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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98화 (98/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8화

98. 시

나는 학관 수업을 마치고 한림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개경에 돌아오고 나서 휴가를 냈을까? 그냥 바로 한림원에 출근을 했어야 했는데.’

나는 그런 후회를 했다. 내가 잠깐 쉬는 사이 호족들이 그런 일을 꾸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한림원에서는 학사들이 평소처럼 일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내가 앉는 자리로 갔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내 책상이 없어?’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왕건이 문득 나타났다.

“연우야. 여긴 왜 왔니?”

“예?”

“내가 한 2년 정도 처지가 곤란해서 연우 네 도움을 받긴 했다. 그런데 이제는 네가 필요 없구나. 고창에서 이겨서 앞으로는 내 힘만으로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다. 여러 호족들이 시끄럽게 굴기도 하고, 뭐 쓸모가 없어진 연우 너는 용도폐기…… 아니지. 아니야. 나주원에서 푹 쉬렴. 암 잠도 실컷 자고. 연우 네가 부럽구나. 히히히.”

왕건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어어.”

나는 뭐라 말을 하려고 했는데 목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왕건 옆에서 최언위가 등장했다.

“정윤비 마마. 마마는 원래 한림원에서 일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마마께서는 은광도 가지고 계시니 생계 걱정도 없습니다. 자 그만 나가시지요.”

그리고 최언위의 명에 따라 한림원 학사들이 나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히히히, 연우야. 그동안 고생했다. 앞으로 소일거리나 하며 잘 지내라.”

왕건이 그런 나를 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꿈이었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림원이 아니라 나주원에 있는 내 침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는 겨우 안심했다.

어제 나는 상산저에 묵으면서 임희와 잠도 못 자고 내 한림원 문제를 상의했다.

그리고 오늘 나주원에 돌아와 잤는데 마음이 심란해서 그런지 이런 꿈을 꾼 것이다.

‘이 시대에 떨어진 뒤로 악몽을 여러 번 꾸었지만 이 정도로 실감 나는 꿈은 처음이야.’

그런 생각을 하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데 왕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선 괜찮습니까?”

왕무는 다른 침상에서 일어나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찌 여기에 계십니까? 군영에 계신 줄 알았습니다.”

나는 힘없는 목소리로 왕무에게 물었다. 분명 내가 잠들 때는 곁에 왕무가 없었다.

“새벽에 잠시 시간이 나서 들렀습니다. 국선 괜찮습니까?”

왕무는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살며시 나를 끌어안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그런 생각을 했지만 왕무를 밀어낼 수가 없었다. 악몽을 꾸고 나서 힘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입을 열 기력도 없어.’

나는 왕무의 품속에 그대로 안겨 버렸다. 사람의 체온이 닿으니 그래도 마음이 좀 진정되었다.

‘갑자기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되다니 이것 참. 거기에 한림원에 한동안은 더 있어야 유리한데. 호족들이 이리 날뛰다니.’

나는 이를 갈았다. 매일 왕건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한림원은 나에게 소중한 자리였다.

왕건은 아내가 많은 사람이라서 사실 왕후나 부인들도 왕건의 얼굴을 매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한림원에 다니며 거의 매일 왕건과 만날 수 있었다.

‘이게 권력투쟁을 할 때 큰 장점이야. 왕건의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도 알 수 있고, 왕건이 한림원에서 중요한 일을 많이 처리하니 정보습득도 가능하다.’

이미 고창 전투 직전 군사회의에서 느낀 것이지만 대호족들을 모아두고 일을 논의하면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제대로 일이 진행되지도 않았다.

그래서 왕건은 한림원에서 말 잘 듣고 온순한 학사들을 부려 자료를 수집하고 계획을 어느 정도 세워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내가 한림원에 있으면 앞으로 고려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도 대강 눈치 챌 수 있었다.

‘아마 호족들도 그걸 알고 나를 밀어내려는 건데.’

나는 울화가 터졌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강제로 나를 날려버리려는 게 분통 터져. 내 첫 취업자리인데.’

따지고 보면 나는 현대에 있을 때도 취업을 못 했다. 이게 첫 직장인 것이다.

첫 직장에서 이리 잘리면 앞으로 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쓰든 버텨야 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내가 여전히 왕무 품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그런 생각에 몸이 약간 굳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왕무는 내 몸을 풀어주며 말했다.

“국선. 진정된 것 같으니 쉬시오. 나는 다시 나가봐야 합니다.”

그러더니 왕무는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갔다.

‘왕무는 마치 내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거 같아. 에휴.’

그런 왕무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학관에 갔다. 학관에서 나는 최언위의 표정이나 태도를 유심히 살폈다.

‘내가 한림원에서 잘리게 된다면 분명 한림원령인 최언위에게도 소식이 갔을 거야. 최언위를 살피면 내가 잘릴지 말지 알 수 있을지도.’

그런데 최언위는 평소와 똑같은 목소리로 수업을 진행했다. 책을 들고 교실 안을 오락가락하는 것도 평소와 같았다.

내 쪽으로 딱히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평소랑 다름이 없네. 별일이 없는 건가? 아니야. 어쩌면 최언위에게 안 알려주고 왕건이 나에게 잘렸다고 통보할 수도 있어.’

그 생각이 계속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학관 수업이 끝나고 나서 최언위는 느릿느릿 한림원으로 걸어갔다. 나도 그런 최언위의 뒤를 따라갔다.

“정윤비 마마. 휴가 동안 잘 쉬셨습니까?”

최언위가 나에게 물었다.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나 휴가에 대해 묻는 최언위를 보며 나는 또 불안해졌다.

‘왜 휴가에 대해 묻지? 설마 그것 때문에 나를 자른다는 건가?’

“뭐 어쨌든 나랏일이 순조롭게 흘러가니 다행입니다.”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최언위는 가볍게 웃으면서 그리 말했다.

‘뭐야. 무슨 의도야?’

나는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겨우 한림원에 도착했다. 그리고 한림원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책상을 살폈다.

내 책상은 그대로 있었다.

“휴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다. 한림원 학사들은 평소처럼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다만 왕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은 좀 늦나?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늦게 오지?’

내가 그런 생각에 시달리며 겨우 책상에 앉아 있는데 왕건이 곧 모습을 드러냈다.

“대목군. 아니 천안 인근의 자료들을 좀 모아와 봐.”

한림원에 들어서자마자 왕건이 그런 지시를 내렸다.

“예, 폐하.”

학사들은 흩어져서 지도며 책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일을 했다. 왕건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딱히 나에 대해 신경 쓰는 태도는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없이 이대로 넘어가나? 왕건이 그냥 호족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날 쓰기로 했나?’

그 사이 왕건은 학사들이 모아온 지도며 자료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한참 그러더니 왕건은 문득 나를 보며 말했다.

“오 연우야. 이리 와 보거라.”

“예.”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왕건 곁에 갔다. 왕건은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살폈다.

학사들은 멀리서 열심히 책이며 지도를 뒤지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말하면 엿들을 사람이 없었다.

“요새 연우 너가 한림원에서 일하는 걸 두고 좀 시끄럽다. 왜 이리 나를 귀찮게 하는지 몰라. 나도 속 편하게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좀 있어야…… 아니지. 아니야. 공을 많이 세운 사람을 내칠 수가 있나? 연우 너가 공을 많이 세우지 않았니?”

“예 그렇습니다. 폐하. 앞으로도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

나는 묘하게 기분이 나빴지만 왕건이 나를 자르지는 않을 것 같아 씩씩하게 말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계속 시끄럽게 구는 게 영 심상치 않아. 거기다가 잡찬이 머리가 좋긴 좋아. 노약자나 여인의 부역을 면해준 일을 엮어서 연우 너도 쉬게 하라고 계속 시끄럽게 만드는데 참 나도 할 말이 없다. 거기다가 정윤이 직접 찬동하기까지 했고. 나도 일이 이리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지난 수십 년간의 난리통에 충주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인간들을 다 물리친 게 잡찬이다. 이런 식이면 연우 너를 내가 계속 쓸 수가 없어요.”

왕건은 또 그런 식으로 말을 바꾸었다.

“예? 그럼 어찌해야 할지?”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연우 너 뭐 없니?”

“예? 무얼 말씀하시는지?”

“뭔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만한 다른 시끄러운 일을 하나 만들어봐라. 연우 너는 그런 걸 잘하지 않니? 그쪽으로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면 연우 네 문제는 흐지부지되는 거지. 한번 그런 식으로 일이 넘어가면 잡찬도 다음번에 이 일을 논하기 힘들어진다.”

왕건이 그리 속삭였다.

“폐하께서 좀 그래 주시면.”

나는 애원하는 눈빛으로 왕건에게 말했다.

‘연등회 때 나와 왕무를 결혼시킨 왕건의 지략이면 내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있다.’

“허허허. 나는 늙어서 그런지 요새 머리가 좀 굳었어. 별생각이 안 나는구나. 젊은 연우 너가 알아서 해야지. 무엇보다 네 일이지 않니?”

그런데 왕건은 또 그렇게 발을 뺐다.

‘작년 연등회 때 내가 결혼했어. 1년 좀 넘었는데 머리가 굳을 리가?’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나마 이 정도만 해도 다행이었다.

“알겠습니다. 세상을 좀 시끄럽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내 자리로 돌아와 깊은 고민에 잠겼다.

‘내가 몇 가지 패를 준비한 것이 있긴 한데. 지금 써야만 할까?’

예전에 동양원 부인과 처음 만났을 때 동양원 부인이 나더러 궁궐 내 암투에 대비하라고 경고했었다.

거기에 고창 전투 이후 호족들 간의 내부 투쟁이 심해질 것은 나도 익히 예상했다. 그래서 나도 대비를 나름 했다.

‘하지만 내가 많은 패를 준비하지도 못했는데 벌써 그걸 사용하려니 아깝기도 하고.’

그래서 왕건이 나서주기를 바랐는데 왕건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하나 써보자. 마침 한림원에 와 있으니 바로 확인할 수도 있고.’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 * *

한림원 근무가 끝나자 나는 즉시 대기하고 있던 수레에 올랐다.

“왕창근의 상단으로 가자.”

나는 그런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다졌다. 왕창근의 상단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말했다.

“왕 노인과 만나고 싶습니다.”

“예, 정윤비 마마.”

내 말을 듣자마자 왕창근 상단의 하인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내가 상단의 다실에서 쉬고 있는데 왕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왕 노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르신께서 이번에 저를 한번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예? 정윤비 마마. 무슨 말씀이신지?”

왕 노인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데 다실 밖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하인 복장을 한 최언위가 들어오더니 외쳤다.

“정윤비 마마의 말씀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고운 사형께서 여기 계시다니! 허허허. 이럴 수가? 이리 가까이에 계셨는데도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나는 한림원 일을 끝내고 최언위에게 부탁해서 그와 함께 이곳에 달려왔다.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하려면 최언위의 도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연 내 짐작이 맞았다.

왕 노인, 아니 최치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언제부터 눈치채셨습니까? 허허 뭐 팔관회 때 정윤비 마마께서 읊으신 시에 대해 논한 날 눈치채셨겠지요. 그때 정윤비 마마께서 바로 해인사 이야기를 꺼내시는 것을 듣고 불안했습니다. 그 이후로 정윤비 마마께서 저에게 더욱 예를 갖춰서 찜찜했는데 과연 그때 이미 눈치채셨군요.

나는 최치원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는 처음에는 왕 노인이 중국 사람이고 왕창근의 친척인 줄 알았다. 어눌한 고려말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데 여러 번 만나면서 묘한 점을 발견했다.

‘표천현에서 도교에 대한 지식이 너무 탁월했어. 논의를 진전시키는 것도 그렇고 보통 이상의 학문을 보여줬다. 거기다가 결정적인 것은 팔관회 이후였어.’

팔관회 때 나는 은근슬쩍 이규보의 시를 빌려와서 공연에 써먹었다. 그 직후 나와 만난 문사들은 모두 그 시에 대해 나에게 물었다.

‘최언위가 나에게 그 시는 당세에 나오기 힘들다고 말했을 때 나는 몹시 놀랐다. 그러면서 최언위의 학문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가 당세의 것이 아니란 것을 눈치챘으니. 그런데 왕 노인은 그 시에 대해 최언위보다 더 자세하게 논했어.’

왕 노인이 삼한의 기풍을 운운하고 수백 년 뒤에나 나올 시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는 화들짝 놀랐다.

역사 속에서 이규보가 국풍을 중시했다는 것은 유명한 사실이었다.

‘수백 년 뒤에 출현할 이규보의 성향에 대해 시 한 수만 듣고 그리 정확하게 맞추다니. 그것도 최언위보다 더 뛰어난 식견으로.’

이 시대는 조선시대처럼 모든 귀족들이 글을 읽고 학문을 닦은 것이 아니었다. 한문학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숫자가 정해져 있었다.

지금 이 시대에 최언위보다 더 뛰어난 문학가라면 진짜 1~2명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처럼 시골에 묻혀 있는 은거문인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짐짓 해인사 이야기를 꺼내 봤다. 해인사에 최치원의 형이 출가해 있고 그래서 최치원이 거기에 머무른 적이 있거든.’

그런데 해인사 이야기를 꺼내자 왕 노인이 당황하며 얼버무리는 것을 보고 나는 어느 정도는 왕 노인이 최치원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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