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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12화 (12/216)

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2화

12. 용녀의 우물

황보인혜는 이미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된 것 같았다. 왕족인 자신의 가계 전승에 대한 자부심이 강해보였다.

‘정말 홀릴 것 같군.’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마음이 흔들렸다. 이미 언급했듯이 황보인혜는 엄청난 미녀였다.

그런 미녀가 흐릿한 등롱 불빛을 받으며 숲속에서 옛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걸 또 나는 직접 보고 있는 것이다.

사학과 출신인 만큼 이런 옛이야기를 좋아하는 나는 진짜 황보인혜에게 빠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야 해. 황보 가문은 나에게 절대 호의를 품고 있지 않아.’

내가 억지로 마음을 다잡는데 황보인혜의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용녀 할머니는 작제건 할아버지와 혼인을 하고 나서도 우물을 통해 용궁을 오락가락했지. 용녀 할머니는 할아버지에게 절대 이 광경을 보지 말라고 당부했어. 그런데 호기심이 많은 할아버지는 그만 약속을 어기고 용녀 할머니가 용으로 변해 용궁으로 가는 모습을 훔쳐봤지. 그래서 용녀 할머니는 화를 내며 용궁으로 떠났고 작제건 할아버지는 후회하며 말년에 출가해 승려가 됐지. 이게 바로 그 우물이야!”

숲속을 거닐면서 말을 잇던 황보인혜가 손가락으로 수풀 사이에 있는 오래된 우물 하나를 가리켰다.

“헉.”

순간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나왔다. 이미 아는 이야기라도 황보인혜가 극적인 분위기 속에서 말하며 그 증거인 우물까지 보여주니 또 놀란 것이다.

나도 순간적으로 감동을 먹긴 했다.

“여기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아는 이야기일 거야. 다만 우리 왕실 사람들만 아는 뒷이야기도 더 있어.”

황보인혜는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즐기며 말했다.

“그게 뭔가요?”

학생들이 입을 모아 황보인혜에게 물었다.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고? 그건 또 뭐지? 금시초문인데.’

현대에서 온 나도 또 다른 뒷이야기가 있다는 소리에는 좀 놀랐다. 그때였다.

“임연우!”

황보인혜가 나를 지목했다.

“예. 공주 마마.”

내가 예를 갖추며 한걸음 나섰다.

“오늘 이 이야기는 네가 치를 신례와 관련이 있어. 이 우물 밑에는 용녀 할머니가 용궁까지 갈 때 쓰신 통로가 진짜 있다. 그리고 그 통로에는 한 가지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향가 한 수가 왕실에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 향가에 비밀을 풀 해답이 있다고 하지.”

황보인혜가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설마?’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황보인혜가 입을 열었다.

“이번 신례에서 연우 네가 이 비밀을 한번 풀어보면 어때?”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어이가 없었다.

‘말이 거창해 신례지 사실상 오늘날의 신고식인데 이렇게 어렵다고? 아니 그러면 여태 다른 호족 자제들은 어떻게 이걸 뚫었어?’

그러면서 나는 힐끗 뒤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살폈다.

웅성웅성.

과연 이번에 내가 받을 신례의 과제를 듣고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저들은 나와 같은 난이도의 신례를 치르지 않은 것이 틀림없어. 게다가 오라버니인 임연객도 술 좀 먹고 고생 좀 하다가 끝났다고 했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뭔가 하소연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공주 마마.”

그러자 황보인혜는 웃으면서 말했다.

“연우는 비록 어린 소녀의 몸이지만 그 지략이 탁월해서 수많은 백제군사들 사이에서 우리 폐하를 구출해 냈잖아. 너무 쉬운 과제를 내면 고생을 한번 해본다는 신례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겠어?”

“…….”

또 그 이야기를 꺼내는 황보인혜에게 나는 입을 우선 다물 수밖에 없었다.

‘뒤끝이 세군.’

나를 도와주고 싶어 하는 배수현이나 다른 학생들도 황보인혜가 이리 나오자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인혜야! 이 야밤에 그냥 거리만 걸어도 무서운데 우물 속에 들어가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라는 것은 누가 봐도 너무 과한 처사야. 거기다가 이런 난이도의 신례는 전례가 없지 않았니?”

이때 유설란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또 나서줬다. 나와 학생들은 그런 유설란의 개입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언니!”

또 제동이 걸린 황보인혜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 유설란이 말했다.

“오늘 내 거처인 충주원에 모두를 초대할게. 충주원에서 밤새도록 미리 준비해둔 야식을 나눠 먹자. 그리고 연우는 우리를 위해 차도 따라주고 노래를 불러주든 혹은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며 고생을 해주는 거지. 이것도 충분히 신례가 될 만하지 않겠어?”

유설란이 미소를 지으며 합리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맞습니다. 공주 마마.”

한쪽에서 눈치만 보던 배수현이 반색을 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그 정도가 합리적인 신고식이라 할 만하지.’

내가 그런 생각을 할 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황보인혜가 외쳤다.

“언니! 그러나 이미 저는 임연우에게 저의 신례 과제를 내줬어요. 과제를 내주기 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과제를 냈는데 이리 손바닥 뒤집듯이 뒤집는다면 저는 어찌 되나요? 왕족으로서 내 말이 이리 쉽사리 번복되면 왕실의 권위가 어찌 되나요?”

황보인혜의 그말에 유설란은 짐짓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렇구나. 이를 어쩐다? 그래 이렇게 생각하면 어떻겠니?”

유설란이 황보인혜를 달래듯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라는 건가요?”

“연우 역시 따지고 보면 남이 아니지 않니? 곧 큰오라버님의 배필이 되어 우리와 한 식구가 될 텐데. 설사 인혜 너가 연우를 위해 네 말을 번복하더라도 같은 왕실 식구의 편의를 봐주는 것이 되어 왕실의 권위에는 조금도 해가 가지 않아. 어떻게 생각하니?”

유설란이 빙글빙글 웃으며 그리 말했다.

“당연히 공주 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한쪽에 있던 배수현이 눈치없이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신례를 구경하러 왔다가 상당히 엄중해 보이는 상황에 주눅이 들어 있는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만이 침통한 표정이었다.

‘결국 유설란이 베푼 호의도 이런 식으로 나를 몰아가려고 보여준 것이었군. 유설란과 황보인혜는 한 패였어.’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을 곱씹어보며 그런 결론을 내렸다.

지금 유설란의 말은 나를 도와주는 듯했지만 결국 나 자신이 스스로 정윤비임을 인정하도록 몰아가고 있었다.

‘지금 여기에 있는 수많은 호족들의 딸 앞에서 내가 정윤비로서의 특권을 이용해서 이 신례에서 빠져나가면 정윤과의 혼사는 결코 피할 수 없이 그대로 진행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개경으로 오는 배 위에서 유긍달과 벌였던 수싸움을 떠올렸다.

‘유설란은 유긍달의 외손녀이기도 하고 이 정도로 철저하게 나를 몰아간 것을 보면 확실히 유긍달이 외손녀를 시켜서 손을 쓴 것인가?’

내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느 순간 배수현이 내 곁으로 다가와서 말했다.

“연우야. 뭐해?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보니 장내의 모든 사람이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유설란의 말대로 하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소녀가 황보인혜 공주 마마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황보인혜 공주 마마께서 내리신 신례를 그대로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뭐라고?”

내 말을 듣고 황보인혜는 오히려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유설란 쪽을 바라보았다.

당황해하는 황보인혜를 대신해 유설란이 나서서 말했다.

“이 한밤중에 혼자 저 우물에 내려가겠다고? 우물 아래 설치된 비밀통로는 상당히 길고 으스스해. 그냥 충주원에 함께 가자.”

유설란이 아름다운 얼굴로 권했다. 참 예쁘긴 확실히 예뻤다.

이런 유설란이 속내야 어떻든 따스한 어조로 나에게 권유를 하자 마음이 흔들리기는 했지만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녀는 원래 옛이야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습니다. 왕실에 따로 전해져 내려오는 뒷이야기와 향가가 있다는 말을 들으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번 이 과제에 도전해 보고자 하니 받아주십시오.”

나 역시 태연하게 웃으면서 받아쳤다.

‘어떻게든 혼사를 피하려고 사벌주까지 가서 그 쌩쇼를 했는데 이깟 신례가 좀 무섭다고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무엇보다 나는 절대 결혼을 할 수 없는 몸인데.’

단순히 가문의 안위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인데 어떻게 남자와 결혼을 하겠는가? 이런 생각으로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정말 네가 우물에 내려가서 내가 낸 과제를 풀 수 있다고 믿는 거니?”

황보인혜가 곁에서 조금 화가 난 기색으로 말했다.

“한번 도전은 해봐야죠.”

나는 당차게 말했다. 그러나 나도 내심 내가 비밀통로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거라 믿지는 않았다.

‘우물 바닥에 마련되어 있다는 비밀통로에 가서 하룻밤 버티고 있으면 아버님이 날 찾으러 달려오겠지.’

내일 아침이 돼도 내가 안 돌아오면 임희와 상산 사람들이 날 찾아올 것이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신례도 그냥 흐지부지 넘어갈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음, 연우 네 뜻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나.”

유설란도 내 고집을 듣고 약간은 냉정해진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황보인혜에게 눈짓을 했다.

“작제건 공께서 말년에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했지? 여러 사람들은 우물 바닥의 비밀통로를 발견하고 작제건 할아버지에게 어찌 된 영문인지 물었으니 결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으셨어. 그리고 진성왕 대에 이르러 삼한 땅이 혼란해지자 그제서야 작제건 공은 향가 한수를 남기셨어.”

남의 옷을 빌려 평생을 살았는데

어찌 이리 내 옷처럼 잘 맞는가?

다만 옷 주머니 두 개가 더 터져 있구나.

아! 나는 본디 학문을 모른 채로 살다 가네.

황보인혜가 도도한 표정으로 향가 한 수까지 읊어주었다. 나는 번뜩이는 눈으로 황보인혜의 이야기를 매우 주의 깊게 들었다.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이런 향가를 남겼다는 것은 현대에서 온 나도 몰랐다. 이 사람들이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확실히 새로운 발견을 했군.’

본래 현대의 역사학도였던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사이 유설란은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줄사다리를 가져와 우물 아래로 늘어뜨려라!”

그리고 황보인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자! 과연 이 향가만 듣고 네가 이 비밀을 풀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이라도 포기하면 얼마든지 받아들일게.”

“맞아. 연우야. 이 한밤중에 저 우물 바닥으로 내려가겠다고?”

곁에서 유설란도 은근히 나에게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나는 말 없이 옆에 있는 시녀로부터 등롱 하나를 받아들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황보인혜와 유설란에게 짧게 묵례하며 나는 그대로 우물가로 다가갔다. 등롱을 들어 바닥을 비춰보니 이미 바싹 말라 있었다.

막상 이 밤에 우물 밑으로 내려가려니 확실히 무섭긴 했다. 진짜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우물에 무슨 비밀이 있는 건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단호하게 등롱을 들고 줄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연우의 모습이 우물 아래로 사라지자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었다.

연우에게 호의를 품고 있었던 배수현은 발을 동동 굴렀으나 지금 상황에서 뭘 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연우를 압박했던 황보인혜도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떡하죠. 언니? 진짜 내려가 버렸어요.”

“뭐 생각 외로 버티기는 하네. 그러나 아무도 없는 어두운 지하통로에서 아무리 대담해도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야. 분명 잠깐 버티다가 다시 올라올 게 뻔해. 결국 우리 의도대로 갈 수밖에 없어.”

유설란은 낭패감을 감추며 말했다.

“만에 하나 쟤가 진짜 수수께끼를 풀거나 하면 어쩌죠?”

“그럴 리가 있니? 작은 할아버지께서 지금까지 매달리고 있는 문제지만 여태 풀리지 않은 비밀이야. 애초에 연우 쟤가 절대 풀지 못할 과제를 내야 해서 일부러 이걸 택했잖아. 조금만 기다려봐.”

유설란은 곁에서 초조해하는 황보인혜를 달래듯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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