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04화 (104/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04화

104. 포섭

왕평달, 마후라의 병문안을 마친 다음 날, 한림원에서 왕건이 나를 가까이 부르더니 속삭였다.

“그래 왕식렴이 너희들을 밀어준다고 하든? 빨리 대답해 봐라. 궁금해 죽겠다.”

이제 와서 궁금하다고 하는 왕건을 보니 나는 울화가 터졌다.

그러나 왕건의 지원이 있어야 버티는 게 나와 왕무의 처지였다. 왕건이 묻는데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다.

“서경유수께서 곤란해 하셔서, 그냥 나중에 작은 부탁 하나 드리는 걸로 마무리 지었습니다.”

“흐음. 그래 내 그리될 줄 알았다. 왕식렴이 서경을 재건할 때 충주나 황주 쪽에서 식량이며 물자 지원을 많이 해줬어. 서경 사람들도 그 도움을 기억하고 있고. 아무리 숙부님이 그리 말씀하셔도 왕식렴이 너희들을 돕기 어려운 처지다. 부탁 한번 할 권리라도 받아낸 것도 성과다.”

왕건이 고개를 끄덕이며 분석했다.

‘왕건 직업이 무슨 정치평론가야? 아니 어느 정도 일이 수습되면 우리를 밀어준다고 해놓고선.’

나는 평론가 같은 왕건의 얼굴을 보니 불안해졌다.

“저 구산사에서 향을 피워놓고 하신 말씀은…….”

나는 너무 갑갑해서 그때 일을 거론했다. 그때 분명히 왕건이 우리를 밀어준다고 얘기했었다.

‘내가 미래에서 역사서를 읽고 와서 왕건이 무슨 행동을 할지는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속마음은 도저히 모르겠어.’

그런데 내가 그 말을 꺼내자마자 왕건이 기겁을 했다.

“쉿쉿. 그 이야기는 꺼내지 마라.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하지만 주변의 한림원 학사들은 멀리서 책을 뒤적거리고 있어서 우리에겐 관심이 없었다.

“아무도 안 듣습니다.”

내 말을 듣고 왕건은 겨우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그때 내가 부처님 앞에서 거짓말을 안 할 거라고 맹세하지 않았느냐? 암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다만 아직은 통일이 안 됐잖니?”

“예, 폐하.”

그 말을 들으니 나는 약간은 안심이 됐다.

‘왕건은 불교를 신봉하니 맹세한 걸 지키겠지.’

“그래. 그건 그렇고 왕식렴에게 무슨 부탁을 할지는 생각해 놨니? 혹여 생각이 안 나면 내가 조언을 좀 해줄까?”

왕건이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생각해 놨습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왕건 본인의 부탁을 나와 왕무의 부탁인 것처럼 포장해서, 왕식렴에게 뭔가를 뜯어낼 속셈이 언뜻 엿보였다.

“그래? 벌써 생각이 있어?”

왕건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예, 폐하. 그럼 저는 이제 돌아가 일을 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 쳤다. 계속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나마 얻어낸 것도 왕건에게 뺏길 참이었다.

“연우야. 이걸 말해주는 걸 까먹었구나. 아무래도 숙부님이 위독하시니 격구대회는 좀 연기하기로 했다. 날짜를 계산해 보니 팔관회 날 격구대회를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벌써 팔관회가 다가오다니. 1년이 다 갔구나.”

왕건이 말했다.

나도 왕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어느 순간 또 1년이 흘렀다.

‘연초에 고창에서 견훤과 싸우고, 이후에 이것저것 하다 보니 연말이네. 고창에서 공을 좀 세운 거 말고는 한 게 없어.’

그리 생각하니 나는 또 초조해졌다.

* * *

우리가 병문안을 마치고 얼마 되지 않아 왕평달이 별세했다. 마후라 대사 역시 곧 입적했다.

왕평달의 빈소는 왕평달의 저택에 차려졌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세상을 떴으니 빈소에 수많은 사람들이 끝없이 조문을 갔다.

나와 왕무 역시 조문을 하러 가야 했다.

‘왕평달의 빈소에는 왕씨 일족들이 다 모일 테니 이 기회를 틈타 끌어들일 수 있는 사람은 끌어들여야 한다.’

나는 그런 계산을 했다. 이제 공은 어느 정도 세웠고 명성도 얻었다. 거기에 표천현의 은광으로 돈도 확보해 놨다.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모아 세력을 확장할 때야.’

이미 슬슬 왕위계승경쟁은 시작되고 있었다. 고창 전투 이후 대호족들이 나를 한림원에서 내보내려고 공격을 한 바 있었다.

내가 최치원을 끌어들여 그 공격을 물리치자 놀랐는지 잠잠해졌지만, 앞으로는 점점 공격이 거세질 것이다.

나와 왕무도 사람을 모아야 했다.

‘다만 문제는 이미 왕씨 일족 중에서 유력한 사람들은 다 기존의 대호족들과 관계가 깊다는 거야. 왕식렴의 경우처럼. 내가 너무 늦게 등판했다.’

지난 몇 년간 유긍달, 황보제공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우리 쪽에 가담할 확률은 없었다.

‘그러니 대호족들이 포섭하지 않은 사람들을 모아야 하는데 그 사람들의 문제점은 대개 지위가 낮거나 능력이 없다는 거지. 이런 사람들은 모아봤자 도움이 크게 안 되지. 도움이 안 되니 대호족들이 안 건드린 거라서.’

이게 실제 역사에서 왕무가 고생한 이유였다. 나중에 왕건이 밀어주고 왕무가 왕위에 올라도 세력을 만들기가 어려웠다.

‘흐흐흐, 하지만 지금 왕무에겐 내가 있다는 거! 나라면 이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 해결방법은 간단하다. 지금은 변변치 않지만 나중에 유력인사가 되는 왕씨 일족을 포섭하면 되는 거지. 주식으로 치면 저평가 우량주를 사놓는 거야.’

물론 저평가 우량주를 찾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나처럼 미래 지식이 있는 사람에겐 너무 간단한 일이다.

‘조만간 왕씨 일족들 사이의 역학관계가 바뀔 대사건이 터진다. 흐흐흐. 그때를 대비해서 이 사람을 포섭해야 놔야지.’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이 왕평달을 조문할 때쯤에 우리도 빈소에 갈 필요가 있었다. 이러면 다른 사람의 의심을 사지 않고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하인을 그 사람 집 앞에 보내 놨다. 그 사람이 왕평달을 조문하기 위해 출발하면 즉시 나에게 알리게 명을 내렸다. 그 시간에 맞춰서 나와 왕무도 움직일 작정이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르는 왕무는 계속 나를 보챘다.

“국선. 한시라도 빨리 작은 할아버님의 빈소에 가야 하지 않습니까? 준비를 다해놓고 왜 이리 지체하는 것입니까?”

내 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며 왕무가 말했다.

“아직 옷차림을 다 갖추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전하.”

나는 어물거리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국선. 그래도 조금은 서둘러 주십시오.”

왕무는 그러더니 얌전하게 내 방 밖에서 기다렸다. 다만 초조해 보이긴 했다.

‘그냥 왕무에게도 솔직하게 이야기해 줄까? 아니야. 고지식한 왕무는 내 계책을 듣고 상심할 수도 있어. 걔는 나랑 약속했다고 진짜 침상을 따로 쓸 정도로 고지식하니.’

어쨌든 내 계책은 왕평달의 장례식을 세력확장의 계기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왕무는 순진한 면이 있기 때문에 이런 계산에 거북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모든 것을 혼자 추진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내가 보낸 하인이 오래지 않아 시녀를 통해 소식을 전했다.

“그 사람이 왕평달 공을 조문하기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왕무에게 외쳤다.

“지금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행입니다.”

왕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와 함께 궁 밖으로 나섰다.

‘그 사람은 지금 지위가 낮아 개경 외곽 쪽에 산다. 왕평달의 빈소까지 도착하는 데 한참 걸릴 거야. 우리 쪽은 하인이 여기까지 소식을 전하느라 지체한 시간이 있지만 빈소까지 거리가 가깝다. 지금 출발하면 자연스레 만날 수 있다.’

* * *

나와 왕무는 수레를 타고 왕평달의 집 앞에 도착했다. 우리가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 상주인 왕식렴이 직접 집 밖까지 나왔다.

“정윤 전하를 뵙습니다.”

“참 안타깝습니다.”

왕무는 왕식렴을 위로하며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와 왕무는 빈소에서 향을 피우고 절을 했다. 막 조문을 마친 다른 왕씨 일족들도 나와 왕무를 보고 굽신거렸다.

“잠시 모여 이야기나 나누다 가면 좋겠습니다.”

왕무가 조문객들을 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향을 피우고 절만 하고 훌쩍 빈소를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예의상 잠시 앉아서 손님들과 이야기라도 나눠야 했다. 왕무는 자연스레 막 조문을 마친 친척들과 대화를 나누다 갈 작정이었다.

“예, 정윤 전하.”

조문객들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자리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그 중 한 사람의 이름을 듣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키가 크고 말끔하게 생긴 한 중년인이 예를 갖추며 말했다.

“전하 저는 천우위 해령 장군 왕만세라 합니다.”

“당숙 어른이셨군요.”

왕만세의 이름을 듣고 왕무가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괜찮습니다. 예를 거두십시오.”

왕만세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좋아. 드디어 왕만세를 만났군. 참 이름을 기억하기 쉬운 사람이라 다행이야. 이름이 만세라니.’

왕만세는 왕식렴과 마찬가지로 왕건의 사촌동생들 중 하나였다.

왕건도 대호족들이 막강한 사병을 거느리고 있는 상황에서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왕씨 일족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했다.

특히 수군 같은 경우에는 거의 왕씨 일족들이 독차지하고 있었다. 왕씨 집안이 대대로 해상무역에 종사해 왔기 때문에 수군 쪽에는 전문성이 있었다. 왕건 본인도 뛰어난 수군 대장이었다.

‘그나마 수군이라도 이리 쥐고 있으니 왕건이 밤에 잠을 좀 편히 자지. 수군마저 호족 연합군이었으면 살 수가 없을 거야.’

다만 왕건의 친척도 한둘이 아니었다. 사촌들만 해도 수십 명이었고 오촌, 육촌 친척들도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등용하고 있었다.

왕씨 일족들 사이에서도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왕식렴처럼 유력한 사람은 소수였다.

‘천우위 해령 장군이면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한직이지.’

천우위 자체가 의전을 위해 만든 부대였다. 그중에서 해령은 수군 예식을 맡고 있었다. 물론 의전이 주 임무라도 난세인 만큼 훈련을 받아 전투력이 있긴 했다. 해령 같은 경우에는 수군 의전을 위해 자체 전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수백 명 수준이었다. 도무지 핵심 보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2년만 기다리면 대사건이 터져서 지금 수군의 핵심 보직을 담당하고 있는 유력한 왕씨 일족들이 다 물러난다.’

2년 뒤의 대사건이란 바로 백제수군이 예성강을 공격한 일을 말했다.

‘지금 사람들에게 말해줘도 아무도 안 믿을걸. 견훤이 30년간 바다에서는 연전연패했는데. 갑자기 수군을 길러서 예성강을 치다니.’

예성강이면 고려 수도 개경 앞을 흐르는 강이었다. 여기까지 백제 수군이 와서 고려 수군을 거의 궤멸시키는 일이 진짜 일어난다.

내가 통일이 다 된 것인 양 구는 왕건을 보며 혀를 차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어쨌든 이런 참사가 벌어지니 격노한 왕건은 지금의 수군 지휘부에게 책임을 묻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왕씨 일족이 아닌 다른 가문에 수군을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예성강 패전 참사에 책임이 없는 왕씨 일족을 찾다가 졸지에 한직에 있던 왕만세를 승진시켰다.

결국 이 왕만세가 수군의 총책임자로 삼한통일 때까지 활약하게 된다.

‘참 미래 지식이 있으니 이걸 다 예상하고 왕만세에게 접근하지. 그런 정보가 없었으면 왕만세는 그냥 한직에 있는 잘생긴 아저씨야.’

예식을 위한 천우위에 있어서 그런지 왕만세는 확실히 말끔하게 생기긴 했다.

“장군. 장군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내일 한번 나주원에 찾아오십시오. 정윤 전하 어떻습니까?”

나는 가만히 있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예?”

내 권유에 왕만세는 좀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런 식의 권유는 일종의 영입제의였다. 이런 제안을 갑자기 받으니 왕만세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국선의 뜻대로 하십시오.”

왕무는 잠깐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망설이던 왕만세가 결단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그럼 내일 천우위 일을 마치고 찾아뵙겠습니다.”

왕식렴과 달리 지금 한직에 머물러 있는 왕만세는 내가 내민 손을 잡은 것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