 달래려는 듯 긍정적 전망을 늘어놓았다.
“부여진에서 이기기가 만만치 않다는 거지.”
나는 그 말을 내뱉고 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고려군을 막기 위해 달려올 거란군의 숫자를 2만 내외로 계산했다. 그런데 뜻밖에 거란에게 여유가 더 있었어. 역시 연운 16주를 얻고 몇 년간은 관리해서 그런가?’
괴로워하는 나를 보고 김선평이 입을 열었다.
“마마. 지금은 폐하를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후군의 전력으로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설사 우리가 부여진에 달려간다 한들 큰 도움은 안 됩니다. 거기에 도선국사의 예언도 있지 않습니까?”
김선평이 그렇게 나를 달래는데 나는 속이 더 답답해졌다.
‘도선국사의 예언이며 여러 징조들은 내가 다 날조한 거니 그렇지. 이걸 털어놓을 수도 없고.’
내가 연거푸 한숨을 쉬는데 후군에 배속된 여진족장들인 각랍라영신, 필제특아공이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여진족들은 고려 정세에 익숙하지도 않은데 왕후가 이리 한탄만 하면 불안하겠지. 쩝. 저 사람들도 나이가 지긋해서 큰 도움은 안 되고. 결국 김선평 말이 맞긴 맞는데.’
그래서 나는 여러 장수들과 문관들에게 명을 내렸다.
“군영의 경계를 철저히 하고 계속 전령을 보내 부여진의 상황을 살펴라. 부상병들이 후군에 많이 있으니 그들은 푹 쉬게 하라.”
나는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 놓고 혼자 깊이 생각을 해볼 작정이었다.
‘부여진에서 왕무가 무작정 이길 거라고 믿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이 승부에 영향을 끼칠 방법을 모색해 봐야지.’
그리고 내 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막사를 나섰다. 그들을 지켜보며 나는 상념에 잠겼다.
‘내가 이 고려 시대에 떨어진 이래 나름 여러 가지 도구들을 만들었어. 비누도 있고 확성기도 있고 기구도 있고. 이것들을 어떻게 이용해 볼 수 없나? 참 이런 대규모 격전에 쓸 만한 건 못 만들었어. 현대에서 과학이나 기술에 대한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이 시대에 와서는 왕건한테 사기 치는 법이나 배웠고.’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동안 고려시대에 떨어져서 내가 해냈던 일들을 차분히 회상해 보자. 그러면 답이 나올지도 몰라. 왕무가 부여진에서 확실하게 거란을 이길 방법을, 그걸 떠올려야 해. 나라의 운명을 건 싸움인데. 수많은 후삼국의 호걸들이 어쩌면 나 때문에 이 먼 북방까지 달려왔다. 물론 원래 역사에서도 고려의 내전과 권력항쟁 과정에서 대부분 숙청 당했지만. 그래도 그러느니 발해의 형제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서 일을 이리 꾸몄다. 반드시, 반드시 이겨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