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76화 (76/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76화

76. 대업

진중한 표정을 짓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왕무의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이 놓였다.

‘혼인을 하기는 했으나 내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구나.’

그 순간 나는 빙의한 이래 가슴 속에 몇 년간 맺혀 있던 걱정거리가 한순간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진짜 후련했다.

‘왕무니까 이러지 또 다른 녀석이었다면 어떻게 나왔을까?’

이런 식으로 좋게 일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자리와 관련된 문제가 이런 식으로 해결되자 다른 모든 것도 별 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동안 가문의 안위를 운운하며 혼사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 그런데 그게 다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이 순간 실감했다.

‘역시 핵심은 혼인을 하면 잠자리를 해야 하니 싫었던 거였어. 그래 이것만 해결되면 유긍달, 황보제공이 대수냐? 나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고.’

이 위기에서 나를 벗어나게 해준 왕무가 너무 고마웠다. 선량한 왕무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나 자신도 지키는 방향으로 일이 풀렸다.

‘내가 미래 지식을 적절히 사용해서 왕무를 돕는다면 왕무에게 다가올 위기도 다 헤쳐 나갈 수 있어. 아니 그걸 넘어 왕무가 죽고 나서 이어진 고려 초기의 혼란한 역사 자체를 바꿀 수도. 그런데 왜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는 거야?’

내가 무릎을 꿇고 있으니 왕무도 고지식하게 계속 무릎을 꿇은 채였다.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키며 왕무에게 말했다.

“정윤 전하. 이제 일어나십시오.”

“알겠소.”

왕무는 그렇게 대답하며 일어났다. 나와 왕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면서 잠시 서 있었다. 순간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할 말, 할 말을 찾아야 해.’

그런 절박함에 나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정윤 전하께서는 결국 보위에 오르실 분입니다. 과연 왕위에 오르시면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십니까?”

지금 상황에서 뜬금없긴 했으나 꼭 해야 할 질문이긴 했다. 잠자리가 없는 혼인이라도 혼인을 한 이상 정치적으로 상산은 정윤과 함께 가야 했다.

정윤 왕무가 착한 사람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나중에 처가인 상산의 뒤통수를 치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어쨌든 왕이 될 사람이 정치적으로 어떤 대의를 추구하고 있는지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그냥 착하기만 해도 곤란한데.’

왕무는 내 뜬금없는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답했다.

“삼한을 통일하고 힘을 모아 거란 치하에서 고통을 겪는 발해의 형제들을 구원해야지.”

“예.”

그 한마디에 나는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왕무도 역시 큰 뜻을 품고 있었어. 그래 지금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제지. 그걸 왕무 역시 알고 있었구나.’

나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역사학도로서 나도 이 시대에 빙의한 이상 더 나은 방향으로 역사를 바꿔보자는 꿈이 있었다.

‘물론 그동안은 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급급해서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어. 그런데 오늘 이렇게 그 문제가 해결되고 왕무 역시 같은 뜻을 품고 있으니.’

실제 역사에서 왕건과 고려 왕실의 후예들은 삼한을 통일하는 일은 해낸다. 하지만 거란 손에 넘어간 발해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은 해내지 못한 것이다.

‘삼한통일을 이룬 왕건이 죽고 난 뒤 고려 왕실은 수십 년간 내전과 숙청에 시달렸으니 그럴 겨를이 없었지. 그 혼란의 희생자 중 하나가 왕무이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 미래 지식이 있는 내가 마침 왕무 곁에 있게 됐다. 내가 왕무를 도와 역사를 바꿔서 그 왕권을 굳건하게 만들면 고려 왕실이 내전으로 힘을 소모할 일도 없었다.

그러면 그 힘으로 발해의 동포들을 구할 가능성도 높아지는 것이다.

나는 소매 속에서 만지작거리고 있던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서 탁자 위에 펼치며 말했다.

“전하 보십시오. 이 두루마리는 발해 15부의 지도입니다.”

아주 정밀한 지도는 아니었지만 발해땅의 대략의 형세는 보여주고 있었다.

내 아버지인 임희는 병부령을 역임했기 때문에 그 인맥을 통해 이런 지도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나는 일이 잘 안 풀릴 경우 이 두루마리로 총검술을 펼쳐서 왕무를 제압하려고 가져왔지. 그 용도로는 안 써서 다행이야. 목젖치기가 실패할 경우 두루마리를 단창처럼 사용하려 했어.’

그런 내 속도 모르고 왕무는 지도를 보고 약간 서글프게 말했다.

“발해 땅이 넓긴 넓군. 이곳의 형제들을 구할 수 있을지.”

왕무는 막막한 모양이었다.

“정윤 전하께서는 반드시 해내실 것입니다.”

나는 짐짓 왕무를 치켜세우며 말했다.

‘향후 수십 년간 역사의 흐름을 꿰뚫고 있는 이 몸이 도와줄 건데 너무 걱정 말라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라고.’

그러면서 나는 한동안 발해 땅의 정세에 대해서 논했다. 왕무도 내 말에 가끔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다.

그러다가 왕무는 문득 나를 걱정스레 보며 말했다.

“국선. 몹시 피곤해 보이니 좀 쉬시오. 국선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려면 내가 이 방을 나서는 것이 맞지만 어쨌든 첫날밤에 내가 방을 나서면 말이 많을 것이오.”

그리고 왕무는 이불을 침상 아래 바닥에 깔고 누워 잘 준비를 했다. 왕무 자신은 침상 아래에서 잘 작정인 것 같았다.

그 말을 들으니 나는 피로가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오늘의 일도 하나하나 선명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혼례식을 치를 당시에는 정신이 없었는데 막상 일이 이리 다 끝나고 나니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늘 참 많은 일이 있었다.

“그럼.”

나는 왕무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침상 위로 올라갔다.

‘당연히 왕무가 침상 아래에서 자야지. 김선우였을 때 나이까지 합치면 내가 이젠 어르신인데. 그런데 왕무 얘가 자다가 몰래 내 침상으로 올라오는 것은 아닐까? 두루마리를 쥐고 자야 하는데.’

나는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한번 침상에 눕자 다시 일어날 수가 없었다. 근 며칠간 악몽에 시달리며 잠을 못 잔 여파 같았다. 나는 그대로 눈을 감고 잠들어 버렸다.

꿈도 안 꾸고 자던 나는 새벽녘에 눈을 떴다. 새벽이라 그런지 아주 어둡지는 않고 주변이 어느 정도 보였다.

나는 눈을 뜨자마자 내 좌우를 살폈다. 침상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재빨리 침상 아래를 살펴보니 왕무가 바닥에 이불을 깔고 쿨쿨 자고 있었다. 왕무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참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왕무 쟤도 참 별나.’

나는 침상 위에서 왕무의 잘생긴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쨌든 은혜는 꼭 갚아줘야 하나? 하긴 은혜는 무슨 은혜. 내가 싫으면 당연히 잠자리는 안 하는 거지. 그래도 착한 애는 맞으니 착한 사람이 잘 되게 해줘야지.’

보다 보니 생긴 것도 착하게 잘생겼다. 그 와중에 나는 다시 잠이 쏟아지는 것을 느꼈다. 피로가 덜 풀린 것 같았다.

* * *

“연우 언니. 오늘 늦잠을 자셨네요. 늦잠이요. 헤헤헤.”

나주원의 아침식사 자리에서 오지수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어젯밤에 발해 15부의 지도를 펼치고 정세를 논하다가 늦게 자서 그래.’

나는 이런 대답을 해주려다가 그만뒀다. 생각해 보니 이 말을 해도 사람들이 안 믿을 것 같았다.

“어허. 지수야.”

같이 식사를 하는 나주 왕후가 그런 오지수를 제지했다. 왕무는 한쪽에서 그저 말없이 밥만 먹고 있었다.

나는 열심히 삶은 돼지고기를 씹었다. 아침부터 식욕이 좋았다.

‘진짜 아무 걱정 없이 시원스레 먹어보는 게 얼마만인지. 그런데 나랑 왕무가 평생 이리 지낼 수 있을까? 하긴 왕무는 정윤이니 후비를 들여서 민망한 문제는 해결하면 되지. 어쨌든 여러모로 내가 해야 할 일이 많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주 왕후가 말했다.

“폐하께서 앞으로 1주일간은 연우 네가 한림원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 하시는구나. 학관도 그렇고 1주일은 푹 쉬라고 하셨어.”

“아 그럼 1주일 후에는?”

“더 쉬고 싶겠지만 지금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서 오래 쉴 수는 없을 듯하구나. 폐하께서는 연우 네가 한동안은 계속 학관에 다니며 공부도 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 계책도 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하셨어. 참 신혼인 아이에게 그러시다니.”

나주 왕후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잘 됐군. 나는 혼인을 했으니 학관이나 한림원에 나오지 말라고 할까 봐 걱정했는데. 확실히 사람이 능력이 있으니 부르는군.’

내가 그동안 여러 곤란한 문제를 해결해서 그런지 왕건도 나를 써먹기 위해서 한림원에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아침 식사를 하고 일어나는데 나주 왕후가 외쳤다.

“연우야. 괜찮니? 한동안은 조심히 걸으렴.”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하, 모든 사람이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

나는 내심 그렇게 투덜거렸으나 뭐라 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 * *

“호호호. 이렇게 착한 며느리가 생겼으니 앞으로 궁궐 생활도 즐겁겠네요. 며느리야. 어머님이라고 한번 불러보렴.”

동양원 부인은 매력적으로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시늉을 했다.

‘아니, 사람이 어떻게 이리 뻔뻔스러울 수 있어. 나를 속여놓고.’

나는 그런 동양원 부인을 보며 이를 갈았다.

오후 즈음에 동양원에서 사람이 와서 나를 초대했다. 나는 이 초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립밤도 동양원을 통해서 납품하고 있고 무엇보다 동양원 부인의 아버지가 유금필이니. 진짜 유금필만 아니었으면 확.’

성질 같아서는 그냥 초대를 거절하고 싶었는데 유금필에 대해 생각하면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진짜 억지로 동양원에 왔는데 동양원 부인은 사과는커녕 저러는 것이다.

내가 동양원 부인에게 느끼는 배신감은 컸다.

‘나를 왕무와 결혼시키기 위해 꾸민 계책에 동양원 부인도 가담했어. 그동안 했던 말은 다 뭐야?’

그런 생각이 들어서 더 서글퍼졌다.

“동양원 부인께서 저에게 결혼 같은 건 하지 말고 혼자 사는 게 더 낫다는 식으로도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리 말하자 동양원 부인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되물었다.

“내가 그랬었나요?”

진짜 최언위도 그렇고 어쩜 반응이 이리 똑같은지 나는 기가 막혔다.

“그러셨습니다. 팔관회 때 분명 그리 말하셨어요.”

나는 동양원 부인이 나에게 한 말은 다 기억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간곡하게 나에게 부탁하기도 했지만 내가 보기엔 연우 아가씨께 가장 좋은 길이기도 했어요. 어제 첫날밤을 치렀는데 어땠나요?”

동양원 부인은 내 서운함을 눈치챘는지 진지하게 말했다.

“…….”

동양원 부인의 말대로 일이 좋게 풀린 건 맞아서 나는 할 말이 없긴 했다.

“그리고 그 덕에 나도 연우 아가씨와 매일매일 볼 수 있게 됐어요. 연우 아가씨도 입궁했으니까요. 예쁜 며느리야. 자 안아주마.”

그러더니 동양원 부인은 덥석 나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진짜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진지하게 동양원 부인의 사과라도 받아내려고 왔다. 그런데 동양원 부인이 이렇게 농담을 하고 나를 껴안고 하자 내 마음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 * *

결국 동양원 부인에게 제대로 따지지도 못하고 나는 터덜터덜 나주원으로 돌아왔다.

“언니, 표정이 이상해요. 왜 동양원에만 갔다 오면 그런 얼굴이 되나요?”

오지수가 나를 맞이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표정이 그랬나요? 음, 정윤 전하는 어디에 계시나요?”

나는 문득 왕무가 떠올라서 황급히 물었다.

“오라버니는 군사일이 급해 군영에 나갔어요. 또 무슨 일이 터졌는지 오라버니를 부르러 사람이 왔어요. 참 해도 해도 너무 해요. 어제가 혼사였는데 오늘 사람을 데려가다니.”

오지수가 투덜거렸다.

“그렇군요.”

나는 허전한 기분에 중얼거리는데 오지수가 대뜸 물었다.

“동양원에도 갔다 오셨고 이제는 입술이 트지 않는 연고 사업은 완전히 저한테 주시는 건가요? 그걸 논의하러 동양원에 가신 거 아니었나요?”

확실히 내가 혼사가 파토 나는 줄 알고 미안해서 오지수에게 립밤 사업을 넘겨주겠다는 언질을 한 것 같았다.

오지수도 그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러고 보면 왕 노인과 립밤 재료 납품 관련 계약을 할 때도 돈을 선불로 주기로 하고도 가격을 못 깎고. 그때 마음이 심란해서.’

이제는 혼사가 이루어졌는데 오지수에게 립밤 사업을 넘겨줄 판이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내가 그랬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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