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1화
41. 기호지세
유금필의 딸인 동양원 부인의 생일이 다가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김순식 대신 유금필이라도 끌어들여야 하는가? 하지만 내가 기껏 유금필을 끌어들여도 왕건이 이번처럼 무산시킨다면?’
내가 기껏 이런저런 책략을 짜내도 국왕인 왕건은 그것을 너무나 쉽게 와해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혼사가 그대로 진행될 판이니. 되든 안 되든 나는 온 힘을 다해 몸부림이라도 쳐봐야 해.’
나는 그러면서 왕무의 얼굴을 떠올렸다.
‘물론 왕무가 선량한 성품을 지녔다는 것은 알겠어. 하지만 남자인 내가 어떻게……’
다만 이때쯤 와서는 나도 슬슬 최악의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혼사를 강행하려는 왕건의 의지가 굳어 보여. 왕이 그리 마음먹었으면 쉽게 빠져나가기 어렵고. 설사 혼사가 이루어져도 만만한 왕무를 잘 협박해서 내 몸을 지키는 것도 중책은 되지 않을까? 차라리 그쪽도 대비를 하는 것이.’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곧 내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야. 최악의 상황은 생각할 필요도 없어! 그냥 무조건 혼사는 피한다. 마음이 약해지면 안 돼.’
그렇게 내가 혼자 마음속으로 고민하는 모습이 몹시 이상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나주 왕후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었다.
“연우야, 너 괜찮니?”
“예, 괜찮습니다. 왕후 마마, 저는 오지수 공주 마마의 마음을 달래줄 방책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재빨리 그리 둘러대었다.
“그건 정말 고마운 일이구나.”
내 변명을 듣고 나주 왕후의 표정이 환히 밝아졌다.
“동양원 부인의 선물을 제가 한번 골라보려 하는데 괜찮을까요? 그때 오지수 공주 마마도 함께 데려가면 좋을 것 같습니다. 시장 구경을 하면 공주 마마의 기분도 풀릴 듯합니다.”
“궁색한 나주원의 처지에 동양원 부인의 선물로 뭘 고를지 몰라 고민이었는데 연우 네가 나서준다니 고맙구나.”
여러모로 힘든 상황인 나주 왕후는 내 친절에 감동받은 기색이었다.
“그럼 식사를 마쳤으니 저는 먼저 나가서 오지수 공주 마마께 이 소식을 전하겠습니다.”
나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주면 고맙겠구나.”
나주 왕후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 * *
다음 날 아침식사의 풍경은 평화로웠다. 각자 상을 받은 나, 나주 왕후, 오지수 세 사람은 가볍게 담소를 나누며 아침을 먹었다.
‘왕무 얘는 아침도 여기서 안 먹네. 군사일을 보느라 바빠서 나주원에는 가끔 오나 보군. 정말 다행이야.’
그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는 반찬으로 나온 닭고기를 씹었다. 고기가 좀 퍽퍽했다.
“연우 언니, 그럼 오늘 정말 학관 마치자마자 함께 시장을 구경하는 거예요?”
오지수가 밥을 먹다 말고 물었다. 내가 어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오지수의 처소에 잠깐 들러서 말을 해놓았다.
“예, 공주 마마. 한번 멋진 선물을 골라서 유금필 장군과 동양원 부인을 놀라게 해주자고요.”
나는 오지수의 기분도 풀어줄 겸 주먹을 쥐어 보이며 말했다.
‘학관 수업이 마치면 오지수와의 약속을 핑계 삼아 한림원에 가지 말아야지. 최언위가 무슨 말을 해도 오늘은 한림원에 안 간다. 왕건의 얼굴을 또 보기도 싫고.’
왕건이 의외로 학문이 깊어서 매일 한림원에 잠깐이라도 들러 학사들과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을 나는 한림원 직원이 되고 나서 알았다.
그 왕건의 얼굴을 보기 싫어서라도 오늘은 휴가를 낼 참이었다.
“그래요. 언니. 헤헤.”
시장 구경이라는 소리에 기분이 풀린 웃으면서 말했다. 그런 딸의 모습을 보고 나주 왕후도 차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연우야. 너는 총명하지만 궁 생활을 안 해봤으니 이 사실을 알려줘야겠구나. 시장 구경을 하는 것은 좋으나 뭔가 물건을 살 때는 꼭 왕창근 대인이 운영하는 상단과 가게에서 사야 한다. 이건 폐하께서 왕창근 대인에게 직접 한 약속이야. 궁의 사람이 물건을 살 때는 꼭 왕창근 대인에게서 사기로.”
“왕창근 대인 말입니까?”
묘하게 귀에 익은 이름이라 내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단다. 왕창근 대인이 운영하는 상단이 크고 그 밑의 가게도 수십 개라 웬만한 물건은 다 취급하니 걱정할 필요 없어.”
“예, 알겠습니다.”
나는 좋은 정보를 알려준 나주 왕후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꼭 왕창근에게서 물건을 사야 한다는 규칙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 * *
그리고 아침 식사를 마친 나와 오지수는 그대로 학관으로 향했다. 들뜬 오지수는 신이 나서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나 역시 오늘은 수업을 집중해서 들을 수가 없었다.
‘오늘 최언위에게 처음으로 휴가를 요청할 건데 최언위가 안 들어주거나 하면 어쩌지?’
그 생각에 나는 매우 떨렸다. 그러나 내 고민과 달리 일은 간단하게 끝났다.
“안 그래도 서경까지 먼 여행을 갔다 온 직후에 바로 한림원까지 오게 해서 미안하던 참이었습니다. 며칠 말미를 줄 것이니 연우 아가씨께서는 푹 쉬십시오.”
수업을 마치고 쭈뼛거리며 최언위에게 갔는데 흔쾌히 휴가를 내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오지수와 함께 수레를 타고 그대로 시장으로 향했다.
우리가 탄 수레 주위를 4명의 군졸들이 경호했다.
“그런데 언니는 어떤 선물을 살 거예요? 어마어마한 선물을 사서 우리 나주원을 무시한 사람들을 혼내줘요. 상산은 풍요로운 곳이니 그런 선물도 살 수 있겠죠?”
시장으로 가는 수레 위에서 오지수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지수 얘가 생각보다 무서운 아이네. 어느덧 상산의 돈을 자기 것처럼 여기고 있군. 거기다가 우리 나주원이라니? 나는 나주원 사람이 아닌데.’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 저런 말을 오지수가 귀여운 얼굴로 한다고 덜컥 넘어가면 안 됐다. 나는 내 집안인 상산의 돈을 많이 쓸 생각이 없었다.
“근데 아마 우리가 어떤 선물을 해도 동양원 부인과 유금필 장군은 받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런 속마음을 감추며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쳇, 이상하기도 하지. 사람들이 힘써 준비한 선물을 왜 안 받는지 모르겠어요. 거기다가 그럴 거면 생일 잔치는 왜 여는지.”
오지수가 입을 삐죽거렸다.
“유금필 장군의 처지상 그럴 수밖에 없답니다.”
유금필은 사실 정치적으로 상당히 아슬아슬한 입장이긴 했다. 유긍달, 황보제공이나 여타 호족들처럼 든든한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무장으로서 유금필의 명성이 워낙 높았다.
연전연승하고 말갈족들까지 휘하에 넣고 있었다. 이런 유금필의 군사력을 경계하는 사람이 은근히 있었다.
거기에 외척이기도 했으니 유금필로서는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중립을 지키며 누구 편도 들지 않기 위해 모든 선물을 거부하는 것이다.
또 수많은 사람들이 바치는 선물을 받고 재산을 늘리면 그것도 경계를 사는 상황이니 거부 외엔 답이 없었다.
나는 이 이치를 오지수에게 설명해 주었다.
‘젠장 나주원으로부터 오지수를 가르쳐주는 과외비라도 받아야 하는데.’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오지수에게 차분한 미소를 보였다.
“음 그래서 그 동양원 부인이 선물을 안 받는 거였군요. 하지만 그래도 선물은 비싼 걸 사야 해요. 그래야 왕실의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무시 못 하죠. 충주원이나 황주원처럼 으리으리한 선물을 한번 사봐요. 중요한 것은 남들의 시선이에요. 어차피 동양원 부인은 선물을 받지 않을 테니 비싼 걸 사도 우리가 다 돌려받아요.”
내가 설명을 해주었음에도 오지수는 비싼 선물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었다.
‘상산 돈으로 선물을 사도 다시 내가 가져갈 수도 없고 나주원에 두고 가야 하는데 왜 비싼 걸 사니? 상산 기둥뿌리 뽑히게.’
나는 그런 속내를 숨기며 말했다.
“어차피 지난 몇 년간 충주나 황주에서 동양원 부인의 생일 때 부를 과시했을 거예요. 우리가 그들을 따라 해서 사치를 부려봤자 사람들이 감명받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 차라리 우리의 지혜를 보여주는 선물을 준비해야죠.”
“지혜? 그거 좋죠. 연우 언니가 최승우를 꺾을 때와 같이 말이죠. 저는 그럼 언니만 믿을게요. 그래 뭐 특별히 생각한 게 있으세요?”
무서운 면모가 있어도 나를 좋아하는 오지수는 그대로 내 감언이설에 넘어갔다.
“아직까지는 생각이 날 듯 말 듯 하네요. 우선은 시장을 구경해 보죠.”
어느덧 시장에 다 도착해서 나는 수레에서 내리면서 말했다.
“와아아아. 사람도 많고 물건도 많네요.”
오지수는 기쁜 기색으로 역시 수레에서 내리며 말했다.
‘사실 내가 미리 생각해둔 물건이 있긴 해. 근데 오늘은 오지수의 기분을 풀어주는 목적도 있어. 시장구경 없이 바로 필요한 것만 사가면 오지수가 서운하겠지. 한동안은 값싼 군것질거리도 사주고 구경도 하며 시간을 때워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지수를 따라 시장을 거닐기 시작했다.
* * *
그렇게 한동안 군졸들의 호위를 받으며 슬슬 오지수와 좀 놀던 나는 용건을 마치기 위해 왕창근의 상단으로 향했다.
왕창근은 워낙 유명인사라서 행인에게 물어 상단 위치를 쉽게 알아냈다.
‘현대에까지 이름을 남긴 상인이니 뭐. 역사책에 나와 있는 사람이지.’
그래서 이름을 들었을 때 내 귀에 익은 것이다.
‘왕창근은 그야말로 희대의 정치상인이라 할 만하지.’
이 왕창근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왕건은 암탉이 수탉이 됐다는 소문만 듣고도 몹시 신경을 쓰며 나를 보냈는데 그럴 만했다.
‘왕건 본인이 그런 소문을 이용해서 궁예 정권을 흔들어서 결국 무너뜨렸으니.’
왕창근이 궁예 시절에 기이한 글귀가 적인 거울을 발견해서 궁예에게 바쳤다. 그런데 해석해 보면 그 기이한 글귀들은 왕건이 왕이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기이한 글귀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며 민심을 어지럽혔고 불과 몇 달 뒤에 궁예 정권이 붕괴한다.
‘왕건이 왕창근이랑 짜고 사전 작업을 한 게 틀림없다. 왕건이 그때 왕창근에게 은혜를 입어서 궁에 물건을 납품할 수 있는 특권을 줬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상단에 들어섰다. 따지고 보면 나와 오지수는 매우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상단에 들어가서 한 전각에 안내받아 기다리고 있는데 상단주인 왕창근이 직접 나왔다.
“공주 마마를 뵙습니다.”
왕창근은 약간은 어눌한 말투로 인사를 했다. 왕창근은 당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외국인 특유의 억양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고려에 살았지만 외국인이었기에 특유의 억양을 없앨 수가 없었다.
‘거기에 공작을 할 때 당나라 사람이 거울을 바쳤으니 더 신빙성 있게 느껴지기도 했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왕창근에게 말했다.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왔습니다만.”
“예, 곧 안내할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왕 노인!”
왕창근이 밖을 보며 외쳤다. 그리고 소박하지만 깨끗한 옷을 입은 집사 비슷해 보이는 노인 하나가 들어와 왕창근에게 인사를 했다.
“예, 대인.”
“필요한 물건을 찾아드리고 정중히 편의를 봐드리게.”
왕창근은 그런 명을 내리고 물러났다.
“알겠습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왕 노인은 우리에게도 예를 갖추며 말했다. 왕 노인 역시 당나라 사람인지 특유의 억양이 느껴졌다. 고려말이 유창해도 이 느낌을 없앨 수는 없었다.
“우선은 밀랍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리고 향기가 나는 기름이 필요한데 어느 기름을 살지는 직접 향기를 맡아보고 고르겠습니다. 그리고 꿀을 약간.”
내가 준비해 둔 말을 꺼냈다.
‘이것들로 한번 립밤을 만들어볼까? 밀랍이 비싸긴 해도 다른 선물을 준비하는 것보다는 싸니. 무엇보다 립밤은 실용성이 있어서 그럴듯한 명분을 제시하기도 좋아. 어차피 뭘 준비해 가도 유금필은 이 선물을 안 받는다. 유금필에게 선물을 주는 시늉을 하며 추위에 고생하는 장졸들을 챙긴다는 명분을 제시한다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