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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201화 (201/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201 - 조짐

“각랍라영신! 그대는 고려인들이 선물한 저 배들을 어찌할 작정이오?”

필제특아공은 손을 흔들며 외쳤다. 필제특아공은 부족의 젊은이들을 이끌고 사냥을 하던 중 멀리서 역시 사냥을 하러 나온 이웃 부족장인 각랍라영신을 보고 문득 고려인들이 남겨둔 배가 떠올라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대는 어찌할 작정이오?”

각랍라영신은 흰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고려인들이 대체 꿍꿍이인지 알 수가 없으니! 그 큰배가 우리에게 무슨 쓸모가 있다고 선물이랍시고 만들어주고 떠난 것인지 의문이오. 처음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핑계로 우리 부족의 영내에 사람들을 보낸 뒤 무슨 일을 저지를 줄 알았는데.”

필제특아공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고민에 잠겼다.

“고려인들은 각 부족 경계에는 침범하지 않고 조용히 배만 만들고 떠났지. 관리를 잘 해놓으라는 말을 남긴 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소. 다만 고려의 무리들이 무슨 트집을 잡을지 모르니 사람들을 보내 배들을 쓸고 닦고 하고는 있지만.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일손이 많이 바쁜데.”

각랍라영신이 난감한 기색을 지었다. 각랍라영신이나 필제특아공이나 모두 남녀노소 다 합쳐 수백 명 정도 되는 부족을 이끌고 있었다.

여진족 사이에선 꽤 규모가 있는 부족들이었다. 그러나 일할 수 있는 사람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큰 배를 관리하기 위해 사람 몇 명을 보내야 하니 그것도 부족장들 입장에선 아까웠다.

“그 큰 배를 우리가 쓸 수도 없지만 하필 가까운 언덕에다가 그것들을 지어놨으니. 강에 띄워두면 어떤 식으로든 써먹을 뗀데 무슨 언덕에다가 만들어놔서 끌어내릴 수도 없소. 거기에 조금만 눈을 떼도 잡초가 올라오고 있소. 무슨 사당 용도로 지은 것인가?”

필제특아공이 그런 추측을 했다.

“안 그래도 몇 년 전에 고려의 왕이 죽었다고 하더군. 우리보다 더 큰 부족들에게는 장례식에 참석하라고 말이 들어왔다고 하더이다. 정말 사당일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데 그걸 왜 여기에?”

각랍라영신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어쨌든 각랍라에선 그 고려의 배를 끝까지 관리할 요량이죠? 사실 나도 그럴 생각이오.”

필제특아공이 말했다.

“그래야지. 고려인들은 엄청난 수의 말과 사람을 가지고 있소. 예전에 우리가 함께 고려 땅에 들어가 그 군세를 봤지. 우리도 강과 바다의 부족들을 모두 합쳐 1만 인에 가까웠는데 고려의 말과 사람들은 그 몇 배니. 고려 무리들에게 트집을 잡힐 수는 없는 노릇이오. 이해는 안 가지만 배는 계속 보존해놔야지.”

각랍라영신의 말을 들은 필제특아공은 힘을 얻은 것 같았다.

“내 생각도 같소. 그런데 부족의 몇몇 사람들은 그게 불만인 것 같소. 이 사람들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하나도 모르니. 우리 함께 보조를 맞춰 움직이며 부족의 반발을 누릅시다.”

“그래야지.”

각랍라영신은 필제특아공의 제안에 밝은 기색이었다. 안 그래도 고려의 배와 관련해서 요사이 부족 내의 불만이 컸다. 두 부족장이 함께 힘을 합치면 그런 반발에 대응할 수 있었다.

두 부족장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한쪽 언덕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 언덕 위에도 고려인들이 만들어놓고 간 배가 있었다. 그런데 몇몇 여진인들이 도끼로 그 배를 부수고 있었다.

두 부족장이 놀라서 언덕 위로 말을 모는데 한쪽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포탈철림! 이게 대체 무슨 짓인가? 왜 배를 부수는 건가?”

“부수는 게 아니라 배에 쓰인 목재를 활용하려는 거요! 이 배에 쓰인 목재는 질도 좋고 잘 다듬어져 있소. 우리 포탈부에 사람이 늘었어. 이 좋은 목재를 놀릴 수는 없소. 집을 짓는 데 쓸 것이오.”

포탈철림은 팔짱을 끼고 목재를 잘라 운반하는 사람들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려의 왕후가 줬다는 선물을 이리 훼손하면! 고려에서 이걸 빌미로 쳐들어오면 어쩔 건가?”

필제특아공이 외쳤다.

“아니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소? 쓸모없는 배를 선물로 줘서 이렇게 유용하게 활용을 한다고 쳐들어오다니. 그리고 고려인들은 우리더러 이 배를 알아서 관리하라고 했지 그 이후에는 신경도 안 쓰고 있소. 하하하. 뭘 그리 소심하게 그러시오?”

포탈철림은 웃으면서 말했다.

필제특아공은 포탈철림의 그 말을 듣고 상당히 화가 났다.

‘은근히 나와 각랍라영신이 용기가 없다고 비웃는 듯한 어조인데. 이걸 확! 거기다가 포탈부에서 배에 쓰인 목재를 저런 식으로 활용하는 것을 보면 우리 부족사람들도 똑같이 하자고 말할 텐데.’

다만 싫은 말 한마디 들었다고 싸움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갑시다.”

필제특아공은 각랍라영신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함께 고민에 잠긴 채 언덕을 내려왔다.

“그래도 올해까지는 고려의 동정을 살피며 배를 관리해야겠어. 올해가 지나면 그때 다시 의논해 보자고.”

각랍라영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럽시다.”

필제특아공은 반가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각랍라영신은 최소한 자신과 생각이 같은 것이다. 함께 말을 몰던 두 사람은 손을 흔들며 헤어지고 각자의 부족으로 향했다.

필제특아공은 자신의 거처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좀 쉬려고 했다. 오늘은 이런저런 고민을 많이 해서 피로했다.

그런데 밖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무당 어른이 족장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어서 모셔라.”

필제특아공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옷자락을 다시 여몄다. 그리고 한 젊은이의 부축을 받으며 늙은 무당이 들어왔다.

“어르신.”

필제특아공은 무당에게 우선 예를 갖추었다. 여진족 내에서 이런 무당들은 아직까지 상당히 영향력이 컸다.

“산이 지금 심상치 않소. 내가 매일 산을 보는데 예전과는 달라. 땅도 흔들리고 있소. 족장. 대책을 세워야 해.”

무당이 필제특아공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 그래서 무슨 대책을 세우란 거야! 구체적 대책을 얘기하든지.’

필제특아공이 속으로 분통을 터뜨리는데 무당이 말했다.

“한동안 영산 주변을 떠나야 하오.”

“어르신. 지금 땅을 떠나면 우리는 어디서 삽니까? 남쪽에는 고려인들이 있고 북쪽에는 발해 사람들과 거란인들이 버티고 있습니다.”

현실감 없는 이야기를 하는 무당을 달래듯 필제특아공이 말했다.

“그래도 땅이 흔들리는 걸 모두 느끼지 않았소?”

무당이 필제특아공의 손을 꽉 쥐며 말했다.

“내 손자가 태어날 때 처음 땅이 흔들려서 나도 놀랐습니다. 그런데 그 손자가 벌써 8살입니다. 지난 8년간 가끔 땅이 흔들리긴 해도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필제특아공이 말하는데 무당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내 평생 한 번도 이런 일이 없었소. 전대, 전전대 무당 때도. 한번 그러고 말면 몰라도 계속 이러니.”

“그야 뭐. 어쨌든 영산에는 우리 부족 약초꾼이나 사냥꾼이 못 들어가게 하겠습니다.”

필제특아공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 정도 조치로 무당을 달래려는 것이다.

“알겠소.”

무당도 필제특아공의 못마땅한 속내를 어느 정도 읽은 것 같았다. 무당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물러났다.

“참 족장 노릇하기도 힘들어.”

겨우 쉴 수 있게 된 필제특아공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으며 그리 중얼거렸다.

* * *

개경에서 나와 왕무는 여진족들의 동태에 대해 듣고 있었다. 유씨 삼형제의 막내인 유경이 직접 북방과 개경을 오가며 보고를 했다. 우리 앞에 엎드린 유경이 말했다.

“우리가 배를 만들어주니 그것을 잘 보존하는 여진무리들도 있고 벌써 해체한 무리들도 있습니다.”

“해체라……정말 내가 준 배를 해체했단 말이냐?”

나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나는 내심 모든 여진 부족들이 배를 잘 관리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우리 척후들이 은밀히 그들의 동태를 살피고 있습니다. 배를 해체하거나 관리를 게을리 한 부족들의 명단을 적어 바칠까요?”

유경이 나에게 말했다.

“명단을 적어서 뭐하게?”

내가 묻자 유경은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당연히 왕후 마마의 선물을 그리 다루었으니. 불경죄로 처벌해야 합니다.”

“그래서 군사를 일으켜서 공격하자고? 여진족들은 날쌔서 그게 어려울 텐데.”

내가 시비를 걸듯 묻자 유경은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그 무리들은 명단을 마련해 놨다가 나중에 물자를 안 주든지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나 자신이 한심했다.

‘괜히 아무것도 모르는 유경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격이야. 워낙 가슴이 갑갑해서. 유경은 무슨 죄야? 어쨌거나 이런 선택을 하는 내가 냉혹한 걸까?’

나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명단 같은 것은 필요 없다. 명단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을 만드느라 힘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 그저 북방을 지키며 물자를 비축하는데 힘을 기울여라.”

“여진족들은 그냥 내버려 두면 됩니까?”

유경은 조심스레 내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그렇다. 다만 북방에 주둔하는 우리 군사들과 백성들을 철저히 단속하라. 절대 여진족들이 사는 땅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동안 운용하던 척후들도 모두 철수시켜라. 더 이상은 여진족들의 동태를 보고할 필요 없다. 올해 내내 그래야 한다. 단 한 명의 고려인도 여진족 영내에 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유경에게 엄명을 내렸다.

“하나.”

유경이 놀라서 뭐라 사정을 늘어놓으려고 하는데 왕무가 곁에서 근엄한 어조로 말했다.

“왕후의 뜻대로 하라. 그동안 북방과 개경을 여러 차례 오가느라 고생했다. 그러니 이 소식을 전하고 북방에 가서 쉬고 있으라.”

“알겠습니다.”

유경은 장내의 무거운 분위기를 느끼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하고 예를 갖춘 뒤 물러났다.

“연우 너의 지동의 관측이 맞다면 올해 일이 터지겠지?”

왕무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지동의에서 느껴지는 지진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이제는 슬슬 동해의 호족들에게도 준비해 놨던 명을 내려야 해.”

유씨 삼형제가 내 명을 받들어 여진족 영내에 들어가 배를 건조하는 사이에 이미 때가 다가왔다.

“그래.”

왕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밖에 대기하고 있던 시위들을 불렀다. 그리고 미리 적어놓은 수십 장의 서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동해의 호족들에게 내릴 훈령들이다. 전령을 뽑아 지체 없이 전하라!”

“명을 받듭니다.”

시위들은 서신을 들고 총총히 물러났다. 일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역시 여진족들에게 엄포를 놓아서 배들을 모두 관리하게 만들었어야 했나? 여진족들이 알아서 선택하게 한 것은 너무나……그러나 고려 조정에서 힘을 바탕으로 그것을 여진족들에게 강요했으면 오히려 여진족들이 반발했을 거야. 어쩌면 그 배가 여진족들에게 억압의 상징처럼 느껴져서 모든 부족들이 배를 부쉈을 수도 있어. 싸움이 일어났을 수도 있고. 나로서는…… 최선을 다한 건데.”

나는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왕무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외면했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연우야.”

왕무는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성에 안 찼는지 나를 번쩍 들어 자기 무릎에 앉혔다.

왕무는 그냥 말없이 나를 자기 무릎 위에 앉히고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신기하게도 그렇게 한참 있으니 마음도 안정되었다.

겨우 머리가 좀 맑아진 나는 물었다.

“북벌에 나갈 군사들은 다 준비됐어?”

북벌 준비를 하면서 왕무는 실제 출진할 군사들을 모으고 있었다.

“아직 때가 아니니 군사들을 실제로 모으지는 않았어. 그러나 명만 떨어지면 순식간에 개경에 군사들을 모으는 체제는 이미 만들어졌어. 군적도 완성됐고.”

왕무는 내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나는 왕무의 품속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는 진짜 다 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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