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06 - 두려움
나와 왕무는 개경 인근 군사들을 거느리고 신라도에 당도했다. 길은 이미 고려군사들과 여진 군사들로 가득했다.
‘왕건이 일리천 전투 때 동원했던 전력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보병만 약간 덜 동원했지 기병들은 모두 끌고 나왔으니.’
5만에 달하는 기병들이 신라도를 가득 메우고 있는 모습이 웅장했다. 5만의 기병 중 8천 기가 여진족 기병들이었다.
여진족들의 처자가 지금 고려 땅에 머물고 있으니 그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나와 왕무가 도착하자 수많은 장수들이 인사를 하기 위해 우리 앞에 달려왔다. 그들 사이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많이 보였다.
‘안동의 삼태사들도 아직 살아 있었구나.’
고창 전투에서 나와 함께 싸웠던 김선평, 권행, 장길의 모습이 보였다. 많이 늙기는 했지만 얼굴을 알아볼 수 있었다.
또한 응천성주 손긍훈과 그 일대의 호족들도 보였다.
‘내가 손긍훈을 구하러 갔을 때 만났었지.’
이 외에 박영규도 옛 백제령의 호족들을 모두 거느리고 달려왔다. 그야말로 삼한 땅 곳곳에서 왕무의 명에 따라 대군이 집결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데. 이번 북벌.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
그리고 왕무는 당당하게 그런 호족들을 지휘했다.
“이제 제장들의 편제를 정하겠다. 발해 지군국사 대광현은 명을 받들라! 우리 대군의 선봉은 발해 군사들을 거느린 대광현이 맡는다.”
왕무의 말을 듣고 갑옷을 걸친 대광현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서 외쳤다.
“명을 받듭니다.”
그런 대광현의 뒤에서 모두간, 박어, 은계종, 정근 등의 장수들이 함께 군례를 올렸다. 모두 고려에 망명해 온 옛 발해의 무장들이었다.
북벌에 임해 옛 발해령의 민심을 모으기 위해 왕무는 발해군을 앞세울 생각인 것 같았다.
“박술희와 유씨 삼형제가 여진 기병들을 거느리고 선봉을 맡은 발해군의 뒤를 받쳐주도록 하라!”
원래 유금필의 아들인 유긍, 유관유, 유경이 여진족 문제를 담당했다. 그러나 이 큰 싸움에 임해서 그들에게만 여진족 통솔을 맡길 수는 없었다. 그래서 왕무는 자신이 제일 신임하는 박술희를 붙여준 것이다.
“예, 폐하.”
박술희 등도 군례를 올렸다.
이윽고 왕무는 개경 인근의 패서 군사들을 중심으로 중군을 꾸렸다. 사실상 고려군의 주력이었다. 고려의 주요 장수들은 모두 중군에 속했다.
“이외에 남방에서 온 기병 및 보병들은 후군이 된다”
왕무가 그리 편제를 끝냈다.
장수들은 왕무의 명대로 각자의 부대로 흩어졌다. 어느새 막사에는 나와 왕무만이 남았다. 두 사람만 남자 왕무는 이마의 땀을 흘리면서 말했다.
“이번에는 거의 한번 싸움으로 전쟁의 승패가 갈릴 거야.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장수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했지만 왕무도 많은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힘을 쏟아부어야지. 나도 쓸모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모든 걸 가지고 왔어.”
내가 이 시대에 와서 현대지식을 이용해 만든 도구들은 다 실어 왔다. 혹시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우리가 두만강을 넘으면 아마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거야. 연우야. 그때가 되면 후군에 가서 문관들과 정보수집을 해줘.”
왕무가 그런 부탁을 했다.
“그, 그건…….”
나는 말끝을 흐렸다.
‘전쟁이 시작되면 나더러 안전한 후방에 있으라는 건가? 그러기 싫은데. 그냥 왕무 곁에서 함께 하고 싶어.’
내가 뭐라 말을 하려 할 때 왕무가 웃으면서 내 말을 끊으며 말했다.
“연우 너의 지략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이야. 후위에서 침착하게 상황을 살피고 있어야 연우 네가 계책을 잘 내지. 후군을 이끌고 있다가 내가 위험에 처하면 구해줘.”
그 말을 듣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나를 후군에 배치하려고 남방 기병들을 거기에 편제했군. 나와 친한 안동 삼태사나 손긍훈 등이 다 남방 출신이니. 글쎄 이런 싸움에서 내가 후방에 있다가 뭘 할 수 있을지? 그냥 안전하게 후방에서 구경이나 하라는 건데. 하지만 왕무의 의지가 워낙 확고하니.’
이미 전쟁은 시작됐다. 왕무가 대장으로 고려 대군을 이끌고 있는데 내가 함부로 왕무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명을 받듭니다.”
나는 짐짓 정중히 군례를 올리며 근엄한 어조로 왕무에게 말했다. 약간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그랬는데 왕무는 환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연우야. 고마워.”
그 웃음을 보니 나는 계속 서운해할 수도 없었다.
“응.”
나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이며 왕무를 살며시 안았다.
그리고 왕무의 명대로 편제를 갖춘 도합 6만의 고려 대군은 신라도를 타고 북진하기 시작했다.
* * *
두만강까지 가는 도중에도 작전 회의는 계속 열렸다. 나와 왕무, 그리고 주요 장수들은 매일 모여서 일을 논의했다.
작전 회의의 분위기는 몹시 안 좋았다.
‘거의 고창 전투 직전 고려군 분위기를 보는 것 같네.’
개경의 어전에서야 여러 대호족들을 쉽게 통제했다. 그런데 전장에 나오니 사정이 또 달랐다.
거란과의 결전을 앞두고 신경이 곤두선 대호족들을 다루기가 만만치 않았다.
예민해진 여러 장수, 호족들끼리 싸움도 자주 나고 언성도 커졌다.
‘왕건이 살아 있을 때 북벌을 했어야 했어. 그래야 그 고통스러운 일을 다 왕건에게 떠넘기는 건데.’
나는 왕무와 함께 매일매일 서로 싸우는 장수, 호족들을 달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게 진짜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나와 왕무도 짬이 쌓여서 이 대호족들을 다 끌고 북방으로 가긴 하네. 10대 후반이나 20대 초반에 이런 일을 맡았다면 절대 못 해냈을 거야.’
가끔은 이런 일을 해내는 나 자신이 기특하기도 했다.
이렇게 꾸역꾸역 진격해서 두만강에 가까이 당도했을 때 작전회의 도중 황보제공이 마침내 못 참고 외쳤다.
“정안국주 열만화는 대체 언제 우리 대군에게 합류하려고 합니까? 우리 대군이 여기까지 왔는데도 열만화는 확답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애매모호한 서신만 보내고 있으니!”
“정안국도 백두산이 터지고 홍수가 나서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은 모양입니다.”
왕식렴이 황보제공을 달래듯이 말했다.
“어떤 사정이든 정안국 군사들은 달려와야죠. 지금 끌어모을 수 있는 모든 힘을 한순간 쏟아부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자식들이 이러니. 그냥 확 정안국을 먼저 공격해서 그 세력을 아우른 뒤 나아가면 어떻습니까? 아니 우리 고려 군사 일부를 정안국 국경에 보내 공격할 태세만 취해도 정안국이 겁먹고 우리에게 바로 달려오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과격한 황보제공은 화를 못 이기고 그런 주장을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만에 하나 이 이야기가 밖에 새어나가면 난리가 나는 것이다.
“그런 말씀은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어찌 발해 사람들의 인심을 얻겠습니까?”
왕식렴, 박수경 등이 나서서 그런 황보제공을 말렸다. 다만 대광현은 말없이 가만히 있었고 대광현을 따르는 발해 출신 장수들 중에는 반색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광현을 따르는 사람들이 보기엔 열만화가 역적이니 밉겠지. 황보제공의 말이 그들 입장에서는 반가울 거야. 허, 이거 참. 게다가 열만화가 정안국 군사들을 이끌고 반드시 와야 하는데. 대광현을 지군국사로 임명하며 나름 열만화를 배려해 주고 연거푸 서신을 보냈는데도 안 오고 있으니.’
여러모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서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우리가 두만강을 건너면 중경 현덕부가 멀지 않다. 우리 대군이 현덕부에 당도하면 열만화도 어찌 됐든 결단을 내릴 것이다! 열만화에 대해선 더 이상 거론하지 말라.”
왕무가 나서서 그렇게 장내를 수습했다. 왕무가 그리 말하니 우선 조용해지긴 했다. 하지만 갑갑한 분위기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 와중에 전령 하나가 다급하게 막사 안에 뛰어 들어왔다.
“전하! 선봉을 맡은 발해군 쪽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급보라니? 설마 벌써 적을?”
왕무가 놀라서 전령이 바친 서신을 열어보았다. 선봉을 이끄는 대광현도 당황한 기색이었다. 대광현은 믿을만한 부하에게 선봉을 맡기고 잠시 작전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찬찬히 서신을 읽은 왕무가 말했다.
“선봉을 맡은 발해군의 군심이 심상치 않다는군. 지군국사! 서둘러 선봉으로 돌아가 군사들을 보살피도록.”
왕무가 그런 명을 내렸다.
“예. 폐하.”
자기가 이끄는 부대에 문제가 생겼다니 안절부절못하던 대광현은 명을 받자마자 부하들을 거느리고 달려나갔다.
그런 대광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황보제공이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발해군의 군심이 심상치 않다니 이해가 안 갑니다. 발해 출신 군졸들에게는 이번 싸움이 고향 땅을 되찾기 위한 일입니다. 그래서 발해군은 사기도 높고 의욕도 충만했습니다. 여태 잘 진군하다가 왜 갑자기?”
나도 이번만큼은 황보제공의 말에 동의했다.
‘군심이 흔들릴 일이 뭐 있어?’
* * *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나와 황보제공은 궁금증을 풀게 됐다. 이제 고려 대군은 두만강 바로 앞까지 당도했다.
이제 도하만 하면 됐다. 그러나 군사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으으. 백두산에서 쇳물이…….”
고려 군사들 사이에서 그런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렴풋이 보이는 백두산에서는 여전히 불길과 용암이 보였다. 그리고 엄청난 화산재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온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군졸들만 동요하는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그리 과격한 말 내뱉기를 좋아하던 황보제공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멍하니 백두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고려 제장들도 얼굴이 창백해져 있었다.
“역, 역시 다시 이 지옥으로 들어가기는 무리야!”
두만강 인근에서 겨우 탈출한 여진 기병들의 반응은 더욱 극적이었다. 몇몇 여진 기병들은 그냥 말에서 뛰어내려 땅에 얼굴을 박았다. 탈출 당시의 공포가 다시 떠오른 것 같았다.
고려군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내가 이 생각을 못 했구나. 화산 폭발에 대해 현대에서 영상매체로나마 보고 그 원리에 대해서 아는 나와 달리 이 시대 사람들은 그야말로 처음 보는 광경이니. 무서울 수밖에.’
나는 혀를 차며 장내를 둘러보았다.
그나마 대광현은 발해 출신 군사들을 꾸짖으며 독려하고 있었다.
“어서 강을 건널 부교를 만들어라! 우리 고향으로 가는 길인데 이리 머뭇거리다니 부끄럽지 않느냐?”
고향으로 돌아가는 발해군마저 용암을 내뿜는 백두산과 암흑이 된 하늘을 보고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군, 군사들의 사기가?”
왕식렴도 당황해서 말 위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히히힝-
말들이 놀라서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장내의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그 와중에 누군가가 놀라서 외쳤다.
“강에 고기 떼가?”
군사들이 웅성거리며 강변으로 다가갔다. 나와 왕무를 비롯한 고려 제장들이 다가가서 보니 수많은 고기떼가 강 한쪽에 몰려서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임연객이 외쳤다.
“어별성교(魚鼈成橋)의 고사와 같다. 동명성왕께서 강을 건널 때 나타난 기적과 똑같다. 우리 군사들이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하늘의 뜻이다!”
임연객이 나름 기지를 짜내서 군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고사를 인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고려군사들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고기 떼들이 이리 모인 것은 화산이 터지고 나서 여기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는 거야. 이 시대 사람들도 바보가 아니야. 지금 살려고 날뛰는 물고기 떼들의 모습은 끔찍하지 도무지 동명왕의 고사를 갖다 붙일 수 없어. 임연객의 선동도 한계가 있구나.’
나는 임연객 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의도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임연객은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