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7화 (17/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7화

17. 떠밀기

한참을 저민의의 비석 앞에 엎드려 있던 왕무는 묵묵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내쪽을 향해서도 읍을 했다.

“아니, 어찌 정윤 전하께서 이러십니까?”

나는 당혹스러워서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풀고자 했으나 풀리지 않은 증조부 님의 비밀이 그대 덕에 풀렸어. 나는 혹여 물이 들어올 때 무슨 비밀이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완벽한 오산이었다. 연우, 그대 덕에 불초한 후손이 증조부님의 유지에 따라 증조모님의 유골을 수습할 수 있게 됐다. 그에 감사를 표할 수밖에. 다만 궁금한 것은 어떻게 해서 이 수수께끼를 풀었냐는 거지. 그걸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왕무를 나를 향해 정중하게 물었다. 물론 작제건이 남긴 글에 자신이 거타지의 이야기를 참고했다고 거론은 했지만 그것만으로 속시원히 수수께끼를 풀 수는 없었다.

“허허허, 그것이 제가 수수께끼를 풀었던가요? 워낙 상황이 급박해서 기억이 잘.”

나는 아저씨 같은 웃음소리를 내며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빠져나가려고 애썼다. 내가 수수께끼를 푼 과정을 털어놓으면 작제건이 거타지 얘기를 베꼈다는 것도 지적해야 하고 여러모로 곤란했다.

‘거기에 내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왕건의 반응이야 뻔하다. 역시 인연이라서 그렇다고 혼사를 더 밀어붙이겠지. 젠장 여기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는데.’

황보인혜가 나를 우물 바닥에 밀어넣은 것은 확실히 신의 한 수이긴 했다.

정윤비라는 걸 인정 안 하려고 비밀통로로 들어왔는데 어찌저찌 상황에 몰려 수수께끼를 푸는 바람에 일이 더 꼬였다.

‘거기에 따지고 보면 이 동굴에 왕무와 단둘이 있게 되다니.’

나는 혹여 왕무가 딴 생각이라도 먹을까 봐 슬며시 눈치를 봤다. 물론 잠깐 대화를 나눠봐도 신사에 가까운 남자이긴 했지만 또 몰랐다.

다행히 그런 기미는 없었다. 대신 왕무의 추궁은 무서웠다.

“확실히 어느 쪽에 석문이 있는지 정확히 지적하며 그곳을 열라고 그대가 지시했다. 그대가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소리지.”

“그것은 모두 인명을 귀히 여기는 신령한 존재의 덕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렇게 말을 풀어나갔다.

“신령?”

“신례를 치르느라 이 어두운 비밀통로에 있게 돼서 겁먹은 저는 울다가 지쳐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꿈에서 커다란 황룡 하나가 나타나더니 웬 아름다운 중년 부인으로 변해서 저에게 말했습니다. ‘원래는 이래서는 안 되지만 무고한 생명이 지금 스러질 판이니 도리가 없다. 서둘러 깨서 12번째 돌횃대 아래 석문을 열어라. 귀인이 나타나서 너를 돌봐주리라. 그리고 앞으로 신례라는 명목으로 이런 위험한 짓을 벌이지 마라.’ 저는 놀라서 잠에서 깨었는데 물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 말을 따랐을 뿐입니다.”

나는 천연덕스럽게 말을 꾸며대었다.

‘이러면 내가 왕실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기보다는 신령한 존재가 무고한 목숨을 구한 일화가 되지. 흐흐흐.’

“……그걸 나보고 믿으란 소리군. 하하하.”

왕무는 그런 나를 보며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왕무를 보며 나는 화제를 좀 전환할 필요를 느끼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어쨌든 이 비밀통로의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정윤 전하께서 진상을 알게 되었으니 이 사실을 폐하께 알리십시오. 폐하께서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전하께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애초에 왕무는 여러모로 강대한 호족들에게 휘둘리는 처지였다. 그 와중에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이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어볼까 하고 드나든 것이었다.

이제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이것을 적절히 사용한다면 왕무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정치적으로 약간이나마 점수를 따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선물을 던져줬으니 나와 상산 역시 매끄럽게 이 흉험한 정치판에서 발을 빼게 되는 거지. 혼사가 설사 파토 나도 왕무 쪽이 우리를 원망하진 않을 것이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고 말하는데 뜻밖에 왕무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대의 지혜로 수수께끼를 풀었든 혹은 신령한 계시를 받았든 전적으로 그대가 진상을 밝혀냈다. 그대가 공을 가져가야지 내가 사사로운 이득 때문에 공을 가로챌 수는 없다.”

“…….”

나는 그 말을 듣고 할 말을 잊었다.

‘이리 세상 물정을 몰라서야. 하긴 사서의 기록을 봐도 왕무의 성품은 기본적으로 온화하고 성실했다고 하지.’

그리고 현대에서의 나이까지 따지고 보면 왕무 나이가 딱 내 조카뻘이었다.

딱 소년다운 정의감에 불타오를 때였다. 그래서 나는 굳이 더 이상 왕무에게 이 공을 가져가라고 권하지는 않았다.

‘내 말을 거부할게 뻔하니.’

대화를 마친 후에도 나는 작제건이 숨겨놓은 공간을 샅샅이 수색했다. 몇 가지 물건들이 더 나왔다.

두은점과 저민의의 가계내력을 적은 족보도 나왔다. 이 외에 저민의가 이 동굴 안에서 생활할 때 썼던 가재도구 같은 것들이 나왔다.

왕무는 그런 것들을 발견할 때마다 경건한 태도로 취했다.

“이제는 물이 다 빠졌으니 나가봐야겠습니다.”

그 사이 슬쩍 돌계단 쪽을 살펴본 나는 그리 말했다. 나와 왕무는 그대로 돌계단을 내려와 다시 비밀통로에 섰다.

그리고 왕무는 석문을 밀어서 다시 닫았다. 나도 짐짓 돕는 척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힘을 진짜 쓰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왕무는 이 무거운 석문을 닫는 데 성공했다.

‘참 무서운 괴력이야.’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나는 왕무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왕무는 원래 들어왔던 예성강 쪽 출구로 가고 나는 내가 들어왔던 우물 쪽 출구로 나왔다.

* * *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빠져나온 나를 귀신 취급해!’

내가 다시 분기탱천하는데 곁에서 왕평달이 초조하게 나를 보챘다.

“비밀통로의 비밀을 풀어내서 네가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니냐? 나는 저 비밀통로를 지난 수년간 살폈다. 물이 들어오는 순간 너는 죽는 길 외에는 없는데 이리 돌아왔다. 비밀을 풀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왕평달이 나름 예리한 추리를 했다.

“생사가 오가는 와중이라 정신이 혼미해서 기억이 흐릿합니다.”

내가 애매하게 대답하는 데 왕평달이 나를 압박하지 않고 오히려 애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아는 것이 있으면 제발 말을 하거라. 숨기지 말고.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느냐? 저 비밀통로 안에는 분명 내 어머님과 관련된 이야기가 숨겨져 있다. 나는 정말 평생 그것을 찾았어. 분명 어린 시절에는 어머님이 내 곁에 계셨다. 대단히 행복했던 몇몇 장면이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어머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다. 아무리 아버님께 캐물어도 나온 것은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와 향가뿐이었다! 내가 평생을 캐물어도 나온 게 그 정도다. 이런 내 마음을 네가 알겠느냐?”

왕평달의 눈에 언뜻 눈물이 보인 것 같아서 나는 화들짝 놀랐다.

‘신라 말의 풍운을 뚫고 나온 왕평달이 이리 나오다니.’

하긴 하루아침에 어머니가 사라지고 아버지인 작제건은 묵묵부답이니 어린 왕평달은 충격이 컸을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충격은 진짜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마음이 좀 약해졌다.

‘어쨌든 왕평달은 왕씨 왕족 중에 상당히 중요한 인물이니 호의를 베풀어놔야지.’

왕평달 본인이 왕건의 숙부로 왕족 중 최고의 원로이기도 했지만 더 대단한 것은 왕평달의 아들 왕식렴이었다.

‘왕식렴이 아마 왕건의 사촌동생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지. 왕평달에게 호의를 베풀면 왕식렴과의 사이도 나빠지진 않겠지.’

다만 냉큼 내 입으로 진상을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았다.

‘정윤 왕무는 거절했지만 어떻게든 왕무의 입에서 이 이야기가 나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좋아. 왕평달이 대뜸 나에게 와서 이러는 것이 오히려 잘됐다.’

나는 그런 계산을 하며 입을 열었다.

“비밀통로의 수수께끼가 풀린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제 기억이 흐릿한 것도 사실입니다. 진상은 정윤 전하께서 알고 계십니다.”

“정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제 말대로 하시면 원하는 답을 얻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아마 왕숙께서 정윤 전하에게 이 이야기를 물어도 대답을 미루려 하실 것입니다. 그때는 이리 말씀하시면 됩니다. ‘네가 비밀을 열지 않았느냐! 네가 연 것은 사실인데 서둘러 고하거라.’ 그러면서 강하게 나오시면 정윤 전하께서 대답을 해주실 것입니다. 정윤 전하께서 비밀을 여셨기에 제가 대답을 못 드리는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자마자 왕평달은 나에게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정윤의 처소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왕평달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중얼거렸다.

“비밀을 푼 것은 확실히 나지만 비밀석문을 연 건 확실히 정윤이지. 나는 단 한마디도 거짓말을 안 했어. 나중에 정윤이 이 일로 나에게 따진다면 이리 답해줘야지.”

거기에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자서 내 기억이 흐릿한 것도 사실이었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은 아닌데 지난밤의 일이 꿈결 같기도 했다.

‘물론 왕평달은 정윤이 비밀을 열었다는 소리를 듣고 정윤이 비밀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나는 확실히 진상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저리 달려가는 것이지만 그거야 왕평달 탓이고. 정윤이 작은할아버지 왕평달을 탓할 수는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나를 마중나온 상산군졸들이 구정까지 당도했을 시간이었다.

그들의 호위를 받으며 좀 상산 저택에 빨리 가서 잠을 자고 싶었다.

* * *

상산저에 도착한 나는 우선 재빨리 아버지인 임희를 만나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다 이야기했다.

‘지금 내가 지닌 힘의 9할은 아버님에게서 나오는 거라 아버님은 진상을 다 알고 계셔야지.’

임희에게는 내가 작제건이 남긴 이야기를 풀어낸 방법까지 다 이야기했다.

“그 부분을 숨긴 건 정말 잘했다. 의조 대왕의 전설이 남의 이야기에서 따왔다고 운운하는 것은 설사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책잡힐 뿐이다. 그래 너는 가서 쉬거라.”

임희는 약간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찌 이 일을 수습할지 걱정이 되긴 하겠지. 이런 일을 당했는데 최소 황주 쪽에 항의는 해야 하긴 할 텐데. 또 황주 쪽의 세력이 만만치 않으니. 그렇다고 이런 일에도 묵묵히 참으면 상산의 위신이 깎일 테고.’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임희의 근심이 많을 거란 생각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같이 이 난국을 돌파할 꾀를 냈을 텐데 지금은 너무 졸렸다.

밤을 새워서 이제는 머리가 흐리멍덩했다. 그래서 나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그대로 임희의 처소에서 물러나 내 방에 가서 눕자마자 잠들었다.

* * *

그렇게 누워 있는 나를 누군가가 흔들어 깨웠다.

“아가씨 피곤하시겠지만 일어나세요. 급합니다.”

잠결에 상산에서 개경까지 나를 따라온 시녀 경란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음.”

그래도 너무 피곤해서 내가 이불 속으로 파고드는데 경란이가 애가 타서 말했다.

“폐하께서 영공 각하와 아가씨의 입궁을 명하셨습니다. 영공 각하께서도 아가씨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계세요.”

그 말을 듣고 나는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창밖을 보니 아직 한낮이었다.

‘지금쯤이면 왕건의 귀에도 이 모든 사건의 전말이 들어갔을 거고. 이번에는 왕건이 이 사안을 해결해 줄 모양이군. 하긴 왕실의 옛이야기와도 연관된 문제인데 왕건이 안 나설 수 없었겠지.’

상산 입장에서 여러모로 해결하기 까다로운 문제였는데 왕건이 나서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런 만큼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입궁할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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