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하니 시어머니가 29명 11화
11. 신례
여기까지 생각하니 내 이마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어머, 한림원령께서도 연우의 소문을 들으시고 인정할 정도면 그 소문이 진짜일게 당연하지. 그리고 방금 전 우리 모두 연우의 학문이 탁월하다는 것을 목격했잖아. 너는 무슨 심보로 학관에 처음 온 아이를 이리 핍박하는 거니?”
청아한 목소리가 나를 구원했다. 이번에는 하늘색과 흰색이 배합된 비단옷을 걸친 지적인 미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보인혜 눈치를 안 보고 말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왕족인가? 왕건의 딸?’
내 짐작이 맞는지 다른 호족 자제들도 하늘색 옷을 입은 소녀에게 역시 고개를 숙였다.
“유설란 공주 마마셔.”
왠지 모르게 나에게 호감을 가진 것 같은 배수현이 또 그리 알려주었다. 그러나 새로 다가온 공주의 이름을 듣고도 나는 선뜻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왕건의 왕후와 부인 중에 유씨가 많아서 어디 유씨의 딸인지 모르겠군?’
내가 약간 당황해하고 있는데 유설란이 이런 내 속내를 꿰뚫기라도 한 듯 입을 열었다.
“충주원의 유설란이라고 해.”
‘유긍달의 외손녀였군,’
나는 개경으로 돌아오는 배 위에서 있었던 유긍달과의 수싸움을 떠올리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유설란이 나를 왜 구해준 것인지 그 의도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언니!”
황보인혜가 유설란에게 항의하듯 외치는데 유설란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말이 맞지 않니? 그리고 오늘 우리가 연우에게 온 것은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고 온 것 아니니? 왜 원래 목적은 내던지고 연우를 곤란하게 하니?”
성격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황보인혜도 유설란의 그 말에는 풀이 죽었다.
“그래 어쨌든 네 말이 거짓은 아니겠지. 폐하를 구해줘서 딸로서 고마워.”
황보인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에게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예를 갖추었다.
“우리가 오늘 너에게 이리 온 것은 신례가 있을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야. 이런 관습이 번거롭긴 하지만 지키지 않을 수도 없고. 아마 오늘 밤새도록 신례를 해야 할 수도 있는데 미리 전갈을 하지 않으면 상산백께서 걱정하실 수 있잖아. 네가 미리 그분께 연락을 해놓으라고 이렇게 왔어. 과분하지만 나와 인혜가 이번 신례를 주관하게 되었어. 그래서 궁에서 신례가 이루어질 것이니 너를 마중 나올 군졸들은 아침에 구정에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면 돼.”
유설란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이미 오빠인 임연객으로부터 이에 관해 들었기에 흔들림 없이 대답할 수 있었다.
“오호. 신례면 오래간만에 볼 만하겠네. 하하하.”
“연우야. 기대할게.”
신례라는 말이 나오자 주변 여기저기서 웃음소리와 함께 분위기가 풀어졌다. 한순간에 위기를 넘긴 나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교실 안에 관복을 걸친 다른 학사가 들어섰다.
“다음 수업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제서야 학생들은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새로 들어온 학사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 * *
확실히 그나마 최언위가 하는 수업은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기미가 있었지만 다른 학사들의 수업은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꾸벅꾸벅.
아예 고개를 떨구며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에 그러니까.”
강론을 이어가는 학사는 그것을 못 본척하며 묵묵히 강의를 이어나갔다. 왕족들과 호족의 자제에게 지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사삭.
하지만 나는 계속 붓을 놀리며 학사의 말을 받아적었다. 정말 딱 지금 내 수준에 알맞게 학사가 강론을 해주고 있었다.
‘확실히 이대로 한동안 공부를 하면 문리가 트이겠는걸?’
예전에 못 했던 공부를 이곳에서는 마음껏 할 수 있어서 나는 오히려 기뻤다. 상당히 긴 학사의 강의도 나에게는 매우 짧게 느껴졌다.
“이제 마치겠습니다.”
그런데 아마 나만 이 강의가 짧게 느껴진 것 같았다. 학사가 수업을 끝내자마자 여기저기서 관절 푸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드득.
“드디어 끝났다.”
여기저기서 그런 환호성이 터져 나오며 학생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배수현이 내 쪽으로 걸어오더니 말했다.
“오늘 수업은 이걸로 끝이야. 대개 하루에 2번 수업을 들어. 가끔은 3번일 때도 있지만. 오늘은 책을 읽는 수업뿐이라 힘들었지?”
“알려줘서 고마워. 참 네가 없었으면 곤란할 뻔했다.”
나는 그런 배수현 앞에서 두 소매를 모아 예를 갖추며 말했다.
배수현이 처음부터 나에게 베풀어준 호의가 아니었으면 오늘 학관에서의 첫날을 뚫고 나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나는 배수현에게 감사를 표하면서도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대체 왜 나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일까? 무슨 의도가 있을까?’
쉬는 시간에는 한번 수싸움 계산을 틀리는 바람에 큰 곤경에 처할 뻔했다. 그런 만큼 나는 배수현의 호의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만 이번에는 내가 가진 현대 지식과 연관 지어서 해답을 알아낼 수 있었다.
‘역사서를 보면 정윤인 왕무도 자기가 곤란한 처지인 것을 알아서 살아보겠다고 열심히 군부의 장수들과 가깝게 지냈지. 배현경도 왕무와 상당히 친했을 거야. 그러니 배현경의 딸인 배수현도 나에게 호감을 갖는 거지.’
나야 정윤 왕무와 어찌 됐든 혼약을 맺은 사이니 정윤의 사람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그러니 배수현도 나를 은근히 엄호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런 어린 소녀를 두고 정치적 계산을 하는 게 지나친 일일 수 있었다.
‘하지만 배수현이 꼭 정치적 계산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더라도 아버지인 배현경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 일상생활에서 배현경이 정윤과 나에 대해 은근히 좋은 말만 해줘도 배수현은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
그러면서 나는 내 눈앞에서 손을 내밀어주는 이 키 큰 소녀를 약간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배수현은 나를 정윤의 사람으로 여기고 호의를 베풀지만 나는 결코 정윤과 함께 안 할 건데.’
미래 역사를 아는 나는 도저히 뻔히 불행이 기다리는 그 길로 갈 수가 없었다. 그러니 배수현이 나에게 살가움을 표하는 것이 양심에 찔렸다.
그런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배수현이 충고를 건넸다.
“이제 수업은 다 끝났고 저녁이 되면 신례를 치를 건데 어서 기다리고 있는 상산 군졸들에게 소식을 전해. 소식이 늦어지면 집에서 걱정하실 거야.”
“알았어. 잠깐 나갔다 올게.”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배수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고 교실 밖을 나섰다.
* * *
상산군졸들에게 오늘 궁에서 밤을 새게 될 거라고 전하고 나서 나는 교실로 다시 들어섰다.
움찔.
그리고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놀랐다. 교실 안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기 때문이다.
‘하긴 이제는 신례를 치러야 하고 내가 주인공이니. 다 여자들뿐이군.’
아마 학관에서 공부는 남녀가 함께하지만 신례는 남녀를 나누어서 치르게 하는 것 같았다.
수많은 소녀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니 알맹이가 남자인 나는 묘한 민망함을 느꼈다.
‘이거 참.’
내가 몸 둘 바를 모르는데 재빨리 배수현이 내 곁으로 다가와 줬다. 그래도 잠깐 안면을 익힌 사람이 곁에 오니 내 마음이 좀 놓였다.
“사실 대개 신례는 학관에서 치르는데 연우 너의 신례는 이례적으로 공주 마마님이 궁에서 치르게 할 거라고 했어. 거기에 신례 내용이 어떤 것인지 우리에게 알려주지도 않으시고. 역시 연우 너도 공주 마마님 입장에서는 남이 아니니까 궁으로 초대한 것 아닐까? 넌 나중에 귀한 몸이 될 거니까.”
배수현의 말을 듣고 나는 즉시 손사래를 쳤다.
“나는 그런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배수현은 은근히 내가 나중에 정윤비가 되기 때문에 궁에서 신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냐고 암시를 하고 있었다.
정윤과 조금이라도 엮이기 싫은 나는 즉각 반응했다. 그런 와중에 교실 안으로 유설란과 황보인혜 두 사람이 들어섰다.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역시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인지 두 사람이 학관의 여학생들의 중심인 것 같긴 했다.
창밖에는 어느덧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이때가 초겨울이었다. 그래서인지 해도 일찍 졌다.
“이제는 적당한 시간이 된 것 같네. 모두 가자.”
유설란이 입을 열자 여학생들이 모두 몸을 일으켰다. 나도 재빨리 일어나 그 사이에 끼었다.
그 모습을 웃으면서 바라보던 유설란이 일행을 이끌고 궁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물론 공주며 유력 호족의 딸들로 이루어진 일행인 만큼 미리 준비된 수레에 올라 궁으로 향했다.
수레들을 수십 명의 군졸들이 호위했다. 유설란과 황보인혜가 부른 왕궁을 시위하는 군사들이었다.
“우와 정말 기대된다. 어떤 신례이기에 이렇게까지.”
배수현이 감탄한 듯 수레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구정을 통과해 궁문 앞까지는 수레를 타고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궁 안에 들어갈 때는 역시나 아무리 호족들의 자제라고 해도 수레에서 내려야 했다.
궁문 앞에서 시위들의 검문을 거친 일행은 유설란과 황보인혜의 뒤를 따라 열심히 걸었다.
‘아놔. 궁을 언덕에다가 지어놔서 이거 은근히 운동이 되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숨을 좀 몰아쉬었다. 어느덧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려의 궁궐인 만큼 여기저기 석등이 있고 불을 밝히고는 있었지만 상당히 어두웠다.
어두워져서 그런지 대나무 손잡이에 달린 등롱을 든 시녀들이 나타나 우리 주위를 밝혀주었다. 유설란이 미리 지시를 내려놓은 모양이었다.
‘등롱 불빛이 오히려 더 좀 으스스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옆에서 걷고 있는 배수현의 손을 꼭 잡고 계속 나아갔다. 그러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아니 대체 무슨 거창한 신례를 치르겠다고 궁까지 사람을 불러서.’
다만 황보인혜 등은 우리들을 궁 안 깊숙이까지 이끌지는 않았다. 궁궐 외곽 쪽 숲이 좀 우거진 쪽으로 일행들을 안내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드디어 다 왔네.”
그리고 황보인혜는 딱 내 쪽을 바라보았다. 나는 주변의 시선을 받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연우 너는 총명하니 폐하의 조부이시자 내 증조부이신 작제건 공의 존함을 들어본 적이 있겠지?”
황보인혜가 입을 열었다.
“당연히 의조 대왕의 위업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습니다. 고려 땅에 사는 신민이라면 모두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작제건은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였다. 당연히 왕건이 고려를 세웠으니 그 조부인 작제건은 당시에 그냥 지방에서 힘 좀 쓰는 호족 1에 불과했다.
그러나 왕건이 왕이 되고 나서 할아버지인 작제건에게 의조라는 묘호를 올린다.
나는 혹여 트집이라도 잡힐까 봐 작제건의 묘호를 사용해가면 공경의 뜻을 표했다.
“그래 작제건 공께서는 젊은 시절 바다에 나서서 여우요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서해용왕을 구하셨어. 그 인연으로 작제건 공께서는 서해용왕의 딸인 용녀 할머님과 결혼하셨어. 용녀 할머님은 혼수로는 버드나무 지팡이와 돼지를 가져오셨어. 그리고 송악에 성을 쌓아 지내셨지. 그래서 나와 우리 고려왕실 사람들의 몸에는 용의 피가 흐르게 됐지.”
황보인혜는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이 유명한 고사를 읊었다. 진심으로 이 사실을 믿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보인혜는 자신이 용의 후손이라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역사적으로 보면 훨씬 후대의 고려왕실 사람들도 다 이 이야기를 진지하게 믿었다.
‘애초에 용왕이며 여우요괴가 등장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데.’
전직 역사학도로서 나는 입이 몹시 간지러웠다.
‘사실 작제건의 이야기를 비롯해서 고려 왕실의 조상 얘기들은 다 여기저기서 따온 이야기를 가져다 붙인건데. 나 참.’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시대에 이런 내 생각을 입 밖에 내면 진짜 목숨이 날아갈 것이다. 나는 바짝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