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5화
105. 교동도
다음 날 나주원에 찾아온 왕만세에게 나는 미리 준비한 하사품을 건넸다. 면포와 약간의 은이었다.
“정윤 전하께서 내리시는 것입니다. 장군을 인재라고 생각하시고 많이 칭찬하셨습니다.”
물론 내 말은 거짓이었다.
“아, 뭐 그렇습니다.”
내 곁에서 왕무는 어물거리며 말했다. 자기가 하지도 않은 칭찬을 내가 했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것이다.
그래도 왕만세는 집안의 어른이기에 고지식한 왕무도 내 거짓말에 맞장구를 쳐줬다.
“소장을 그리 봐주시다니 영광입니다.”
왕만세는 활짝 웃으며 하사품을 받았다. 나와 왕무, 왕만세는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헤어졌다.
‘이런 식으로 2년간 친분을 다져둬야지. 왕만세가 나주원에 드나들며 하사품을 받아가는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왕만세를 정윤파로 간주할 것이다.’
나는 멀어져가는 왕만세의 뒷모습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왕만세가 떠나자마자 시녀가 달려와 말했다.
“병부낭중께서 정윤 전하와 정윤비 마마를 찾아오셨습니다.”
‘임연객은 아직도 병부낭중이야? 승진은 언제 하는 걸까? 곧 한다더니. 그건 그렇고 왕무와 왕만세에 대해 더 논의하려 했는데. 왜 하필 지금.’
내가 속으로 투덜거리는데 왕무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모셔라.”
임연객은 숨까지 몰아쉬며 우리 앞에 나타났다. 급하게 달려온 것 같았다. 그러더니 대뜸 입을 열었다.
“드디어 받아냈다. 연우야.”
“뭘?”
내가 묻는데 임연객은 숨을 고르다가 입을 열었다.
“격구단 창건을 위해 비룡성에서 드디어 군마를 살 수 있게 허가를 내줬어. 자 봐라. 비룡성에서 내준 이 패가 있으면 군마 25필을 살 수 있다.”
“어. 일이 잘되고 있으니 다행이네. 말은 반드시 좋은 걸로 사줘.”
나는 격구단과 관련해서는 모든 것을 임연객에게 일임하고 있었다. 임연객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더니 일을 잘 진행시킨 모양이었다.
나는 유사시 기병으로 활용할 목적으로 격구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런만큼 말은 반드시 우수한 걸 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왔어. 연우 너도 같이 가서 말을 고르자. 지금 내가 필생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뛰고 있는데 만전을 기해야지. 여러 사람이 보면 볼수록 실수가 적어지니. 정윤 전하께서도 오셔서 말을 좀 함께 봐주십시오.”
임연객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마음이 좀 우울해졌다.
‘격구단 만드는 걸 필생의 대업이라고 하다니…… 우리 가문의 미래가.’
다만 그것과 별개로 군마를 보러 가고 싶긴 했다.
‘이 시대는 기병이 중요하다. 그래서 왕건이 개경에서는 호족들이 기병을 거느리지 못하게 막은 거고. 그런만큼 군마에 대해 정보를 수집해놓으면 좋아. 직접 눈으로 봐야 감이 잡히지.’
“좋아. 가자고. 정윤 전하도 저와 함께 가주세요. 오라버니가 진짜 좋은 말을 구하는지 감시해 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왕무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왕무의 얼굴색이 약간 상기됐어. 눈매를 봐도 그렇고 확실히 기뻐하고 있군. 왕무도 격구단에 흥미를 느끼는 거 같아. 역시 격구단은 잘 만들었어.’
나는 기분이 좋아져서 싱긋 웃었다.
“아니, 나를 뭘로 보고. 나는 병부에서 오래 일해서 좋은 말을 고를 자신이 있어. 다만 만전을 기한다는 의미에서 함께 가자는 거지. 어쨌든 군마를 보러 갈 거면 연우 너도 휴가를 한 이틀 내야겠다.”
임연객은 약간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휴가는 왜? 그냥 오후쯤에 잠깐 말만 보고 돌아오면 안 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냥 보통 말은 개경 내에서도 구할 수 있지만 격구에 쓸 뛰어난 군마는 섬까지 들어가서 봐야 해. 섬 목장에서 키우는 게 진짜배기야. 개경에서 가까운 교동도에 가서 말을 보고 올 거야. 가까운 섬이긴 해도 오고 가고 하려면 이틀은 걸리지.”
임연객이 말했다.
‘그냥 간단히 보고 올 줄 알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네. 섬까지 들어가야 해?’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한림원에서 한번 잘릴 위기를 겪은 후 나는 휴가를 안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런데 내 곁에서 왕무가 외쳤다.
“나 역시 조만간 시간을 비워두지. 요새 군영의 일이 그리 바쁘지 않다.”
왕무는 말을 보러 갈 생각에 들뜬 것 같았다.
‘나도 그냥 휴가나 내야겠다.’
나는 왕무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런 결심을 했다.
* * *
다음 날 나는 한림원에 나가서 왕건의 눈치를 봤다. 왕건의 기분이 좋을 때 휴가 얘기를 꺼낼 작정이었다.
그런데 왕건이 일을 보다가 나를 먼저 불렀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너와 정윤이 요새 만세와 친해졌다고 들었다. 너무 초조해 하지 말거라. 급하다고 사람만 모으면 오히려 역효과야. 양길이라고 들어봤니? 내가 젊었을 때 북원에서 세력을 떨치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중에 급하다고 이 사람, 저 사람 끌어 모으다가 손발이 안 맞아서 망했다.”
왕건은 자기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왕건은 아무래도 왕만세를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와 왕무가 급해져서 아무나 다 끌어들인다고 여기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나름 나를 생각해서 조언을 건네는 것 같았다.
“폐하께서도 만세 공을 장군으로 삼아 중용하지 않으셨습니까?”
천우위 해령 장군이면 도무지 중용한 거라 볼 수 없지만 나는 짐짓 순진한 척 빈말을 했다.
“만세와는 내가 깊은 대화를 못 나눴다. 다만 생긴 게 멀쩡하고 이름이 듣기 좋아서 천우위 장군으로 삼은 거다. 얼마나 기분이 좋아! ‘장군 왕만세입니다.’라고 하면 마치 나한테 만세라고 외치는 것 같거든. 하긴 너와 정윤도 그래서 만세와 친해진 거니? 그건 또 괜찮네.”
왕건이 이죽거렸다.
‘왕만세가 들으면 기분이 진짜 나쁠 것 같네.’
다만 함부로 사람을 모으지 말라는 왕건의 말을 듣는 척은 해야 했다. 왕건은 호의로 조언을 건네고 있는데 그걸 무시할 순 없었다.
“앞으로는 주의하겠습니다. 다만 만세 공과는 이미 친분을 쌓았으니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한두 명 정도야 괜찮지. 만세는 그래 너희가 계속 돌봐주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비밀 얘기 하나 해줄까?”
왕건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예, 해주십시오.”
별로 듣고 싶지 않았지만 나는 예의상 그리 대답했다.
“내년쯤에 내가 일통삼한을 할 것 같다. 그때가 되면 내가 수군 쪽에도 적당한 사람들을 너희에게 소개해 주마.”
왕건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예. 기대됩니다.”
이미 미래 역사를 아는 내가 듣기에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였지만 나는 굽신거렸다.
“그래, 내년까지만 참아라.”
왕건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래서 나는 기회를 틈 타 슬쩍 내 용건을 말했다.
“저 격구단에 쓸 말을 보러 가야 해서 이틀간 휴가를 내려고 하는데 괜찮습니까?”
“오호. 그러고 보니 팔관회까지 얼마 안 남았구나. 그래 그런 중대한 문제라면 당연히 휴가를 내야지. 며칠 더 내도 된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덩치가 크고 힘 좋은 말을 고르렴. 그래야 격구 경기를 할 때 상대방을 힘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지. 말은 크면 클수록 좋아.”
왕건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런 조언을 건넸다.
* * *
말을 고르기 위해 교동도로 출발하는 날이 되자 나주원이 북적거렸다.
‘원래는 나와 왕무, 임연객만 가려고 했는데.’
나는 열심히 짐을 챙기고 있는 오지수와 소녀들을 바라보았다. 교동도로 간다는 소리를 듣자 오지수가 우리를 졸라대었다.
“저도 교동도에 따라갈래요. 그리고 언니! 그냥 말없이 학관을 졸업하는 게 어디 있어요? 학관에서 언니와 친했던 사람들은 다 서운해 했어요. 언니 학관 졸업 기념으로 친구들도 초대해서 다 같이 가요.”
오지수의 말이 상당히 타당했다. 그래서 오지수와 시간이 되는 학관 친구들도 함께 교동도로 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많으니 북적거리고 좋다. 하하하. 원래 교동도가 풍광이 좋아. 말도 고르고 잘 놀다 오자.”
내 곁에서 임연객은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사실 나도 기분이 좋긴 했다.
‘소풍 분위기도 나고 좋네.’
어쨌든 출발 준비를 마친 일행은 수레를 타고 벽란도로 향했다. 벽란도는 개경 인근에 있는 항구였다.
벽란도는 세금을 실어 나르는 선박들과 무역을 위한 상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한쪽에 우리가 타고 갈 배도 있었다.
“배가 엄청 크네. 사람들 수는 적은데 배가 너무 어마어마한 거 아니야?”
나는 임연객을 보며 말했다.
“군마를 실어 나르는 배니 당연히 크지. 원래 매일 교동도까지 오가는 배야. 우리 때문에 준비한 배가 아니야.”
“음 그렇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과 함께 배에 올랐다.
“전하를 뵙습니다. 교동도까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우리가 배에 오르자 선장과 선원들이 예를 올렸다.
“와 신난다.”
오지수와 소녀들은 생전 처음 타보는 큰 배 갑판 위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나는 결혼을 했으니 이제 저렇게 뛰어다니지는 못하지. 아니 그 전에도 남자니까 저렇게 학관 소녀들과 어울리지는 못했어.’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즐겁게 재잘대는 오지수와 소녀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내 옆에서 임연객은 진지한 표정으로 왕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제가 다년간 격구장을 다니며 봐 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과 접촉하고 있습니다. 정윤 전하께서 따로 천거하실 사람은 없으십니까?”
“사실 군영 군관들 중 그쪽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 몇 명 있긴 하다.”
왕무도 뱃전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나는 격구에 대해 잘 모르지만 왠지 그 대화에 끼고 싶었다.
“선수들은 그렇다 치고 말을 고를 땐 크고 힘이 좋은 걸 골라야 한다고 들었어. 돌파를 하려면 말이 크면 클수록 좋다고 하더라고.”
내가 아는 척 하며 입을 열었다.
“아니 누가 그래? 격구 대회 할 때마다 선수며 말들이 다쳐나가게 하는 방식이지. 나 참 그건 폐주 시절에나 쓰던 낡은 전술이야. 연우야! 절대 현혹되면 안 돼. 네가 격구단을 갖게 된다는 걸 알고 온갖 어중이떠중이가 곁에 달라붙어 이상한 소리를 하는 모양인데, 제발 나만 믿어. 안 그렇습니까? 정윤 전하.”
임연객이 입에 거품을 물며 말했다.
“요즘에는 그런 구태의연한 방식을 따르지 않지.”
왕무도 임연객의 말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좀 날렵하고 눈치가 빠른 말들을 구해야 합니다.”
임연객이 그렇게 열변을 토했다.
‘하, 괜히 왕건의 말만 믿고 나서서 무안만 당했네.’
그래도 나는 기분이 좋았다. 임연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왕무의 표정이 진짜 편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벽란도에서 교동도까지는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어느덧 일행은 그대로 섬에 도착했다. 풍경이 좋긴 좋았다.
여기저기서 말들이 힘차게 뛰어다니며 풀을 뜯고 있었다. 몇몇 목동들이 그런 말들을 보살피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느긋한 표정이었다.
나와 왕무가 상륙하자마자 섬 목장을 지키는 비룡성 관리가 달려와 예를 올렸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듣고 선착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말을 보러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말을 보는 것은 국선과 병부낭중이다. 나는 그저 국선을 따라왔다.”
왕무가 그리 말했다. 어쨌든 왕건이 왕족들은 격구단을 가질 수 없게 명을 내렸다.
그래서 형식상으로 왕무는 내가 가진 격구단에 조언만 해주는 위치였다.
“국선? 아, 정윤비 마마 말씀이시군요. 예, 정윤비 마마. 말들을 좀 보십시오. 이곳의 말들은 모두 우수합니다. 사실 굳이 고르실 필요 없이 그냥 눈에 보이는 25필을 골라 가셔도 됩니다.”
비룡성 관리가 자부심이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호 그러면 편하긴 하겠군.”
내가 그리 말하는데 내 뒤에서 임연객이 헛기침을 했다.
“험험.”
“뭐 그래도 말들을 다 살펴보긴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만약 비상 상황이 생기면 이 말들은 어디로 대피하는가?”
나는 비룡성 관리에게 넌지시 물었다.
“비상시라고 하시면? 아 태풍 말씀이십니까? 그런 상황에 대비해 축사를 튼튼하게 지어놨습니다.”
“아니 뭐 해적이 습격하거나 외적이 침범할 때.”
내가 말하자 비룡성 관리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있습니까? 교동도는 개경 코앞에 있는 섬이라 매우 안전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근심에 휩싸였다.
‘2년 뒤에 백제수군이 와서 이곳 말들을 다 털어가게 생겼군. 대비가 하나도 안 되어 있어. 고려 수군이 백제 수군에게 무너지면 이런 섬 목장은 고립되고 여기 말들은 홀랑 다 백제 측에 넘어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