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47화 (147/216)

< 147 : 출항 >

왕건에게 내가 지어낸 꿈 이야기를 해주고 나서 나는 축 늘어져 있었다. 왕건은 내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다시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른 한림원 학사들도 그런 왕건을 도와 열심히 자료를 찾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빨리 나주원에 가고 싶다. 왕무를 보고 싶어. 혼자 있으니 또 심란해지려고 해.'

왕무와 함께 침상에 누워 있을 때는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조금도 후회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나 혼자 떨어져 있으면 온갖 잡념이 솟아올랐다.

김선우였을 때의 기억이 떠올라 나를 괴롭게 했다. 그러니 한림원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건성으로 시간을 때운 나는 업무시간이 끝나자 나주원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최언위가 그런 나에게 가까이 다가오더니 말했다.

"정윤비 마마. 마마께 긴히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최언위가 이러는 것은 드문 일이라 나는 놀라서 물었다.

"예전에 정윤비 마마께서 서예로 최승우를 꺾으셨습니다. 그때 정윤비 마마께서 최승우의 글씨도 거둬가서 서첩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최승우와 대결 때 만든 서첩은 이제 내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건들 중 하나가 되었다.

왕무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 서첩의 역할이 컸다. 그런데 지금 시점에서 최언위가 딱 그 서첩에 대해 거론하니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신검이 난을 일으킬 때 견훤을 따르던 최승우도 화를 입었다고 합니다. 그 혼란 중에 최승우가 남긴 글씨도 많이 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최승우가 비록 우리 고려에 항거하긴 했으나 그 재주가 뛰어납니다. 그 글씨가 사라지는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니 정윤비 마마께서 서첩을 저에게 며칠이라도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서첩에 남아있는 최승우의 글씨라도 임모하려고 합니다."

최언위가 간곡한 어조로 말했다.

임모한다는 것은 복사본을 만들겠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최언위가 할 만한 부탁이었다.

"……알겠습니다. 빌려드릴 테니 오늘 나주원에 함께 가시지요."

잠시 망설이던 나는 그리 말했다. 솔직히 서첩을 빌려주기 싫었다. 그러나 지금 상황에서는 최언위에게 서첩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부자연스러워 보일 것이다. 그리고 최언위와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다. 빌려줄 수밖에 없었다.

"정윤비 마마께 감사드립니다."

최언위가 기쁜 얼굴로 대답했다.

"다만 서첩에 있는 내 글씨는 임모하지 말아주십시오. 별 것 아닌 글씨가 밖에 나돌게 되면 내가 부끄러워집니다."

나는 그런 당부를 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최승우의 글씨만 베끼겠습니다."

최언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따라왔다.

최언위에게 서첩을 빌려주고 나서 나는 나주원의 처소에 홀로 앉아있었다. 왕무는 평소에 군영에서 일을 많이 보기 때문에 늦게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왕무가 올 때까지 아직도 한참 남았네. 시간이 정말 안 간다. 최언위랑 얘기나 할 걸. 최언위가 바빠 보여서 못 붙잡았어. 한시라도 빨리 임모할 장인과 종이를 구해야 한다고 서첩을 받자마자 말했으니.'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억지로 책 한 권을 펼쳤다. 왕건이 여러 번 인용했던 전국책이었다. 왕건도 그렇고 최치원도 그렇고 나에게 책을 읽고 공부를 하라고 했다. 그나마 최치원이 권한 문학공부보다는 전국책을 읽는 것이 한결 쉬울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책을 펴자마자 처소 문이 열었다.

"연우야."

그리고 왕무가 웃으며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정윤 전하. 어찌 벌써?"

"연우야."

왕무는 내 이름만 계속 부르며 나를 껴안았다. 왕무가 굳이 길게 이야기를 안 해도 왜 일찍 온 건지 알 수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정세가 심상치 않은데 왕무가 이러면 좋지 않아. 군영에 좀 오래 머물러 있는 게 우리에게 유리하지 않을까? 아니지. 후계 문제가 급하니까. 일의 경중을 따져야 해. 아니야. 임연우. 솔직해지자. 전국책 같은 거 읽는 것보다 왕무랑……'

그런 내 심정변화를 알기라도 한 것처럼 왕무가 나에게 입을 맞춰왔다.

나와 왕무는 침상 위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 누워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급한 일이 떠올라 왕무에게 말했다.

"무야. 우리가 조만간 나주에 갔다와야 할 것 같아. 이번에 유금필 장군이 수군과 함께 출병하면 반드시 나주를 회복할거야. 그러면 우리가 나주에 가야 해."

"그러자!"

왕무는 이유도 안 묻고 대뜸 그리 대답했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기세였다. 나는 왕무가 보여주는 믿음에 기쁘면서도 쓸쓸했다.

그런 스스로에게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왜 이러는지? 왕무더러 어쩌라는 거야? 왕무가 꼬치꼬치 그 이유에 대해 캐물었으면 내가 얼마나 난감하겠어? 왕무가 이래주는 게 나에게 좋은 건데.'

그런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왕무에게 모든 걸 다 말해버리고 싶어. 나는 미래에서 왔고 남자였고 그래서 견훤이 올 것을 알아서 나주에 가려는 거라고.'

나는 이 시대에 전생한 이래 단 한 사람에게도 내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임희나 상산부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걸 밝혀봤자 일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문득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쓸쓸했다.

'내가 원래 김선우였고 어떤 심정으로 왕무에게 안겼는지 왕무에게 말해버리고 싶어. 내가 왕무를 위해 뭘 포기했는지. 왕무에게 유세하려는 게 아니라 내가 얼마나 왕무를 사랑하는지 보여주고 싶어. 하긴 내가 그러면 왕무는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왕무가 내 말을 믿어도 문제고 믿지 않아도 문제였다. 나는 이상한 쓸쓸함을 억누르며 말했다.

"나주에 가서 오씨 집안의 세력도 좀 재건해야 하고 또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공을 세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신검이 왕위에 올랐으니 백제의 여러 장수와 대신들 중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 사람들 중 몇 명이 나주로 도망칠지도 모르죠."

나는 왕무가 나를 의심하지 않게 적당히 둘러댔다.

"연우야. 왠지 네가 쓸쓸해 보여."

그런데 왕무는 약간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말을 해주지 않아서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왕무는 내 감정을 읽고 있어.'

그것 하나만으로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나는 왕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뭐? 나주에 가고 싶다고? 꼭 지금 그래야겠니?"

왕건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왕건은 간만에 나주왕후를 만나기 위해 나주원에 직접 왔다. 많은 사람들의 예측대로 유금필이 출병하자마자 나주는 다시 고려에 복속됐다. 왕건은 그런 성과를 나주 왕후에게 말해주고 싶어서 달려온 것이다.

그리고 왕건이 오자 오지수는 내 지시대로 왕건에게 눈물까지 흘리며 호소를 하고 있었다.

"외가의 여러 친족들의 제사를 지내야죠!"

"아니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나서 가도 되지 않겠니? 지수야. 응. 그때가 되면 거창하게 준비를 해서 보내주마."

너무 당당한 명분을 내세우는 오지수를 보고 왕건은 땀을 뻘뻘 흘리며 그리 말했다.

'왕건의 심정도 이해가 간다. 지금 여러모로 어수선한 와중에 일을 늘리고 싶지 않겠지. 오지수 등이 나주로 향하면 거기에 또 군사도 딸려보내고 신경을 써야 하니. 그런데 우리는 꼭 나주에 가야하니 어쩔 수 없어.'

왕건의 말을 들은 오지수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통일이 언제 되나요? 올해 되나요? 아니면 내년까지 기다리면 되나요?"

오지수의 말을 들은 왕건은 더욱 당황했다. 운주 전투 이후에는 왕건도 자신이 통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백제의 신검은 여전히 수만의 군사를 거느린 채 버티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시간이 걸릴 거라고 왕건도 생각하고 있었다.

'내년에 되긴 하지만.'

다만 그걸 모르는 왕건은 오지수의 질문에 할 말이 없었다. 물론 내가 진작 왕건이 무슨 핑계를 댈지 예상하고, 오지수에게 예상답변을 알려줬다. 그래서 지금처럼 왕건을 궁지에 몰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지수가 많이 컸구나. 아니 연우야. 지수를 좀 달래보렴."

왕건이 호탕하게 웃으며 오지수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더니 얼렁뚱땅 나를 동원해 위기를 넘기려 했다.

"저도 왠지 며칠 전에 꾼 꿈이 마음에 걸려서……이번만큼은 공주 마마의 말씀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리 말하자 왕건도 약간 멈칫했다. 내가 미리 깔아둔 밑밥이 확실히 통하는 것이다.

그런데 곁에서 나주 왕후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수야! 폐하를 곤란하게 만들어선 안 된다!"

나주 왕후가 서글픈 표정으로 말했다. 나주 왕후는 솔직히 오지수 말대로 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왕건의 처지를 생각해서 오지수를 오히려 꾸짖고 있었다.

나주 왕후의 그 표정을 보고 왕건도 크게 동요한 것 같았다.

"유금필과 함께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백제도 더 이상 대규모 수군을 운용할 여유가 없긴 할 거다. 완산을 방어하기 위해 육군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을테니. 신경을 좀 쓰면 안전에는 문제가 없는데."

왕건이 입맛을 다시면서 그리 말했다. 주위의 여러 사람이 권하니 될 수 있으면 오지수를 나주에 보내주려고 계획을 짜는 것이다.

"저와 정윤 전하가 공주 마마와 함께 잠시 나주에 들렀다가 오겠습니다."

내가 끼어들자 왕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흠 그래. 두 사람은 이미 부석사도 갔다 오고 손긍훈을 구할 때도 함께 출진했지. 그때도 무사히 돌아왔는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야. 그래. 좋다! 다녀오너라. 정윤도 외가의 친족들을 수습해야겠지. 대신 세부적인 계획은 너희들이 좀 알아서 세우렴. 유금필과 의논해서 잘 갔다 와라."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출항 준비는 순조로웠다. 우리를 호위할 군사들도 준비되었다.

어느덧 출항할 날짜가 되었다. 벽란도에서 배를 타고 그대로 나주까지 가는 것이다.

"여러 대호족들이 정윤 전하의 이번 나주 방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정윤 전하께서 통일 전에 외가를 재건하려고 나주에 가는 줄 알고 있어."

먼 길을 떠나는 딸과 사위를 보기 위해 벽란도까지 나온 임희가 개경의 여론에 대해 알려줬다.

"뭐 그래도 대호족들이 감히 우리들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수군을 관장하는 왕만세가 우리 사람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대호족들은 자신들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군 장수들을 움직여 이번 출항을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고려 수군은 왕만세가 전적으로 관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대호족들도 이번 출항을 훼방 놓을 방도가 없었다.

"그런데 굳이 지금 나주에 갈 필요가 있겠느냐? 정윤 전하의 외가를 재건하는 일이야 지금 하나 통일 이후에 하나 같지 않느냐? 지금 우리 정윤파가 수군을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이용해 약간은 무리를 한 건데. 이러면 꼭 나중에 부담을 지게 된다."

노련한 정치가인 임희가 그런 걱정을 했다.

"그동안 나주 왕후 마마께서 마음고생이 심하셨습니다. 전사한 오씨 집안 사람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가문을 재건하는 일을 더는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힘을 좀 썼습니다."

나는 임희에게 그렇게 둘러댔다. 그 말을 들은 임희는 납득하는 기색이었다.

"네 말이 옳다. 나주 왕후 마마의 마음을 내가 생각 못했구나. 어쨌든 나주에 잘 다녀오너라. 개경의 상황은 내가 살피마."

임희가 믿음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런 임희에게 손을 흔들며 나는 왕무, 오지수와 배에 올라탔다. 나는 바다를 보며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꼈다.

'드디어 처음으로 견훤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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