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혁 실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차관님이 왜 이러실까. 다 아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그냥 이 자리는 없던 걸로 할 테니까.”
“…….”
이환채 차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악명에 대해서 잘 안다. 실제로 국세청이 헛짓하다가 개작살이 났으니까.
최민혁 실장이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차관님을 협박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서로 좋은 이야기를 하자는 겁니다. 검찰 상황을 잘 이해합니다. 꼭 죄가 있어야 내사를 하는 것은 아니니까.”
실제로 대검찰청이 죄가 없는 이를 비밀리에 내사하는 때도 있다.
일테면 어떤 형태로든지 신고가 들어오면 그걸 이용하면 된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이미 정부 조직과 이런저런 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인물이다.
따라서 최민혁 실장에 대한 고소 건은 의외로 많았다.
검찰은 물론 이 고소 건의 혐의가 명확해야 수사를 할 수 있다.
그러니 그 과정에서 사전에 최민혁 실장을 내사할 수도 있었다.
다만 이 정보를 외부에는 절대로 알리지 않았다.
민간인 사찰이라는 미묘한 문제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윗선에서 최민혁 실장에 관한 조사를 진행하게 했다.
심지어 국회 쪽 인사도 있었고 말이다.
아니, 심지어 대기업을 통한 압력도 있었다.
검찰 내의 대기업 장학생은 어쩔 수 없이 최민혁 실장을 내사해야 했다.
최민혁 실장은 굳이 이런 세세한 부분을 가지고 이환채 차관을 괴롭힐 생각은 없었다.
“좋습니다. 자잘한 이야기는 넘어가죠. 대충 이해할 것 같으니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이미 어느 정도 보고는 받았겠지만, 차세대 이동통신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네, 3G망 맞습니다.”
“…통신 기술이라면 정부 측에도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아, 물론 최민혁 실장님 탓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부 인허가 문제를 비롯한 행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압니다. 원래는 그래야 했는데, 프로젝트가 예상한 것보다 더 빨리 진전되어서 계획이 바뀌었습니다.”
이환채 차관은 단순히 프로젝트 일정이 바뀌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물론 최민혁에게 그런 질문을 할 수는 없었다.
‘에플 지분 매각 이슈 때문일까?’
그러면 말이 된다.
다만 황당한 것은 차세대 이동통신 관련 일정을 최민혁 실장이 마음대로 조작했다는 거다.
이 말은 이미 사전에 준비가 돼 있었다는 말이다.
‘그게 가능해?’
이환채 차관은 너무 황당해서 머리를 아무리 굴려도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걸었다.
* * *
이환채 차관은 성환수 보좌관과 같이 최민혁 실장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별장을 나와서 나 있는 소로 길로.
최민혁 실장은 갑자기 침묵했다.
무거운 분위기였다.
이환채 차관은 마른침을 삼킨 채 최민혁 실장의 뒤를 졸졸 따랐다. 그로서는 기분 나쁜 일이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환채 차관의 모습을 확인했다.
‘좋네.’
만약 재정 경제원 차관이라고 갑질을 부렸다면 그냥 쫓아버렸을 것이다.
차세대 이동통신 사업은 정부 도움이 없다면, 불편하다.
하지만 굳이 정부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여차하면 미국 정부 쪽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
아마 미국 정부는 쾌재를 부를 것이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이야기할 환경이 되었다고 확신했다.
“…지금 프로젝트 단계는 테스트 플랫폼이 이미 완료가 된 터라 필요한 원천기술 쪽을 파는 중입니다.”
“저, 정말입니까? 그, 그러면 ETRI에서 진행하는 연구가 사실이었다는 말입니까?! 하, 하지만 그게 말이 됩니까? 차세대 기술 표준은 아직 ITU에서 이제 막 시작한 단계인데…….”
최민혁 실장은 씩 웃었다.
“보편적인 인류 복지를 위해서 차세대 통신 기술을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우리 쪽에서 이미 고안한 기술 표준 수십 가지는 ITU 측에서 긍정적으로 검토 중입니다.”
이환채 차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아무리 최민혁 실장님이라도 그런 결정을 독단적으로…….”
“뭐, 인정합니다. 재정 경제원 입장도 있으니까. 솔직히 섭섭할 수도 있죠. 국내 기술인데, ITU 측에 좋은 일만 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 기술은 한국 정부가 독점할 수가 없습니다. 설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그거야…….”
이환채 차관은 한숨을 내쉬면서 다시 자리에 앉고 말았다. 그가 이 자리에서 최민혁 실장에게 정보를 듣기 전에는 꿈에서나 볼 법한 기술이었다.
실제로 그 일을 처리한 사람은 최민혁 실장이고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지금 최민혁 실장과 있었던 과거 일 따위는 다 잊었다. 차세대 이동통신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가 없었다.
사실 그 기술 하나만을 특별법과 연동시키면, 이번 과학기술혁신 특별법은 초대박을 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최민혁 실장은 그제야 씩 웃었다. 그는 이환채 차관의 머리에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말했다.
“한국 정부에도 차세대 이동통신 파이를 일부 넘기겠습니다.”
“저, 정말입니까?”
최민혁 실장이 손을 들었다.
“아,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보셔야죠. 늘 그렇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몇 가지 조건을 들어주셔야겠습니다.”
“…조건이라면.”
“일단 검찰에서 진행하는 저에 대한 내사는 모두 종결 처리해 주세요.”
“아, 그거야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저랑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검사 몇 분이 있습니다. 특히 그들 중에 한 사람이 박두영 부장 검사인데, 조금 난처한 처지에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대검의 모 감사부장이란 인간이 없는 죄를 만들어서 괴롭힌다고 하더군요.”
“…네.”
이환채 차관 역시 박두영 부장 검사에 대해서 꽤 보고를 받았다. 최민혁 실장 라인이라는 설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은 씩 웃었다.
“그분이 저와 엮여서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 일도 적당히 처리해 주세요. 이왕이면 박두영 부장검사에게 손을 댄 이도 알아서 처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혹시 대검 모 감찰부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 감찰부장이라고 누군가를 특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외압에 얽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뒷말이 안 나왔으면 합니다. 알아서 잘 처리해 주세요.”
“그 조건이 다입니까?”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일단 당장 생각나는 것이 그렇고, 몇 가지 추가 조건은 좀 더 검토해 보죠. 잘 아시겠지만, 이번 차세대 이동통신 특허는 일본, 유럽, 미국이 다 얽혀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이익이 오가는 자리죠.”
“…네.”
“한국이 그 자리에 당당한 멤버로 참석할 일입니다. 재정 경제원 입장에서도 결코 가볍게 볼 일은 아닙니다. 사실 박두영 부장검사 일이 아니었다면 이런 자리는 없었을 겁니다.”
이게 끝이었다.
최민혁 실장은 감히 재정 경제원 차관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
이환채 차관은 최민혁 실장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그제야 차세대 이동통신에 이미 미국 정부가 숟가락을 올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오가는 천문학적인 이익도 말이다.
이환채 차관은 뒤늦게야 클린턴의 재선 레이스 때문에 미국이 시끄럽다는 것을 떠올렸다. 재선 레이스에서 나온 흥미로운 공약은 차세대 이동통신에 관한 것이었다.
‘버몬 연방 검사가 사임한 이유가 이거였구나.’
그리고 그건 자신이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 * *
지역 경제의 위기설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정부가 최선을 다해서 손을 써도 쉽게 감추어지지 않았다.
수출 상황이 더 나빠진 것도 문제였다.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온 오성 전자의 반도체 매출이 휘청한 여파 말이다.
이 여파는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지속적으로 한국 경제를 멍들게 했다.
재정 경제원은 언론을 압박해서 최대한 이 위기 뉴스가 나오지 않도록 제동을 걸었다.
거기에 국면 전환을 위해서 특별법까지 제정했다.
과학기술혁신 5개년 계획은 특별법까지 만들어서 추진하는 정부의 중요한 프로젝트였다. 다만 이 안에 대해서는 우려가 더 컸다.
이환채 차관 역시 그런 점을 잘 알았다. 그는 때문에 최민혁 실장을 만나고 온 후에 성환수 보좌관을 포함해 이십여 명을 ETRI로 보냈다.
다행히 이런 노력이 통했다.
성환수 보좌관은 이전보다는 더 구체적인 자료를 가지고 복귀했다.
“…이거 정말이야?”
“크리스 아몬 박사와 마이클 블룸버그 회장이 얼마 전에 ETRI를 방문한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들도 확인한 사안입니다.”
“그렇다면…….”
이환채 차관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즉시 김웅배 장관에게 이 사안을 보고했다.
당연히 청와대는 난리가 났다.
정부가 분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ETRI 같은 정부 정책 연구소가 독단적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중요한 안건을 정부에는 보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일의 주인공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알자 다들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나온 이야기는 검찰의 최민혁 실장 내사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대검이나 중앙지검은 아직 최민혁 실장에 대해 수사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알아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혐의도 없었고 말이다.
더욱이 중앙지검장은 아예 배를 째라 하는 중이었다.
검찰총장의 반응은 더 보수적이었다.
그제야 아차 싶었다.
최민혁 실장이 이 사실을 알아선 안 되는데, 알아 버렸으니 문제였다.
더욱이 차세대 이동통신이라는 초 먹거리가 눈앞에 놓여 있으니.
그냥 숟가락만 올리면 될 일을 이제는 그 숟가락마저도 빼앗기게 생겼다.
[정부는 향후 미래 정보 통신 사업 인프라를 위해서 차세대 이동 통신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런 말 말이다.
그리고 차세대 이동 통신 테스트 사진 하나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최근 추락하는 정부 지지율이 반등할 것은 분명했다.
다만 한국 정부도 최민혁 실장을 불러 문초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국 국무부 쪽에 연락해 봤다.
정확히는 제일 밑 인맥을 통해서 슬쩍 떠본 것이었다.
결과는 맞다였다.
아니,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들은 한국 정부가 연락해 올 것을 예상한 것처럼 말했다.
[아마 클린턴 캠프에서 이번 선거 공약 중의 하나로 차세대 이동통신을 내세울 겁니다.]
이건 한국 정부에 대한 경고였다.
최민혁 실장이 차린 밥상에 숟가락을 올린 사람 중의 하나가 자신이라고. 그러니 최민혁 실장을 건드리지 말라는 주의였다.
사실 이번 클린턴의 재선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이 공약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를 수가 없었다.
결국 한국 정부의 반응은 아주 간단했다.
[최민혁 실장이 원하는 것을 어지간하면 모두 다 들어주게.]
* * *
정경수 대검 감찰부장은 최근 최민혁 실장의 일과 관련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가 지금 감사하는 박두영 부장검사가 그 일의 연장선이었다.
만약 박두영 부장검사의 혐의를 특정한다면 이를 명분으로 최민혁 실장을 소환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이 청와대에서 인정받을 수도 있었다.
‘15조라니.’
물론 이 천문학적인 자금을 최민혁 실장에게 압수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일부라면.
자신이 먹지 않아도 상관이 없었다.
그 윗선이 먹어도 말이다.
‘검찰총장도 꿈이 아냐!’
정경수 대검 감찰부장은 상상의 나래를 폈다. 그는 최근 버몬 연방 검사 사임 뉴스를 듣기는 했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미국 연방 검사는 그다지 힘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탐욕 때문에 신경을 쓸 수가 없었다.
곧 대검에 나타날 박두영 부장검사를 어떻게 요리할까? 그 계획만 구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대검 감찰부장 사무실에 나타났다.
박두영 부장검사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성환수 보좌관이었다. 그는 사무실 눈치를 보면서 슬쩍 자신의 신분을 밝혔고, 잠깐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