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8화
18. 가불기
나와 임희는 부랴부랴 수레를 타고 궁까지 달려갔다. 그리고 곧바로 시위들의 안내를 받아 왕건이 기다리고 있는 전각까지 일사천리로 향했다.
미리 말이 되어 있는 건지 시위들이 검문도 하지 않고 나와 임희를 통과시켜 주었다.
“여어, 상산백 왔는가? 연우도 참 자주 보게 되는구나. 솔직히 이리 금방 내가 연우 너의 얼굴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왕건이 가볍게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정전에서 조회를 하는 것이 아니기에 왕건은 편한 복장이었고 옥좌에 앉은 것도 아니었다.
약간 높은 단 위에 놓인 의자에 왕건은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쪽 의자에는 왕숙인 왕평달이 지극히 초췌한 낯빛으로 앉아 있었다.
나와 임희를 위한 의자도 2개 놓여 있었다.
“폐하를 뵙습니다.”
나는 임희를 따라 깊숙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나도 왕건 얼굴을 너무 자주 보게 돼서 찜찜했다.
‘내가 아무리 상산백의 딸이고 정윤과의 혼사가 예정되어 있다고 해도 일국의 지존인 왕건 얼굴을 자주 보는 건 그만큼 고려 왕실과 얽혀서 그런 건데. 쩝.’
나는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이번 일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인사를 하고 나서 왕건의 권유로 나와 임희는 의자에 앉았다.
“내 딸 때문에 연우가 큰일을 당할 뻔한 것은 지극히 유감이네.”
왕건은 상당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송구스럽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임희는 황송해하며 다시 몸을 일으켜 예를 갖추었다. 나도 엉거주춤 일어나는데 왕건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잘못은 내 딸이 했는데 뭘 그러나. 아마 조만간 황주원에서 이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상산저에 사람을 보낼 것이네. 아쉬운 부분이 있어도 이 일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지.”
그 말을 들은 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세력이 강한 황주 쪽과 이 문제를 매듭지어야 했는데 왕건이 교통정리를 해줬군.’
어쨌거나 사과를 받으면 상산 입장에서는 체면치레는 하는 셈이었다. 임희도 나와 마찬가지 생각인지 표정이 밝아졌다.
“폐하께서 소신의 가문을 신경 써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래, 사실 그건 큰 문제가 아니고. 연우에게 지난 밤의 일은 다 들었는가? 아마 들었겠지?”
왕건은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들었습니다.”
임희의 대답을 들은 왕건은 약간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더니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아침에야 겨우 상산저로 돌아가서 지금이 낮인데 그사이에 모든 걸 아비에게 말했구나. 참 연우 너는 정말 상산백을 좋아하나 보구나. 그래 너는 내가 젊은 시절에 상산백과 진짜 친구 사이였다는 것을 아느냐?”
나에게로 불똥이 튀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어렴풋이 들었습니다.”
왕건은 원래 궁예의 신하였다. 내 아버지인 임희 역시 궁예의 신하로서 왕건의 동료였다.
그러나 궁예의 폭정이 심해지며 왕건이 거병해서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국왕이 되었다.
즉 왕건과 임희는 확실히 한때 진짜 친구였다. 그러나 왜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내는지 몰라서 나는 이마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내가 젊어서부터 봐서 아는데 상산백은 젊은 청년 시절에도 근엄한 표정만 지었지 용모는 평범했다. 응! 지금 정윤에게 외모가 비할 바가 아니었어. 그런데 그 잘생긴 정윤을 마다하고 굳이 2년 더 상산백의 슬하에 있겠다니! 참 갑갑하구나. 왜 이렇게 상산백을 좋아해? 나는 또 왜 2년 더 있으라고 해서.”
왕건이 손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며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
나는 대답할 가치를 못 느껴서 그저 부끄러운 척 고개만 숙였다. 그러나 속내는 복잡했다.
‘왕건의 태도를 보면 2년 뒤에는 무조건 혼사를 진행시키겠다는 결의가 굳어 보이는데. 아니 굳이 애매한 상산과 정윤을 결합시키려는 왕건의 의도가 뭐야? 실제 역사를 보면 정윤을 밀어주려는 생각은 확실했는데.’
내가 머리를 복잡하게 굴리는데 왕건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쨌든 상산백. 어제 있었던 일은 절대적으로 숨겨야 하네. 나도 오늘 깨자마자 숙부님으로부터 선대의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 이 일에 대해 아는 사람은 나, 정윤, 숙부님, 그리고 상산백과 연우. 5명뿐이네. 절대 이 일이 새어 나가서는 안 돼.”
왕건의 표정이 순식간에 엄중해져서 임희도 매우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예, 폐하.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단순히 내 집안 이야기라 숨기려는 것이 아닐세.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면 신라와의 외교에도 지장을 줄 수 있어서 이리 당부를 하네.”
왕건이 입을 열었다.
‘하긴 신라를 아예 짓밟고 멸망시키려는 백제의 견훤과 달리 왕건은 신라를 우호적으로 대하고 있다. 그런데 왕건의 선대와 신라 조정 사이의 은원이 드러나면 그런 외교노선을 유지하기 힘들 수도.’
나는 그런 계산을 했다. 아마 이번에 왕건이 상산을 위해 교통정리를 유리하게 해준 것도 이 비밀을 지키라고 적당히 혜택을 준 것 같았다.
“흥!”
다만 왕건의 그 말을 듣고 한쪽에 앉아 있던 왕평달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격분한 기색으로 손을 떨었다.
왕평달은 아마 자기 부모와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나서는 신라를 계속 도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숙부님! 좀 고정하시지요. 뭐 연우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좋게 끝난 것이 아닙니까?”
왕건이 자신의 늙은 숙부를 달래듯이 말했다. 왕평달은 집안의 어른일 뿐 아니라 왕건이 젊었을 때부터 큰 도움을 준 사람이라 함부로 대하기 어려웠다.
왕평달은 진지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말했다.
“네가 꿈속에서 내 어머님을 만난 것은 사실이냐? 내 어머님이 정말 용이 되셨느냐?”
그 말을 들은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언제 당신 어머니를 꿈속에서 만났다고 했어? 그냥 신령한 용을 꿈속에서 봤다고 했는데.’
하긴 말이 정윤을 거치면서 좀 와전된 모양이다.
어쨌든 꿈 타령은 정윤 왕무에게 내가 어떻게 비밀을 풀었는지 대답해 주기 싫어서 지어낸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거 거짓말이라고 하면 맞아 죽을 기세인데.’
그래서 나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대왕대비 마마인지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자유자재로 용으로 변하는 신령한 부인이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신령한 도움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리 시간에 딱 맞춰 위기에서 빠져나왔겠습니까?”
나는 아예 이를 악물고 거짓말을 이어 나갔다.
“보십시오. 숙부님. 제 말이 맞지 않습니까? 결국 할머님도 용이 되어 편하게 지내고 계십니다.”
왕건이 왕평달을 그리 위로했다.
‘아마 왕평달은 자기 어머니가 여생을 쓸쓸하게 동굴에 갇혀 지내다가 죽는 걸로 이야기가 끝나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저러겠지.’
그런데 왕평달은 거기에서 안 끝내고 또 꼬치꼬치 물었다.
“그럼 네가 꿈속에서 본 부인의 용모는 어떠했느냐?”
나는 약간 뜨끔해하면서도 거짓말을 밀고 나갔다.
“중년의 나이에 피부가 기이할 정도로 흰빛이었습니다. 매우 우아한 자태에 머리칼은 검은데 틀어 올렸고 날씬한 몸매였습니다. 그리고 눈은 크고 코와 입과 조화롭게.”
내가 말을 이어 나가는데 왕평달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맞다. 분명 어머님께서 네가 죽을까 봐 나타나서 널 구한 거야. 내 어릴 적 기억과 똑같은 모습이다.”
‘맞긴 뭐가 맞아. 그냥 좋은 말은 다 갖다 붙인 건데.’
나는 내심 그런 생각을 했으나 아마 왕평달은 자기 어머니가 용이 됐다고 믿고 싶어서 자기 기억을 왜곡했을 것이다.
어쨌든 충격이 큰지 여러모로 정신을 못 차리는 왕평달을 왕건이 위로하느라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형편이 아니었다.
왕건의 허락을 받고 나와 임희는 조용히 궁을 나섰다.
* * *
다만 궁에서 상산저로 돌아오는 수레 위에서도 임희의 표정은 상당히 근심스러웠다. 그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연우 네가 개경에 와서 총명함을 드러내는 바람에 폐하께서 너를 며느리로 들이겠다는 생각이 너무 확고해지신 것 같다. 방금 전 알현을 하며 나는 그것을 느꼈다. 거기에 왕실의 비밀까지 알게 됐으니. 폐하께서는 반드시 너와 나를 가족으로 만드실 요량인 것 같다.”
왕건과 오랜 세월 함께한 임희답게 그 속내를 예민하게 느낀 것 같았다.
“그러나 제가 활약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혼사가 그대로 진행됐을 것입니다. 계략을 써서 어쨌든 2년의 시간을 번 것입니다.”
나도 입맛이 쓰긴 썼다.
‘지금 내 처지는 그야말로 이래도 결혼, 저래도 결혼인 상황이라.’
“네 말대로다. 지금 우리 상산의 힘으로는 주변 상황에 휘둘릴 수밖에 없구나. 결국 흉험한 왕위 계승 경쟁에 우리도 끼어들 수밖에 없는 것이냐?”
임희는 가볍게 탄식했다.
“그 일은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나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알맹이가 남자라는 것은 둘째치고 이번 일로 고려의 왕위 계승 경쟁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번에 황보인혜는 나를 그저 겁주려고만 했을 뿐 죽일 의도가 아니었는데도 나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새삼 이 아수라장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마땅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구나.”
“남은 2년 동안 제가 좀 더 활약하고 아버님도 은근히 정윤 전하를 도우며 우리 상산의 힘 자체를 과시하는 것이 방책입니다. 지금 유긍달 등은 우리 상산의 힘에 한계가 있다고 여겨 우리를 정윤에게 붙여주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이 만만치 않고 정윤에게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유긍달 등이 생각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유긍달, 황보제공이 혼사를 막기 위해 힘을 쓸 것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고려에서 왕건에게 정치력으로 맞설 만한 사람은 유긍달 밖에는 없다.’
향후 역사의 흐름을 보면 결국 유긍달이 자신의 외손자들을 차례로 왕으로 즉위시키며 이 왕위계승경쟁의 최종승자가 된다.
‘강압적으로 그 일을 이룬 게 아니라 여러 호족들과 혼사를 통해 교묘히 인맥을 만들어 유긍달의 외손자인 정종, 광종이 즉위해야만 고려가 안정되도록 판을 짜놨다.’
그 유긍달의 능력이라면 이 혼사도 무를 수 있었다.
“그래, 그 방법밖에는 없겠구나. 그러나 만만치 않은 일이다.”
잠시 생각을 하던 임희가 약간은 씁쓸하게 말했다. 2년 내에 상산의 힘을 키운다는 것이 이론상으로나 가능하지 실질적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 역사의 흐름을 아는 내가 나선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 * *
다음 날이 되자 왕건의 호언장담대로 황주 황보가에서 사람이 왔다.
“당주님께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는 것에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저를 보내셨습니다. 이것은 당주님께서 보내신 사과의 선물입니다.”
황보가의 사람은 막대한 양의 예물을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바치며 말했다.
어쨌든 이만한 예물을 사과의 의미로 받았으니 확실히 상산의 체면이 서긴 선 셈이었다.
‘왕건이 알맞게 일을 처리해 줬군. 그건 그렇고 미안하다고 이 정도의 예물을 보내다니. 황주가 부유하긴 하군.’
그 광경을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황주는 비옥한 평야를 끼고 있어 농업 생산량이 엄청났다.
거기에 오늘날의 대동강과 재령강이 주변에 흘러서 교통도 편했다. 그런 만큼 왕건이 적당히 상산 쪽에 사과를 하라고 언질을 주자 어마어마한 예물을 보내온 것이다.
‘사람이 말이야. 그래도 돈으로 잘못을 때우려 하고 말이야. 헉 저건 은병?’
황보가에서 온 사람이 나무상자에 든 은덩어리를 꺼내서 바치는 것을 보고 나는 투덜거리려다 말았다.
확실히 엄청난 양의 예물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