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문경 부회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때마침 정경수 감찰부장과의 미팅을 끝내고 나타났다. 그는 정경수 감찰부장과 미팅한 내용을 줄여서 보고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민혁이 그놈이 사람을 보냈다고?”
“조성돈 팀장이 직접 정경수 감찰부장을 만난 것 같습니다. 그 자리에서 차세대 이동통신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아니, 차세대 이동통신 정보를 얻은 것은 그 일이 지난 다음이잖아.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수긍하면서도 반박했다.
“아무래도 최용욱 회장님의 방문 이후에 차세대 이동통신에 대해서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그 점을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민혁이 그놈이 수작 부리는 것 아냐?”
“네?”
“아니, 난 미끼 같아서 하는 소리야. 정경수 감찰부장을 도대체 왜 만나? 이미 다 끝난 일이잖아. 오히려 지금 만나면 이상한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잖아. 민혁이 그놈이 그걸 모르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IP 시티폰 사업은 차세대 이동통신과 떼놓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
최문경 부회장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생각하면 할수록 짜증만 났다. 이 두 가지 사업의 비교는 답이 없었다.
지금은 IP 시티폰이 우세다.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사실 그게 더 심각한 문제란 거다.
“하지만 지금 와서 IP 시티폰 사업을 정리할 수는 없잖아? 그걸 누가 인수하겠어?!”
“그건 지금이라도 알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지금이라면 IP 시티폰 사업을 정리할 수 있습니다.”
“지금 누적 적자는 어떻게 하고? 만약 매각한다면 헐값에 내놓아야 하는데, 그 손실은 어떻게 해? 만약 그 일이 일어나면 민혁이 그놈은 고사하고, 영란 그것이 난리를 칠 거야. 아버지는 분노할 거고!!”
“그거야…….”
권재홍 비서실장은 아차 싶었다. 사실 작년이라면 IP 시티폰 사업, 일테면 KD 통신 지분을 다 정리할 수가 있었다.
“아쉽네요. DL 그룹이라면 작년에 KD 통신 지분을 다 인수할 수 있었는데…….”
최문경 부회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지금은 어려워. 지금도 자금 경색 때문에 휘청하잖아. 이번에 또 무리수를 둬서 차임급을 늘렸어. 자칫하다가는 최악의 경우 DL 그룹이…….”
최문경 부회장도 ‘공중 분해될지도 모르지’란 말까지 하지는 못했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었다.
딱히 그가 DL 그룹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실제로 최문경 부회장 동맹의 한 축이 DL 그룹이기 때문이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를 보다가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정경수 감찰부장을 만나서 이야기하다가 문득 느낀 것이 있습니다. 최민혁 실장이 단순히 손을 쓴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쩌면 이번 일도 그렇지 않을까요?”
“……설마 KD 통신이 민혁 그놈이 미끼를 던진 것이라는 말이야?”
“네. 최민혁 실장이 바보가 아닌데, 그렇게 간단히 IP 시티폰을 넘겼을 리가 없습니다. 그 당시에는 외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오히려 계획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최문경 부회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그는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는 솔직히 당시에 자신이 이기고도 불안감을 느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IP 시티폰 사업 매각이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설마 그놈이 당한 척을 했다는 말인가?’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존재했다.
“민혁 그놈이 IP 시티폰이 차세대 이동통신에 밀린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 그놈이 무슨 예언자라도 된다는 소리야?!”
“…….”
권재홍 비서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투자 분야에 한해서만큼은 최민혁 실장이 예언자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렇다면 IP 시티폰 사업의 몰락을 예측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결국 담배를 꺼내서 문 채로 부회장실을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왔다 갔다 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그런데 그 고민은 헛된 것이었다.
결과는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는 때문에 KD 통신 지분 현황을 살피다가 일단 투자자 이탈부터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김현탁 사장에게 연락해서 만나자고 해. 투자 때문이니, DL 그룹 본사에서 만나고 싶다고 전해. 그러면 알아들을 테니까.]
* * *
‘알았나?’
최민혁 실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이 갑자기 왔다 갔다 한다는 보고를 받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가 아는 최문경 부회장이 보일 행동이 아니었다.
김명준 과장이 조심스럽게 지도를 꺼내서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을 일일이 지적했다.
“다른 일과는 달리 DL 그룹 촉과 접촉하는 것이 이전 행보와는 다릅니다. 따로 사전에 약속을 정한 것도 아니고요.”
KM 그룹 부회장이 DL 그룹 인사와 약속을 잡을 수는 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 사업적인 연결 고리가 있어야 한다.
갑자기 찾아가서 만나는 일은 흔치가 않았다.
부회장 비서실에서도 이 일을 잘 몰랐던 것이 더 문제였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급한 일이 있나 보죠.”
“아무리 급해도 부회장님이 이런 행동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부회장님은 사람 아닌가요. 자기 자산 일부가 날아가게 생겼는데, 똥오줌 못 가리죠. 하물며 할아버지에게 찍힌 이 시점에서라면 말이죠.”
“네?”
김명준 과장은 의아한 눈으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뒤늦게 나타난 조성돈 팀장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는 안 그래도 KMBOOK과 관련된 신사업 규모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새로운 사업을 어떤 식으로 풀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은 아예 언급도 안 하고 말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모르는 것이 있다.
지금 진행되는 일.
이건 최민혁 실장이 최문경 부회장, DL 그룹을 노려서 깔아놓은 덫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심지어 샐로먼 브러더스도 같이 엮여 있다. 아니, 실상 그들은 초기와는 달리 투자를 대폭 늘려서 이제는 KD 통신의 어엿한 대주주였다.
‘좀 빨리 발견된 것이 아쉽지만.’
하지만 이제 곧 IMF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상 지금 당장은 뾰족한 수가 없을 터였다.
최민혁 실장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우리 최문경 부회장의 사지 하나를 날려 버려야 해.’
“…일단 지금은 지켜봅시다. 원래 싸움이나 불구경은 즐기는 것도 중요한 법입니다.”
“…네.”
두 사람은 의미심장한 최민혁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그들도 최민혁 실장이 친 거대한 덫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상식적으로 KD 통신을 이용해서 뒤통수를 친다는 건 그 누구도 이해하기 힘든 기괴한 계략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보고받은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을 보면서 웃음을 참느라 고생해야 했다. 차마 두 사람 앞에서 낄낄 웃을 수는 없었다.
‘오늘부터 미리 팝콘을 준비해 둬야겠어.’
* * *
PCS 사업과 관련된 이해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점점 결정이 잘되지 않았다.
당장 오성과 HY 전자가 손을 잡는 것부터가 말이 많았다.
다행히 이 거래는 어느 정도 잘 정리가 되었다.
결국 오성-HY가 손을 잡았고, LC, 대운 그룹 과의 경쟁 구도가 만들어졌다.
비록 통신 장비 제조업에 한하지만, 이 경쟁도 살벌했다.
통신 관련 소프트웨어 부분 역시 데이콤, 금호, 효성이 서로 적당한 선에서 조율한 덕분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문제는 이 사업에 끼지 못한 다른 기업들이다.
DL 그룹이 대표적인 경우다. 다만 이들은 TRS 쪽에 다른 협력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축해서 그럭저럭 대리만족을 누렸다.
KM 그룹도 원래는 이 컨소시엄에 합류하기로 했는데, HY 전자에 사업을 전부 다 매각한 후에 완전히 손을 떼 버렸다.
DL 그룹으로서는 당시 환호했지만 지금 와서는 그 반대였다.
TRS 사업권에 대한 의혹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PCS 사업 역시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초창기라서 그런지 사용자 숫자가 예상한 것만큼 늘지 않았다.
그래도 휴대폰 산업이 어느 정도 매출이 나온다면, PCS 사업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결국 TRS 사업에 대한 미래는 지금 당장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TRS 사업과 비슷한 IP 시티폰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중국의 200만 사용자가 이슈가 나오기는 했지만 실상 밑이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우여곡절 끝에 KD 통신 사장이 된 김현탁은 나름 최선을 다해봤다. 그는 KD 통신의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TRS 산업 자체도 출발이 좋지 않다는 현황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건 아닌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와서 KD 통신 사업은 아닌 것 같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솔직히 KD 통신 사장을 그만두고 싶어서 타이밍만 쟀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었다.
자신을 만나고 싶다.
정확히는 DL 그룹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거다.
김현탁 사장은 당연히 최문경 부회장의 미팅 요청을 거절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자기 입으로 이 KD 통신의 미래를 말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최문경 부회장의 입을 통하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솔직히 난 억울하잖아.’
* * *
김현탁 사장은 오랜만에 DL 그룹 본사 기획실로 가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머릿속에 굴렸다. 그는 솔직히 KD 통신 사장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최민혁 실장의 의도를 의심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런 일인지는 몰랐어.’
솔직히 IP 시티폰 사업의 미래를 자신이 어떻게 예측하나.
TRS 사업이 그 증거였다.
이 사업에 DL 그룹은 막대한 투자를 퍼부었으니 말이다.
김현탁 사장은 DL 그룹 기획실 회의실에 들어가자 막 들어온 최명섭 기획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한데 최명섭 기획실장의 안색이 영 좋지가 않았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의 연락을 받기 전에 고민을 많이 한 눈치였다.
그 증거는 한 가지.
자신의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다.
솔직히 지금 와서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가 최민혁 실장의 위험성에 대해서 최명섭 비서실장에게 그렇게 경고했으니까.
다행이라면 자신의 부친인 DL 화재 김희찬 부사장 역시 자기 탓을 하지 않았다.
김희찬 부사장은 평소에도 안색이 굳어 있었지만, 오늘은 더 심했다.
서류를 준비하는 기획 팀 실무진들 역시 다들 잔뜩 긴장했다.
그들 역시 DL 그룹 내부 상황을 이제는 잘 안다.
그나마 최근 일본 자금을 수혈한 덕분에 한숨을 돌렸다.
김상구 회장조차 이 차입금을 계획한 것과는 달리 일단 킵했다.
만약을 대비한 것이었다.
김현탁 사장은 하늘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면서 일단 침묵했다.
이 분위기는 다행히 막 사무실을 방문한 최문경 부회장이 바꾸었다.
“…여기 사무실 분위기가 왜 이렇습니까? 김현탁 사장은 표정이 왜 그렇고, 김희찬 부사장님은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김희찬 부사장은 다행히 표정을 흩뜨리지 않았다.
“요즘 사업이 잘 안 풀려서 그런 것뿐입니다. 우리 쪽에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한 것으로 압니다만.”
최문경 부회장은 힐끗 자신이 연락하지 않은 이들을 살피다가 김현탁 사장의 얼굴을 보자 그 자리에 앉았다.
“…뭐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사실 KD 통신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좀 있었으니까.”
'KD 통신‘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입을 쿡 다물어 버렸다.
김현탁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고 말이다.
‘일단 오늘은 입 다물자.’
* * *
최문경 부회장 역시 DL 그룹 오너 일가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들이 이미 딴마음을 먹었다고 한다면 자신의 설득 방향은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우려와는 상황이 좀 다른 것 같았다.
DL 그룹 오너 일가의 얼굴엔 마치 한 사람인 것처럼 전부 걱정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