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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불황의 근원은 무역 수지 적자입니다. 그리고 적자의 근본적인 문제는 반도체 가격 하락입니다. 작년에 16M DRAM 가격이 50달러 선이었는데, 지금은 15달러 선까지 떨어졌습니다.”
“생각보다 폭락이 심하군요.”
제임스 러너가 슬쩍 끼어들었다.
“손익 분기점이 1M DRAM당 1달러 정도이니, 팔수록 손해인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믿을 수가 없군요.”
“오성 전자도 난리입니다. 축제 행사는 모두 취소했고, 원가 절감에 착수했으니까요. 이미 내부적으로 구조조정 이야기가 나오는 중입니다.”
“그건 뜻밖이군요. 가만, 혹시 최민혁 실장이 그런 점까지 악용하는 겁니까?”
제임스 러너 이사는 그제야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을 계속 미룬 것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심지어 콜린스 사업부 투자를 늘리지 않은 것도 말입니다.”
“콜린스 사업부라……. 아무래도 이번 일은 좀 더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본사 측에 연락해서 이 사안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나서 이야기하죠.”
“…네.”
* * *
샐로먼 브러더스 본사는 갑작스러운 데릭 모건 이사의 지시에도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 대상이 최민혁 실장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존에 조사했던 내용을 토대로 살만 붙이면 될 일이었다.
그중에 핵심은 역시 콜린스 사업부였다.
이미 오성 전자가 이 사업체를 인수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이후 오성 전자의 매출 현황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오성 전자에 대한 투자 방향을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오성 전자에게는 최상의 인수합병 거래였다.
다만 KM 전자로서는 핵심 사업 하나를 포기한다는 안 좋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KM 전자 내에서 진행하는 연구 성과 때문에 그렇게 보기에도 어려웠다.
KM 전자는 자사 외국계 계열사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면서 새로운 기술 확보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다만 샐로먼 브러더스도 그 기술이 뭔지는 알지 못했다.
실상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이런 기술보다는 이 콜린스 사업부 부분에 대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콜린스 사업부는 당장 콜린스를 찍어내기만 하면 팔 곳이 넘쳐났다.
그런데 굳이 그러지 않았다.
생산 기반 시설도 늘리지 않았다.
그나마 늘리는 공장은 주로 태국, 베트남 쪽이었다.
그것도 이쪽 정부에서 특혜를 많이 줄 때 이야기였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을 비롯한 이익은 더 얻고 말이다.
데릭 모건 이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본사 분석 자료를 수십 차례나 읽고 나서 다시 한국 지사 인원들을 호출했다.
“사실 최민혁 실장이 콜린스 사업에 무리수를 뒀다면 그걸 최대한 과녁으로 삼았을 겁니다. 콜린스 사업부를 인질로 잡는다면 최민혁 실장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을 테니까.”
“당시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성 전자의 메모리 가격 하락 때문에 또 다른 대안이 필요하니까요. 콜린스 사업부가 있다면 4~5년 정도는 반도체로 인한 손실을 메꾸고도 남습니다.”
물론 6년 이후에는 상황이 좀 달라진다.
LCD-TV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LCD 목줄을 쥔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란 점이죠.”
“…네.”
제임스 러너 이사도 이 부분에서는 더 언급하지 못했다.
그다음은 어디까지나 추론에 불과했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가 슬쩍 반박했다.
“하지만 반도체 수출 물량 자체는 작년과 비교하면 여전히 꾸준하게 늘고 있습니다.”
제임스 러너 이사가 피식 웃었다.
“문제는 반도체가 다가 아닙니다. 섬유, 철강, 석유 화학 역시 상황이 안 좋습니다. 그나마 자동차가 좀 상황이 낫기는 하지만 그것도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냉랭한 반응이었다.
제임스 러너 이사 역시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하자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계속 공격했다.
그리고 그건 통했고 말이다.
데릭 모건 이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아니기는 하다. 이런 위기 상황에 대한 보고서는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보고서와 현실은 좀 다르다.
한국 경제가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아니, 꼭 그렇지도 않았다.
‘보험은 늘 있으니까. 가만, 이러면 이야기가 많이 다르잖아.’
한국 경제가 침체 늪에 들어간다고 해도 아직 이익을 뽑아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역시 문제가 남아 있었다.
최민혁 실장.
그가 중간에 무슨 수작을 부리느냐에 따라서 나올 수 있는 경우의 수는 너무 많았다.
‘지 꼴리는 대로 자금을 휘두르니.’
“하면 최동영 상무의 계획은 오히려 포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군요.”
“…네.”
데니스 샐로먼 이사도 수긍했고, 제임스 러너 이사 역시 다르지 않았다.
데릭 모건 이사는 새삼 입맛을 다셨다.
“원래 계획대로 되었다면, 이미 KM 그룹 경영권을 손에 넣어서 다음 순서로 넘어갈 수 있었을 테니. 하, 이것 참.”
제임스 러너 이사도 탄식했다.
“최민혁 실장만 아니었다면 상황이 이 모양이 되지 않았을…….”
하지만 그는 따가운 데니스 샐로먼 이사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최민혁 실장의 위험성을 몇 번이나 강조했던 사람이 데니스 샐로먼 이사였다.
당시에는 무시했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최민혁 실장의 위험성을 계속해서 강조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었다.
데릭 모건 이사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데니스 이사의 생각에는 앞으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글쎄요.”
그라고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컨턴전시 계획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애초에 KM 그룹에 차입금을 들이밀고 난 다음이었다.
지금 KM 그룹은 현금이 넘쳐난다.
사실 KM 건설의 최동영 상무가 경영권 승계 문제로 고민하는 게 아니었다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었다.
다만 그도 데릭 모건 이사의 능력을 잘 알았다.
“차라리 이건 어떨까요? 재정 경제원을 이용해서 최용욱 회장을 유혹하는 거 말입니다. 환율 문제를 이용한다면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이들은 최민혁 실장을 좋아하지도 않으니까요.”
데릭 모건 이사는 눈살부터 찌푸렸다.
“한국 내로 달러를 추가로 들여오자는 이야기입니까?”
“네. 현재 한국은 무역 수지 적자로 고민이 많을 테니, 투자를 환영할 겁니다.”
“나도 그걸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의 행보 때문에 망설여져요. 최민혁 실장은 이상할 정도로 한국 내로 달러를 들여오지 않으려고 하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건 정말 이상하군요.”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지금 와서 보는 최민혁 실장에게는 이상한 구석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콜린스 사업부는 매각한다고 계속 나발만 불었다.
그 때문에 요즘은 믿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데니스 샐로먼 이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최근 에플 지분을 팔아서 천문학적인 현금을 들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그 자금 일부만 한국으로 들여와도 지금 국제 무역 수지에 꽤 좋은 영향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
데릭 모건 이사는 혀를 찼다.
“최근 재정 경제원 쪽 인사를 만나서 들은 하소연이 그 부분이었어요. 최민혁 실장 탓을 하는데, 정작 그러면서 우리 쪽에 푸념을 털어놓으니까.”
“…….”
두 사람 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말았다. 최민혁 실장의 행동은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일단 제가 재정 경제원 측 인사를 만나서 한번 이야기는 해보겠습니다.”
“…네.”
* * *
최근 최민혁 실장 주변을 둘러싸고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큰 변화는 정보 조직이다.
김명준 과장이 경호 인력을 추가하면서 따로 정보 팀을 신설했다.
이 조직은 과거 국정원이나 기무사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조직의 감시 능력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감시 대상은 따로 추가 인원을 배당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였다.
샐로먼 브러더스 한국 지사는 평소와는 달리 부산하게 움직였다.
심지어 본사 측에도 연락하고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이 샐로먼 브러더스의 부산한 움직임에 대한 보고를 받고는 피식 웃었다.
“참 빠르네요. 최영란 본부장을 불러서 이사회를 연 지가 불과 며칠 되지 않았는데, 이렇게 기민하게 움직이다니.”
김명준 과장도 순순히 인정했다.
“아무래도 이전부터 최민혁 실장에 대한 공작을 계속하다가 최동영 상무 일로 방향성을 잡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문제가 생기니, 더 반발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누적된 공작이 불을 뿜었다는 말이군요.”
“네. 이번 일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이전처럼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라 최민혁 실장님을 대놓고 노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을 테니까.”
“네?”
그는 김명준 과장이 화들짝 놀라자 뒤늦게 사무실에 들어온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조성돈 팀장은 그렇게 놀라지 않았다. 그 역시 머리가 복잡했다.
“한국 무역 수지 적자 때문이겠군요.”
“맞아요.”
최민혁 실장은 감탄했다. 조성돈 팀장은 확실히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굳이 지적하지 않아도 아니까.
조성돈 팀장은 푸념을 털어놓았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저도 바보는 아니니까.”
“흠, 그렇습니까?”
“…네.”
다만 그도 게슴츠레한 최민혁 실장의 시선을 의식하자 꼬리를 말았다. 따지고 보면 그 역시 최민혁 실장 옆에 있기에 감을 잡을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는 어려웠다.
최민혁 실장은 굳이 그런 점까지 구체적으로 타박하지는 않았다.
“하긴 이제 승부수를 던질 시점이 왔죠. 사실 이번 기회를 잘만 이용한다면 샐로먼 브러더스를 망하게 하기는 힘들어도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샐로먼 브러더스 덩치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반대급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1년 전이라면 그렇죠. 그런데 지금은 방향을 바꾸기 힘들 겁니다. 최동영 상무가 굳이 칼을 꺼내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니까.”
“확실히 그런 점도 있습니다.”
그는 힐끗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김 과장님, 들으셨죠? 지금부터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세요. 필요하다면 도청해도 좋습니다. 최대한 정보를 뽑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특히 무리수를 둬서라도 최대한 인맥을 이용할 테니, 그들 동선을 살피세요. 우리 쪽을 배반할 이들도 나올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최민혁 실장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데릭 모건 이사는 곧바로 재정 경제원의 이환채 차관을 은밀한 곳에서 만났다.
그런데 이환채 차관의 표정이 좋지가 않았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몇 주 동안에 일어난 일시적인 환율 폭등 때문이었다.
단숨에 20% 가까이 폭등한 환율은 상한선이 없는 것처럼 움직였다.
다행히 일시적인 환율 폭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주춤하나 싶은 환율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하지만 재정 경제원 내부에서는 내년에는 원화 환율이 850원을 넘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재정 경제원에게는 날벼락이었다.
안 그래도 ‘국가 부도설’과 관련된 시나리오와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환율 스트레스 테스트까지 진행한바.
재정 경제원은 이 문제 때문에 10대 대기업 회장과 만나서 긴급 간담회까지 했다.
이환채 차관은 대기업 회장을 만나서 허리를 숙여야만 했다.
그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가 데릭 모건 이사의 만남 요청에 쪼르르 달려온 이유였다.
“…괜찮습니까?”
“아, 네, 요즘 정신이 없습니다.”
그는 자신 앞에 놓인 술잔을 자기 손으로 따라서 단숨에 마셨다.
한 잔 더.
그리고 한 잔 더.
그제야 좀 정신을 차렸다.
그는 따가운 데릭 모건 이사의 시선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환율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습니다. 앞으로 이사님의 도움이 많이 필요합니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원하는 것은 가능하면 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네? 그게 가능합니까?”
“평소라면 좀 힘듭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그렇지가 못해요. 비상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