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6 : 나주 >
나와 왕무는 석실 안에서 한참동안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왕무의 손이 내 옷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나는 거부감 없이 왕무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근데 여기서 끝까지 가기에는 무리야. 이불도 없고.'
그러다가 퍼뜩 그런 생각이 든 나는 입을 살짝 떼며 뭐라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왕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주원으로 가자."
"응."
우리 둘의 마음이 잘 맞는 것 같아 나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업혀. 빨리 가자."
왕무는 등을 내 쪽으로 향했다. 내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왕무에게 업혔다. 나를 단단히 붙든 왕무는 뛰기 시작했다.
'너, 너무 빨라.'
좁은 지하비밀통로의 길을 왕무가 전력질주 하고 있었다. 사람 하나를 업고도 왕무는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우물바닥에서 입구로 기어오르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왕무가 너무 무리하면 안 되는데.'
나는 그리 말해주고 싶었는데 그럴 겨를도 없었다. 나와 왕무는 어느새 나주원의 우리 처소에 당도해 있었다.
'축지법이라도 썼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무의 등에서 내려왔다. 왕무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숨을 좀 돌려."
나는 처소 안의 물주전자를 들어서 그릇에 따라주려고 했다. 그런데 왕무는 그런 나를 자신의 품속에 끌어안으며 말했다.
"약간 뛰었다고 숨이 찬 게 아니야."
그러더니 왕무가 그대로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왕무의 손은 다시 자연스레 내 가슴 쪽의 옷자락 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니 귀신같이 왕무의 숨결이 편안해졌다.
'나 때문에 호흡이 거칠어진 거구나. 그런데 비밀통로에서 여기까지 거리도 만만치 않은데 왕무가 대단하긴 대단하네. 그 속도로 달리고도 흔들림이 없으니.'
내 입속을 오가는 왕무의 혀를 느끼며 나는 어깨를 젖혔다. 어느새 내가 걸치고 있던 겉옷이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왕무는 자연스레 속옷만 입고 있는 나를 침상 쪽으로 이끌었다. 문득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마음의 각오는 끝냈어. 그런데 내가 물리적으로 왕무를 감당해 낼 수 있을까? 부부가 되려면 좀 아플텐데. 왕무가 힘이 워낙 좋으니.'
그러는 사이 왕무는 나를 침상에 눕혔다. 그리고 왕무 역시 자신의 상의를 벗고 내 위에 올라탔다. 왕무 아래 깔린 채 그 얼굴을 바라보던 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평소 왕무 얼굴과 너무 달라.'
이런 각도에서 왕무의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이라 그런지, 아니면 상황이 이래서 그런지 왕무의 얼굴이 낯설었다.
여전히 수려한 건 맞았다. 그런데 상기된 정도를 넘어선 왕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왕, 왕무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그런데 왕무가 내가 알던 왕무가 아닌 것 같아.'
논리적으로 말도 안 됐지만 그런 생각 때문에 나는 무서웠다. 그러나 지금 침상 위에서 내가 의지할 건 또 왕무 밖에 없었다.
나는 왕무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몸을 움츠렸다.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빨리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야."
왕무는 그런 나를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더 이상 뭔가를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사람 마음이 신기한 게 그렇게 기분 좋은 압박감을 느끼며 한참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나는 침상 위에서 찬찬히 왕무의 몸을 살폈다.
전장에서 활약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근육이 장난이 아니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팔근육을 쓰다듬으니 왕무의 팔이 덜덜 떨렸다. 그게 재밌어서 나는 손을 왕무의 등쪽으로 가져갔다. 내가 등 이곳저곳을 쓰다듬으니 왕무의 몸 전체가 떨렸다.
"연우."
왕무는 짧게 그리 중얼거리며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나는 다시 한 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엄청 상기되어 있기는 하지만 내가 아는 그 왕무였다. 눈가에 나만이 알 수 있는 왕무 특유의 그 청순함이 보였다.
'아까는 왜 그런 어이없는 생각을 한 건지?'
침상 위에서 몸을 꽉 끌어안고 있다 보니 나와 왕무의 몸에서 땀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의 땀이 뒤섞이고 있었다. 땀 때문에 나와 왕무는 그야말로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내 손길이 가는 곳마다 왕무의 몸이 떨리니 더 그랬다. 왕무의 몸이 내 몸 같기도 했다. 어느새 왕무의 손도 내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나는 왕무에게 파묻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왕무와 살을 맞대고 있으니 이젠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왕무의 입에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혀가 오갔지만 이걸로는 확실히 부족했다. 왕무도 이제 참을 수 없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이 왕무에게도 전해진 것 같았다.
'이게 불립문자인가? 지하 비밀통로에도 분명 그런 글이 새겨져 있었어.'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여력이 남아있긴 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 나는 그런 생각 따위를 할 수 없게 됐다.
얼핏 침상이 부서지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살짝 하기도 한 것 같은데, 나도 그냥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몸을 맡겼다.
'이게 삼일째인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는 내 곁에 누워 잠들어 있는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걱정을 했다. 나도 기분좋게 자다가 막 일어났다. 3일 동안 나는 침상에서 한번도 벗어나지 않았다. 왕무는 그나마 나를 위해 일처리를 하기 위해 한번 나가긴 했다.
내 건강이 안 좋아 한림원에 나가지 못한다는 전갈을 보내고 왕무도 군영에 못 나간다고 알리기 위해서였다.
왕무도 일처리를 하고 나서는 침상에서 하루종일 나와 함께했다. 나와 왕무야 이 신분제 사회에서 지위가 높았다. 그러니 이리 침상에 누워만 있어도 시녀들이 식사를 가져왔다. 그러면 우리 부부는 가져다주는 밥을 먹고 또 하루종일 침상에서 달라붙어 있었다.
자고 있을 때도 나와 왕무는 항상 서로 껴안고 잤다.
'옛날에 왕이나 귀족들이 이러다가 망했는데. 근데 기분이 너무 좋긴 하다. 내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많이 아프지도 않아. 그리고 재밌고 시간도 잘 가고.'
그런데 그 순간 왕무가 눈을 떴다. 막 잠에서 깬 왕무의 얼굴을 보고 나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입가에 왕무가 지은 표정이 순수해보였다.
"연우야."
잠에서 깬 왕무가 다시 나에게 올라탔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따지고 보면 엄청난 일을 겪은 거잖아. 김선우였다가 임연우가 됐고. 뭔가 고민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왕무가 여유를 안 줘. 왕무는 지치지도 않나?'
나는 잠깐 그런 투정을 속으로 했다. 그러나 말 그대로 투정이었다.
복잡한 고민이나 고뇌보다는 재밌고 시간도 잘 가는 쪽에 사람 마음이 쏠리게 되어있었다. 나는 다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연우야. 하루만 더 쉬자."
내 앞에서 왕무가 그렇게 떼를 썼다. 왕무의 탄탄한 가슴근육과 복근이 보여서 나는 마음이 흔들렸다.
'나도 계속 이렇게 있고 싶어. 하지만……'
바깥의 정세가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유금필이 나주를 회복하기 위해 출전하려하고 있었다.
'나주와 연고가 깊은 나와 왕무가 이때 침상에만 있으면 아무 일도 안 된다. 미리 작업을 해놔야 해.'
결국 왕무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내가 겨우 먼저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정윤 전하께서도 오늘은 군영에 나가보세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연우야."
왕무가 그런 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탄탄한 왕무의 몸을 보고 나는 얼굴을 붉혔다.
'저렇게 단련한 왕무도 나한테는 꼼짝도 못 해.'
이런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다. 아침나절에 잠깐이라도 다시 왕무와 다시 재밌고 시간이 잘 가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 바빠서 시간이 없는데 시간이 잘 가는 일을 하면 큰일 아닌가?'
나는 겨우 유혹을 뿌리치고 침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로서는 간만에 한림원에 나오는 셈이었다. 내가 서둘렀는데도 좀 늦은 것 같았다. 왕건이 이미 한림원에 와서 자신의 책상에 책을 가득 쌓아둔 채 일을 하고 있었다.
나주로 유금필의 수군을 보내야 하니 왕건도 열심히 자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이리 일이 다급한데 며칠이 그리 흘러가다니. 아니야 이렇게 후회를 하기에는 너무 좋았어. 그래도 하루 정도는 더 일찍 나왔어야 했나?'
내 기분도 오락가락 했다.
책을 훑어보고 있던 왕건이 내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연우야! 건강이 안 좋다더니 정말 심하게 앓은 모양이구나!"
왕건이 그렇게 외치니 한림원 학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쪽으로 쏠렸다. 학사들도 내 얼굴을 보더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윤비 마마.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어찌?"
한림원령 최언위마저 나에게 다가와서 물었다. 점잖은 최언위가 걱정스레 말하는 것을 보니 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필 몸이 안 좋다고 핑계를 대서. 그건 그렇고 왕건은 왜 이리 호들갑을 떠는지?'
나는 민망함을 참으며 최언위에게 말했다.
"이제 다 나았습니다. 사실 요 며칠 심란한 꿈을 꿔서 잠을 잘 못 잤습니다."
내가 교묘하게 미끼를 흘리니 왕건이 걸려들었다.
"꿈? 무슨 꿈이냐? 어이. 나만 듣게 모두들 가서 일이나 해."
왕건이 최언위와 학사들에게 그런 명을 내리며 나를 불렀다. 왕건이 점, 징조, 풍수 같은 것을 좋아할 뿐만 아니라 신비로운 꿈에도 흥미를 갖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물론 왕건이 이런 것에 휘둘린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자기 소신과 입맛에 안 맞으면 풍수고 뭐고 다 무시하는 게 왕건이었다. 애초에 그런 것을 맹신하는 사람이 삼한통일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만 그와 관련된 이야기 자체는 매우 좋아했다. 무조건 그런 이야기는 들어야 하는 게 왕건이였다.
"그냥 별 거 아닌 꿈일 수도 있는데……"
나는 짐짓 뜸을 들였다.
"연우 너는 내 조모님 꿈도 꾸고 신통한 면이 있다. 혹여 중요한 꿈일 수도 있으니 나한테만 살짝 말해라."
왕건이 꼬치꼬치 캐물었다.
"웬 노인 하나가 꿈에서 나타나 왜 외손주며느리가 한번도 나를 찾지 않냐고 저를 원망했습니다. 그 꿈을 며칠째 꿔서 잠을 잘 못 잤습니다."
"그래 그 노인이 어찌 생겼느냐?"
"키가 크고 코는 매부리코에……"
내가 길게 말을 늘어놓는데 왕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본 건 바로 나주 왕후의 부친인 오희다. 똑같아. 연우 너는 오희를 만난 적이 확실히 한번도 없구나. 그런데 그가 네 꿈에 나타나다니. 이게 무슨 징조일까? 조만간 내가 나주를 수복하려 하는데 내가 쉽게 뜻을 이룰 거라는 뜻인가? 그래 확실하다. 백제도 지금 어수선하고. 그러고 보니 연우 너는 들었느냐? 견훤이 쫓겨났다! 그 소식이 들어온 날 난리가 났었는데 연우 너는 없었구나."
"예. 저도 들었습니다."
드디어 왕건과 고려 조정도 신검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견훤을 데려오기 위해 밑밥을 하나 깔아둔 것이다.
'정말 시간이 촉박하다. 나주는 유금필이 수군을 이끌고 가자마자 고려에 다시 항복한다. 하긴 백제에 그 큰 난이 일어나 견훤이 쫓겨났어. 나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지.'
이건 미래 지식이 없어도 당연히 예측할 수 있었다.
'유금필이 나주를 되찾고 나면 즉시 오지수를 동원해 왕건에게 나주에 가고 싶다고 호소를 해야 해. 이때 왕건이 내 꿈에 오희가 나와 원망을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우리 뜻대로 움직여 줄 확률이 높아.'
당연히 꿈 이야기는 내가 지어낸 것이었다. 나주왕후의 부친 오희의 용모에 대해서는 나주왕후에게 들었다. 왕건도 잠깐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건은 자신에게 유리하다면 이런 신비로운 이야기는 믿으려는 경향이 강한 사람이었다. 왕건 본인이 직접 이런 이야기를 만들려고 할 때도 많았다.
그래서 왕건은 내 꿈 이야기를 믿는 기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