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40화
40. 어긋남
“그래 오늘은 늦었으니 모두 푹 쉬거라.”
임희는 나와 임연객을 바라보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임희의 얼굴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뭔가 근심스러운 일이 있는 얼굴이야. 뭘까?’
빨리 그걸 알아내야겠다는 생각에 내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아버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잠시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임희는 반색을 하며 대답했다.
“부녀간에 무슨 정담을 나눌 일이 많으신지. 호호. 영공 각하의 서재에 차를 가져다드려라.”
곁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던 상산부인이 하인에게 그런 명을 내렸다. 나와 임희는 그대로 서재에 들어섰다.
하인 하나가 우리 앞에 조심스레 차를 놓고 나가자 내가 말했다.
“사실 아버님이 뭔가를 말씀하시고 싶어 하는 표정이라서 할 말이 있다고 했습니다.”
“네 말이 맞다. 네가 개경에 없는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단다. 그걸 너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임희는 침중한 기색으로 말했다.
“변화라면?”
“결론부터 말하면 연우 네가 힘써서 만들어낸 계책이 모두 무너졌다.”
“예? 그게 무슨……”
나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김순식의 아들 김장명과 오지수 공주 마마를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만든 네 계책은 놀라울 정도였다. 어려울 때 김장명을 도운 오지수 공주 마마를 명주 사람들은 굳게 믿게 됐다. 거기에 나주 왕후 마마 입장에서도 김순식과 이어지기만 하면 엄청난 도움이 아니겠느냐? 정윤파 대신들도 마찬가지고. 내가 굳이 움직일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일이 흘러가는 형편이었다.”
임희가 말을 이었다.
“예, 그게 제가 의도한 바였습니다. 한번 인연을 만들어주고 우리는 뒤로 빠져 있는 거죠. 그런데 대체 왜?”
“폐하께서 개입하셨다.”
임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개입이라면?”
“김순식을 위해 엄청난 환영회를 열어주고 연등회까지 함께 구경한 것까지는 좋았다. 거기에 김장명에게는 원보라는 관직까지 내리셨다. 김순식은 명주군사 600명을 보내서 폐하를 돕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폐하께서 김장명에게 더 이상 학관에 다닐 필요가 없다며 원보로서 명주 군사 600명을 거느리고 외방에 가라 명하셨다.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오지수 공주 마마로부터 떼어둔 것이지. 뿐만 아니라 나주 왕후 마마께도 뭐라 말씀하셨는지 그 이후로 나주원도 명주 쪽에 접근하지 않고 있단다.”
임희의 말을 들은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대체 왜?”
확실히 왕건이 국왕의 권력을 이용해 이리 나서면 내가 아무리 계책을 세워봤자 소용이 없었다.
“나도 폐하의 속내를 모르겠구나. 이번에는 진짜 자연스럽게 정윤 전하의 지위를 굳건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였는데 말이다. 허허허.”
임희 역시 쓴웃음을 지었다.
‘설마 왕건이 정윤 왕무보다 충주원이나 황주원 쪽 태자들을 더 신임하는 것인가? 왕무를 생각했다면 도저히 이럴 수가 없는데.’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미래의 역사학도로서 기록을 보고 온 나도 이 시대 사람들의 심리를 알 수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정윤 왕무가 지금 곤란한 처지에 놓인 것도 왕건이 이런 판을 만들어놔서 그런데. 나 참. 그런데 또 결국 실제 역사에서는 결국 왕무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는 하잖아. 하지만 왕무가 왕위에 있은 지 2년 만에 죽은 것은 결국 왕건 책임이 크고.’
나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니 왕건이 이런 식으로 내 계책을 파토 낸 것이 왕건 자신의 뜻인지 다른 사람의 부추김을 받은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항상 나와 임희 앞에서 생글생글 웃는 모습을 보인 왕건을 떠올렸다.
‘우리에게 친근하게 대하던 왕건이 그럴 리가? 하긴 왕건이 유긍달이나 황보제공 앞에서는 인상을 쓸까? 왕건은 모든 사람 앞에서 웃는 사람이니. 하아.’
정말 일개 사학과 석사가 헤쳐 나가기엔 너무 복잡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계속해서 해봐야죠.”
내가 계획한 일이 한 방에 다 어그러져서 울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말했다. 이대로 혼사에 끌려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게 말이다. 내가 곧 개경을 떠나게 됐다.”
임희가 머리를 긁적이며 나에게 말했다.
“예?”
나는 또 놀라 버렸다.
“폐하께서 나에게 상산으로 가 있으라고 하시는구나. 물론 나뿐만이 아니라 잡찬 유긍달에게도 충주로 가 있으라고 하셨다. 뭔가 그 방면에서 일을 꾸미시는 것 같다. 한동안은 연우 네가 개경에서 잘하고 있어라.”
“하아. 아버님.”
임희가 떠난다는 말에 나는 마음이 허전해졌다.
따지고 보면 그동안 임희가 내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어서 내가 자신감 있게 이런저런 행보를 했다.
그런데 이 임희가 잠시나마 떠난다니 나는 막막해졌다.
‘나를 서경으로 보내놓고 내 계책을 파토 낸 것도 그렇고 이번에 아버님을 굳이 상산으로 보내는 것도 그렇고. 왕건이 진짜 왕무를 좋아하지 않아서 세력이 강하지 못한 상산 임씨를 붙여주려는 것인가?’
나는 이런 생각까지 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역사 기록을 보면 이즈음 해서 계속 견훤에게 몰리던 왕건은 반전을 꾀해보려고 충청도 쪽에 대공세를 펼친다. 거기다가 유긍달도 충주에 보낸다니 대공세를 준비시키기 위해 아버님을 상산으로 보낸 거라고 봐도 된다.’
왕건의 생각이 도대체 뭔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골이 깨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연우 너도 내일부터는 나주원에서 지내야 한다. 나주원에 일주일 동안 가 있어야 하는 날짜가 왔다.”
임희가 그 점을 지적했다.
“……”
여러모로 꼬여가는 상황에 나는 그만 두 눈을 감아버렸다.
* * *
“으하하하. 역시 연우 너를 서경으로 보낸 내 판단이 옳았구나. 멋지게 서경의 일을 처리해 냈어. 과연 나는 인재를 파악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다.”
한림원에서 왕건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침통한 기색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제는 학관에 가서 수업을 마치자마자 최언위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를 불렀다.
“이번 일도 해결했고 연우 아가씨도 한몫을 하는 한림원 직원임을 입증했으니 매일 한림원에 나오긴 해야 할 듯싶습니다. 물론 학생으로서 공부도 해야 하니 한림원에 오래 일할 수는 없지만 매일 반 시진이라도 나와 있어야죠.”
그 말을 듣고 나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한림원에 왔는데 하필 왕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처럼 웃는 낯으로 나를 칭찬하는 왕건이었지만 나는 예전처럼 왕건을 대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속인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곁에서 대내학사 김악이 외쳤다.
“이걸 좀 보십시오. 병부낭중 임연객이 매우 특이한 그림을 올렸습니다. 군사들의 수며 그들이 소모하는 곡식 같은 자료들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하는 신기한 그림입니다.”
과연 임연객이 내가 알려준 그래프를 주변에 알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오오오.”
최응, 최지몽, 구족달 등등의 여러 학사들은 임연객이 올린 그래프를 보고 모두 감탄하는 표정을 지었다.
“허허허, 이 방법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나랏일을 처리하는데 효율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를 여러 대소신료들에게 모두 가르쳐야 합니다.”
최언위 역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나는 그런 학사들의 모습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역시나 그래프를 알려주면 반응이 올 거라는 내 예상이 맞았어.’
한쪽에서 왕건 역시 김악이 보여주는 그래프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병부낭중 임연객이 이 그림을 고안해 냈다라. 그래 연우야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제 오라버니의 일이라 함부로 논평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왕건의 질문에 멋지게 빠져나왔다. 그리고 짐짓 서탁 위의 책을 보는 시늉을 했다.
“지난 수년간 지극히 성실하게 낭중으로 일해왔고 남들과 다름없는 튀지 않는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한 임연객이 이런 그림을 고안해 냈다라. 그리고 자신의 누이와 여행을 다녀온 직후에. 그리고 그 누이는 나를 5번이나 놀라게 한 장본인이고.”
왕건이 나를 보며 그런 말을 했다. 그리고 그래프를 보고 감탄하던 학사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더니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봤다.
“……예, 그렇습니다.”
잠시 허를 찔려서 머뭇거리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그리 대답했다.
“그래, 알았다.”
그런 나를 보며 왕건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이 순간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나름 온 힘을 기울여 짜낸 책략대로 주변 사람들이 움직여 주지 않고 있었다. 책략을 쓴다는 게 진짜 어렵다는 것을 나는 실감하고 있었다.
‘아 진짜 집에 가고 싶다.’
물론 그것은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한림원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터덜터덜 언덕 위 나주원으로 걸어가야만 했다.
* * *
“언니이!”
내가 나주원에 들어서자마자 오지수는 반쯤 눈물까지 흘리며 달려와서 나를 껴안았다.
“공주 마마.”
나는 오지수의 얼굴을 본 순간 화들짝 놀랐다.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볼살이 다 사라졌어?’
초췌해진 오지수는 내가 서경에 다녀온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이 달라졌다. 순식간에 나이를 2~3살은 더 먹은 것 같았다.
“폐하께서 나더러 장명이랑 더 이상 만나면 안 된다고 이 나주원까지 와서 어마마마와 저한테 말씀하셨어요. 거기에 장명이도 멀리 보내 버렸고요.”
오지수가 나에게 그 사실을 일러바쳤다.
‘이 나쁜 놈이.’
나는 속으로 왕건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며 부르짖었으나 의미가 없었다. 왕건은 최고 권력을 지닌 왕인 것이다.
“연우는 서경에서 막 돌아와 피곤할 텐데 그만하렴. 자 식사나 하자꾸나.”
곁에서 나주 왕후도 왠지 모르게 침울한 기색으로 말했다.
하긴 명주와 연결되기만 했어도 나주 왕후는 지금 궁색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데 그 길이 왕건에 의해 막혀 버린 것이다.
시녀들이 차려온 저녁을 먹는데 식사 분위기는 매우 안 좋았다.
나는 식초에 절인 무채를 질겅질겅 씹었다. 그 신맛 때문에 식욕이 일어나야 했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오지수도 입을 불쑥 내밀고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러다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외쳤다.
“얼마 전의 연등회도 망신만 당했고 정말 싫어요. 연등회 같은 건 정말 안 했으면 좋겠어. 거기다가 조만간 동양원 부인의 생일인데 또 우리는 가서 망신만 당하겠죠?”
“지수야 식사를 하거라.”
나주 왕후가 엄한 목소리로 외치는데 오지수는 반쯤 울먹이며 말했다.
“동양원 부인의 아버지라는 그 할아버지는 정말 하나도 이해가 안 가요. 많은 사람들이 기껏 준비해서 주는 선물도 입을 꽉 다물고 하나도 안 받고. 그런데도 사람들은 매해 선물을 주고. 우리는 또 초라한 선물을 준비했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겠죠?”
“어허, 지수야! 그만두지 못하겠니?”
나주 왕후가 언성을 높였다.
탁!
그러자 오지수는 젓가락을 자신의 상에 세게 놓더니 그대로 달려 나갔다.
그 광경을 한쪽에 앉아서 지켜보는 나는 체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남의 집안싸움을 졸지에 눈앞에서 이리 보게 되니. 진짜 민망하다. 진짜 나주원에 엮이면 안 되는데.’
그러나 이 와중에도 나는 호기심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동양원 부인이라면 바로 유금필의 딸 아닌가? 왕건의 부인이기도 하고. 그 부인의 생일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인가? 근데 오지수가 한 말의 의미는 대체 뭐지?’
다만 이 상황에서 나주 왕후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도 없어서 눈만 굴리는데 나주 왕후가 그 기색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나주 왕후의 눈치도 보통이 아니었다.
“곧 동양원 부인의 생일이 다가온단다. 그 부친이신 유금필 장군은 그때는 반드시 궁에 오시지.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유금필 장군에게 잘 보이려고 동양원 부인과 유금필 장군에게 선물을 동시에 바친단다. 그런데 여태까지 그 부녀는 단 하나의 선물도 받지 않았어. 그래서 오기가 생긴 사람들은 온갖 기기묘묘한 선물을 구해서 부를 과시하는데 우리는 그럴 수가 없으니.”
나에게 사정을 알려주며 나주 왕후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주원의 궁핍한 상황상 좋은 선물을 준비 못 했을 텐데 그게 그동안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오지수는 또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싫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서경에서 유금필이 임연객에게 자신이 곧 개경에 올 거라 했는데 동양원 부인의 생일이라서 그랬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