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97화
97. 정상화
고려군은 안동으로 이름이 바뀐 고창에서 철군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 사이에 껴서 움직였다.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은 편했다.
고려군이 지나는 곳마다 고려에 붙은 호족들이 군량을 넉넉히 공급했다.
왕건도 굳이 행군을 서두르지 않았다. 여러 장수들과 군졸들의 표정도 밝았다. 전투에 이기고 고향에 돌아가는 길이니 당연했다.
서로 잡담을 나누면서 중간중간 웃는 사람도 있었다.
‘나만 안절부절못하고 있구나.’
나는 내 곁에서 말을 모는 왕무의 눈치를 살폈다. 그날 술자리에서 내가 왕무를 밀어낸 뒤 계속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하, 왕무 입장에서는 이런 내 행동이 얼마나 황당할까? 하루아침에 돌변해 이러니.’
나는 왕무를 떠올리면 너무 괴로웠다.
‘내 사정을 속시원하게 말해줄 수도 없고, 왕무는 내가 남자라는 것을 상상도 못 하겠지.’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무심코 내 입술을 매만졌다.
‘고창에서는 내가 미쳤었나 봐. 하긴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전쟁터니,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지.’
나는 한숨을 쉬며 곁눈질로 왕무를 살폈다. 햇살 아래 준수한 왕무의 얼굴이 보였다.
진짜 처음 만났을 때 생각했던 것처럼 현대에 태어났으면 연예인을 해도 될 외모였다.
‘그래. 저렇게 잘생긴 애가 나한테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고 내 말대로 해주니 내가 으쓱해졌던 거야. 그래서 그런 실수를.’
나는 계속 입술을 매만지며 상념에 잠겨 말을 몰았다.
‘뭐 남자끼리도 그럴 수 있지. 인사할 때 입을 맞추는 풍습이 있는 나라도 있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현대에 있었다면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든지 해서 진짜 그런 풍습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그런 것이 없는 시대였다.
그래서 나는 방금 떠오른 생각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가름할 수 없었다.
‘뭐 진짜 그런 풍습이 있는 나라가 있을 거야. 내가 없는 풍습을 지어내지는 않았겠지.’
* * *
내가 그렇게 온갖 잡생각에 시달리며 말을 모는 사이 고려군은 대목군에 이르렀다. 상산과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한동안 이 대목군에 머물러 있다가 간다. 이곳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왕건은 그런 군령을 내렸다. 왕건의 명에 따라 고려군은 숙영지를 만들고 주둔할 준비를 했다.
그리고 장수들과 중신들은 왕건의 처소에 우선 모였다. 나도 참모 자격으로 은근슬쩍 여기 껴서 왕건의 처소에 갔다.
“아예 이곳 이름을 바꿔버리자. 이곳을 천안(天安)이라고 부르면 어떤가? 내가 이곳까지 오는 내내 생각해 봤는데 이게 제일 낫다.”
왕건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름 짓기가 요즘 왕건 취미가 됐나? 왜 이렇게 이름을 자주 지어? 어쨌든 네이밍 센스가 확실히 있긴 하네.’
천안이란 이름은 현대까지 쓰고 있다. 왕건은 쉬운 한자로 귀에 착착 달라붙게 지역 이름을 잘 지었다.
“폐하의 뜻대로 하십시오. 이곳 천안 사람들도 기뻐할 것입니다.”
중신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리고 이곳에 도독부를 설치하고자 한다. 조만간 우리가 백제 땅으로 진군해야 하는데 천안에 미리 군수품을 모아둘 필요성이 있다.”
왕건이 자신의 의중을 밝혔다. 확실히 고창 전투 이후 구 신라령은 평정했다고 생각하고 백제 본토를 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과연 왕건의 뜻대로 될까? 흐흐흐. 물론 최종적으로는 왕건의 뜻대로 되지만 시간이 좀 걸리지. 표정을 보니 왕건은 뭐 금방이라도 통일을 할 줄 아는 것 같지만.’
미래 역사의 흐름을 아는 나는 속으로 웃었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중신들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왕건의 구상이 큰 틀에서 옳았기에 중신들도 딱히 다른 말을 할 것이 없었다.
“대상 황보제공을 천안도독으로 임명하고 황주 군사들로 하여금 천안을 지키게 하겠다. 대상이 개경과 천안을 왔다 갔다하며 나랏일을 돌봤으면 한다.”
왕건이 그런 명을 내렸다. 장내에 모인 중신들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황주 군사들을 천안에 배치하면 누구에게 이익인지 가늠하는 것이다.
내 표정도 중신들과 똑같아졌다.
‘도무지 왕건의 속을 모르겠다. 황보제공도 왕건이 믿는 사람들 중 하나니까 천안 같은 요충지를 맡기는 것은 이상할 게 없어. 다만 이 천안이 상산과도 매우 가까운 곳이야. 나중에 왕위계승경쟁이 벌어질 때 일이 어찌 흘러갈지. 황주 군사들이 황주와 천안에 분산 배치되는 셈이니 나와 왕무에게 좋나?’
내 머릿속에서 별별 생각이 다 오갔다.
“명을 받듭니다.”
황보제공은 한걸음 나서더니 왕건에게 예를 갖추었다.
‘하긴 이런저런 계산을 해봤자 뭐하겠어? 왕건이 결단을 내렸으면 따르는 수밖에 없지. 에라 모르겠다.’
나는 천안도독부 일은 자포자기해버리기로 했다.
“대상이 황주 군사들을 거느리고 이 천안에 군수품을 저장해 놓을 창고를 세우도록 하라. 그 일을 마치고 개경에 돌아와 달라.”
왕건은 황보제공을 보며 그런 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천안도독부를 만드는 일과 관련된 대화가 오가는데 문득 유긍달이 입을 열었다.
“폐하 소신이 청을 하나 올리고 싶습니다.”
“무엇인가?”
왕건이 약간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난 수년간 나라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일손이 없어 장수들이 성을 쌓을 때 노인, 여자들과 어린아이까지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폐하께서 백제 도적들을 깨뜨려 동쪽을 평정했습니다. 비록 여전히 견훤이 완산에 버티고 있지만 그 기세는 꺾였습니다. 이제는 각지에 명을 내려 노약자들을 부역에 동원하는 일을 멈추게 하십시오. 천안도독부를 세울 때도 건장한 자들만 동원하십시오. 정윤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유긍달은 진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막판에는 왕무를 바라보며 호소하듯이 물었다.
나는 그 순간 왕무의 소매를 잡아당기려고 했다.
‘유긍달의 말이 옳긴 옳다. 그런데 유긍달이 뭘 하자고 하면 무조건 반대하고 봐야 해.’
나는 고려에 와서 여러 일을 겪는 동안 그런 신조가 생겼다. 이외에 황보제공, 임명필 등 왕건의 장인들 중 나와 안 친한 사람들이 뭘 해도 무조건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모여 있으니 티 안 나게 소매를 잡아당기려고 쭈뼛댄 것이 문제였다. 내가 잠시 머뭇거린 사이에 왕무는 반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잡찬의 말이 옳습니다. 일전에 내가 북쪽 변경에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러 간 일이 있습니다. 그때 노약자들이 돌을 나르는 모습을 봤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너무 심해보였습니다. 이제 견훤을 격파했으니 백성들을 쉬게 해야 합니다.”
왕무는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중신들과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고려가 승기를 잡았으니 나라를 정상화 시키자는데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다.
“이제는 좀 긴장을 풀 때도 되긴 됐다. 내가 고창에서 이긴 직후 바로 그 조치를 취해야 했는데 신경을 못 썼다. 대상, 천안도독부를 세울 때 노약자들은 부역을 면해주도록.”
왕건도 흐뭇한 표정으로 말했다.
“백성들이 크게 기뻐할 것입니다.”
유긍달 역시 밝게 웃으며 그리 말하고 물러섰다. 뭘 더 획책하려는 기색은 없었다. 장내의 분위기도 훈훈해졌다.
‘내가 너무 속이 좁았던 건가? 그냥 순리대로 일이 흘러가고 끝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내 판단 착오인 것 같았다.
* * *
천안도독부를 세우기 위한 조치를 취한 뒤 왕건은 다시 군사들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그리고 마침내 개경에 당도했다.
‘개경에 오니까 좋긴 좋구나. 진짜 몇 달 만에 돌아오는 건지.’
나는 정겨운 표정으로 개경을 바라보았다. 개경 주민들도 돌아오는 왕건과 고려군에게 환호를 보냈다.
진짜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그 암울한 상황에서 견훤을 대파했으니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언니! 언니도 오라버니도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이에요.”
나와 왕무가 나주원에 돌아오자마자 오지수가 나에게 달려왔다. 나주 왕후도 웃으면서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공주 마마.”
나도 반갑게 오지수의 두손을 잡았다. 그사이 왕무는 나주 왕후에게 인사를 올리고 있었다. 나도 명색이 며느리니 재빨리 그런 왕무를 따라 했다.
“우선 식사나 하자. 상을 차려놨다.”
나주 왕후가 자애로운 표정으로 말했다.
* * *
“언니가 딱 알맞은 시기에 돌아오셨어요. 배수현 언니가 곧 결혼식을 올릴 계획이에요. 고창에서 고려군이 대승한 소식이 들려오고 나라도 안정을 되찾았으니 더 미룰 일이 없죠. 수현 언니가 언니를 몹시 기다렸어요. 꼭 결혼식에 초대하고 싶어서요.”
오지수는 밥을 먹는 와중에도 재잘거리며 개경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줬다.
“그렇군요.”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정보를 습득했다.
‘수현이도 결국 결혼을 하는구나. 꼭 가야지.’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 식사가 끝났다. 밥을 먹자마자 왕무가 나주왕후에게 말했다.
“막 군사들이 개경에 돌아와서 군영에 일이 많습니다. 그들을 감독하기 위해 며칠간은 군영에서 지내야 합니다. 사실 지금도 나가봐야 합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라.”
일이 바빠 가봐야 한다는 왕무의 말에 나주왕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왕무는 내 쪽으로도 다가오더니 정중히 말했다.
“국선, 군영의 일 때문에 가보겠습니다.”
“예, 정윤 전하.”
나도 약간 어색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내가 한번 거리를 둔 이후로는 계속 이 상태였다.
‘나는 몸이 피로해서 학관과 한림원에 이틀 휴가를 냈는데. 왕무는 쉬지도 못하고 또 군영에 나가네. 나처럼 2~3일 쉬면 좋을 텐데.’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왕무는 그대로 나갔다.
왕무가 떠나고 나서도 나는 나주왕후, 오지수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내가 없는 사이 개경 상황에 대해 세밀하게 파악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나는 나주왕후와 오지수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다. 오지수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라 열심히 내 정보수집에 협조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시녀 하나가 달려왔다. 그러더니 서신 하나를 나에게 전했다.
“상산저에서 정윤비 마마께 서신 하나가 왔습니다.”
“음, 그래.”
나는 서신을 펼쳤다.
-논의할 일이 생겼으니 오늘 잠깐이라도 상산저에 오너라.
서신도 짧았고 글씨도 급하게 쓴 거 같았다. 서신 끝에 임희의 서명이 보였다.
‘무슨 일이 있나?’
나는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하며 나주 왕후에게 외출허락을 받으려 했다. 그런데 나주왕후는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말했다.
“그러고 보니 상산부인께서도 한동안 네 얼굴을 못 보셨구나. 얼마나 보고 싶으시겠니. 아예 오늘은 상산저에서 묵고 오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나는 나를 배려해 주는 나주 왕후에게 고마워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상산저에 갈 채비를 갖추었다.
‘대체 무슨 일일까?’
* * *
내가 상산저에 들어서자마자 상산부인은 호들갑을 떨며 나를 맞이했다.
“네가 웬일이니? 어쨌든 잘 됐다.”
“예, 어머님. 아버님은요?”
“어전 회의에 나가셔서 여태 안 돌아오셨다. 논의할 일이 많은 것 같아. 그건 그렇고 연우 너는 어떠냐?”
상산부인은 그리 말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당연히 손주 소식이지. 이제 혼사를 치른 지도 몇 달이 흘렀는데.”
상산부인이 예리한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그 질문을 듣고 속이 뜨끔했다.
“그런 일은 민망해서…….”
내가 말끝을 흐리는데 상산부인은 계속 이 주제를 물고 늘어졌다.
“지금 정윤 전하께서는 다른 태자들보다 나이가 많으셔서 큰 덕을 보고 계신다. 어린 태자들과 달리 정윤 전하는 전장에 나서서 공을 세울 수 있으니. 거기에 아이가 생기면 더 큰 도움이 된다. 후계가 탄탄해지잖니. 민망한 일이 아니다.”
“…….”
상산부인이 너무 맞는 말만 해서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으니 문제예요. 어머니.’
내가 난감해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데 밖에서 임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희가 궁에서 돌아온 것 같았다.
“연우는 왔느냐?”
“예, 여기 있습니다.”
나는 반가워서 임희에게 달려가며 말했다.
“큰일이다. 어전에서 대호족들이 연우 너를 한림원에서 내치려고 일을 꾸몄다. 그래서 내가 잠시 쉬는 틈에 하인을 시켜 서신을 보낸 것이야.”
임희는 관복을 벗지도 않고 나에게 외쳤다.
“예? 무슨 명분으로 그럽니까?”
나는 당황해서 물었다.
“이제 백제 도적들을 깨뜨리고 나라가 안정돼서 노약자들을 부역에 동원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니? 그런데 그 사람들이 그걸 고리로 삼아 너까지 물고 늘어지는구나. 어린 소녀인 네가 전쟁터까지 따라나서니 가슴이 아프다며 이제는 좀 쉬게 해줘야 한다고 말을 꾸며대고 있다. 그 사람들이 겉으로는 눈물까지 흘리며 연우 너가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하고 있어. 그러면서 정세가 안정된 지금 굳이 정윤비인 연우 네가 한림원에 나와서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외치고 있다. 참 간교한 사람들이야. 그런데 막상 그 자리에서 내가 할 말이 없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