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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88화 (988/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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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KM DVR 연방 정부 납품은 민혁이 덕분이란 소리구나. 하긴 그게 당연한 건가.’

* * *

최영란 본부장은 파르빈 라미네즈 팀장 소개로 미 국무부 내의 수십 명의 실무진을 만날 수 있었다. 향후 업무 협조 때문이다.

그녀는 그 과정에서 IMF에 관한 이야기도 은근슬쩍 듣고 확인까지 했다.

‘하, 민혁이 너 진짜 대단하구나.’

설마 미 국무부를 이용해서 IMF 내부 인력에 손을 댈지는 상상도 못 했다.

그녀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녁에 조성돈 팀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최민혁 실장의 요청과 지금 국내에서 벌어지는 일도 이를 통해 전해 들었고 말이다.

최영란 본부장은 다음 날 오전에 바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다만 미국 공항에서 꽤 흥미로운 대접을 받았다.

미국인조차 철저하게 체크를 받는데, 최영란 본부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자기 신분증을 내민 그 순간부터 특별 대접을 받았다.

마치 대사관 직원처럼 말이다.

줄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검사도 받지 않았고 말이다.

그녀는 공항 경비 안내를 받아서 쭉 걷기만 하면 되었다.

최영란 본부장은 미국 공항의 접대에 그저 웃음을 참을 뿐이었다.

그녀는 비행기 안에서 사전에 조사한 내용을 꼼꼼히 살피다가 최민혁이 왜 자신을 호출했는지 알 수 있었다.

‘최동영 상무를 상대하란 소리일까?’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자신이나 최민혁이나 최동영 상무를 상대한다면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은 그녀보다 더 안 좋았다.

경영권 승계 레이스에서 가장 먼저 나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하자 시차 때문에 피곤했지만 참았다.

처음에는 최민혁 실장을 먼저 찾아갈까 하다가 마음을 바꾸었다.

우선 최동영 상무의 위치부터 파악했다.

그녀 보좌관 이야기는 황당했다.

“지금은 KM DVR 공장을 살피는 중입니다.”

“…아니, 그긴 왜요?”

“신사업의 롤모델이라서 살피는 중이라고 했습니다. 장승일 실장님을 통해서 이미 검토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은 할아버지가 승낙했다는 말인가요?”

“…네.”

“아무리 그래도 자기 앞마당은 아니지 않나요?”

“그런 이야기가 있기는 했지만, 회장님이 지시한 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에게 로비했나 보군요.”

최영란 본부장은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녀는 최민혁 실장이 왜 굳이 바쁜 자신을 한국으로 돌아오라고 한 것인지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굳이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해서 묻지는 않았다.

이런 일은 차라리 서로 알아서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다.

그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잠깐 본사로 와.]

* * *

KM 전자는 사내 복지에 생각보다는 많은 자금을 퍼부었다.

초호화 요트는 시작에 불과했다.

따라서 소소한 복지 차원에서 진행하는 일이 끊이질 않았다.

그중에 하나가 실내 수영장이었다.

KM 건물 본사 지하에는 따로 수영장까지 갖춘 것이었다.

이 수영장은 대중 수영장과는 달리 수질 관리에 자금이 많이 들어갔다.

늘 깨끗한 수질이 유지되고, 주기적으로 관리가 된다.

그 수영장에서 물개처럼 유연하게 수영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는 관리가 철저히 된 멋진 몸매를 과시하면서 수영장 밖으로 나섰다.

비서가 후다닥 달려와서 수영 가운을 준비했고 말이다.

포도주 한 잔은 덤이었다.

“…….”

최영란 본부장은 마치 영화 속의 보스 같은 최민혁 실장의 행동을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완벽히 ‘왕’ 자가 새겨진 복부 근육은 전문 헬스트레이너 못지않았다.

부담스럽지 않지만 탄탄한 상체 근육 역시 잘 관리가 된 것이었다.

적어도 일 년 이상 관리해야 나올 만한 몸매였다.

최영란 본부장은 휘파람을 불었다.

“……너, 내가 아는 최민혁 맞아?”

최민혁은 포도주 한 잔을 받아 그녀에게 내밀면서 손짓했다.

그의 옆에 준비해 둔 의자였다.

“내가 다른 사람 같아?”

“어, 얼마 전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하려다가 못 했어. 겉은 내가 아는 민혁이 맞지만 속은 전혀 다른 사람 같았으니까. 차라리 빙의물의 주인공이라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어.”

최영란 본부장은 포도주를 단숨에 마셨다. 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알지. 하지만 너무 이상해서 그래. 나에게 한 일도 그러니까. 지금 일도 마찬가지야. 미 국무부를 방문하다니. 그건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한 일이야.”

“그건 누나 역량이지.”

“아니, 그쪽 이야기로는 민혁 너 때문이라고 했으니까. 날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민혁 너 때문에 그렇게 한 거야.”

“그래?”

“네 능력은 솔직히 지금도 잘 이해가 안 가.”

“나름 노력했다고 생각해.”

“그게 노력으로 된다고? 난 요즘 2시간만 자고, 죽어라 노력하는데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민혁이 네 능력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돼.”

최영란 본부장의 입은 한번 물꼬가 터지자 폭포수처럼 속에 든 말을 토해냈다.

이제까지 쌓아 놓은 의문점들을 말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은 말이 없었다.

그제야 결국 최영란 본부장은 지쳤는지 푸념을 털어놓았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 거야?”

“아니,. 터질 것 같아서.”

최민혁은 잠깐 머뭇거렸다. 최영란 본부장에게 지시하기 앞서서 한 가지를 말해줘야 했다. 개정 X리포트는 개념적인 부분이 많은 탓에, 직접 현실에서 써먹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는 그 부분을 보완해 줄 생각이었다.

“수출이 안 좋은 것은 알지?”

최영란 본부장은 탄식하고 말았다.

“알지. 그놈의 반도체 가격 하락이 문제잖아. 그것 때문에 환율이 결딴났으니까. 우리 쪽은 아주 죽겠다니까. 하루하루가 전쟁이니까.”

실제로 전자, 자동차, 철강 영역도 부진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런데 이들 부진의 보스 격이 반도체 산업이었다.

특히 반도체 하락.

반도체 가격이 내려가니,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전반적인 다른 산업 기반 역시 수익이 박살이 났다.

KM 센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최민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다고 KM 전자가 여기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니까.’

매출 규모 자체보다는 수익성 규모로 경영하기 때문이다.

차라리 오성 전자가 콜린스 사업부를 경영했다면 국제 수지 부분에서는 훨씬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오성 전자가 요즘 와서 최민혁의 눈치를 더 보는 이유였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미인계라는 무리수를 두는 이유였고 말이다.

‘권태성 실장을 빨리 만나서 보상을 받아야 하는데.’

최영란 본부장은 최민혁 실장을 타박했다.

“나도 미국 가서 안 사실인데, 미국 PC 업계 불황이 문제야. 재고 소진을 무리하게 해야 하는 터라 반도체 칩 수요가 대폭 줄었어.”

“그래?”

“어, 그래서 에플 차세대 제품도 걱정이야. 과연 이 불황기에 좋은 성과를 낼지 말이야.”

실제로 미국 월가를 중심으로 최근 에플에 대한 부정적인 리포트가 늘어났다.

이런 분위기에 불을 지른 이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런가?”

“어, 미 국무부 내에서도 이제 말들이 많아. 너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소리도 해. 심지어 미국 경제 테러범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도 있고.”

“하.”

최민혁 실장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에플 지분 12%를 팔아치운 여파가 생각보다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잔뜩 뿔난 최영란 본부장을 보다가 결국 다시 가운을 벗고 수영장에 멋지게 입수했다.

사방으로 튄 물에 최영란 본부장이 버럭 소리쳤다.

“야!!!”

* * *

최민혁 실장은 다시 몇 차례 수영장을 완주했다. 그는 방방 날뛰는 최영란 본부장을 무시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성을 차릴 것으로 생각했다.

그 역시 수영을 하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최영란 본부장의 충고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긴.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동영 상무 일은 지엽적인 문제만은 아니니까.'

그 역시 정신을 차리자 다시 수영장에서 나와서 최영란 본부장을 쳐다보았다.

최영란 본부장의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녀도 뒤늦게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에플 지분을 꼭 팔아야 했어? 지금도 난리지만 앞으로가 더 큰 문제야. 여기에 엔저 현상도 설상가상이야. 가격 경쟁력이 가파르게 추락하니까. 우리야 압도적인 기술 우위로 영향이 제한적이지만 불안한 것은 사실이야.”

“좋네.”

“뭐가?”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가 원래 하려는 말이 있었지만,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최영란 본부장이 하는 고민이면 충분했다.

“하면 지금 우리 무역 수지 적자가 올 연말까지 계속된다는 것은 알겠어? 수출도, 국내 경기도 나빠지는 것을 말이야?”

“그렇지.”

“하면 우리 최동영 상무가 이동통신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뭐? 미친 것 아냐?!”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가서 이야기를 좀 해줘. 정 안 되면 우리 할아버지에게 가서 말해도 좋고. 하고 싶은 대로 해. 내가 팍팍 밀어줄 테니까.”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야. 이번 기회에 누나도 한번 자신의 판단력을 내 보여야지. 그 일이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반응은 나쁘지 않을 거야.”

“으음, 알았어.”

최영란 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자신에게 내미는 문건을 받아서 슬쩍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최민혁 실장이 뭘 원하는지 안 것이었다.

“날 행동 대장으로 써먹으려는 거야?”

“내가 지금까지 해준 것에 대한 요구야.”

“…알았어.”

최영란 본부장은 딱히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이 일은 나쁘지 않았다. 그건 미 국무부에 가서 직접 경험했다.

비록 호가호위 소리를 들을 만했다. 하지만 전혀 힘이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최민혁은 물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누나를 내 사람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을까? 이럴 때 정말 조커야.’

* * *

최영란 본부장은 최민혁 실장과 헤어진 후에 그가 내 준 문건을 살피면서 감탄했다. 그녀 자신이 한 말은 큰 줄기에 불과했다.

이후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문건을 살피니 가전 3사의 매출 현황과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와 있었다.

특히 수출 환경 부분을 중심으로 말이다.

이게 무역 수지 적자와 결합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도 있었다.

일테면 저축 은행과 같은 부분이다.

단기로 들어온 엔화의 위험성에 대한 것도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DL 그룹은 지난주에도 이 일본 자금을 받았으니.’

최영란 본부장은 점점 굳은 얼굴로 보고서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현 상황이 개정 X리포트의 ‘파트1’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고는 혀를 차면서 자신의 비서에게 바로 질문했다.

“우리 최동영 상무님 오늘 일정은 어떻게 돼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몇 곳에 전화를 걸었다. 답은 오래지 않아서 금방 나왔다.

“최문경 부회장님을 만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쪽에 연락해요.”

최영란 본부장은 지시하고 나서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이 자신에게 한 지시를 떠올렸다. 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이제는 알 것 같았다.

‘하긴, 이젠 나도 이사회에서 힘 좀 쓰니까.’

* * *

최동영 상무도 망설이기는 했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최문경 부회장을 만나는 것만은 계속 망설였다.

그런데 그도 KM 센서를 돌아보고 나서는 한계를 느꼈다.

이대로는 곤란했다.

그는 결국 망설이다가 최문경 부회장을 직접 찾아갔다.

장승일 실장도 같이 말이다.

장승일 실장은 굳이 끼고 싶지는 않았지만, 정보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대신 그는 장승이 되기로 했다.

입을 열지 않았다.

최영란 본부장이 부회장실을 방문했을 때가 딱 이 분위기였다.

“와, 세 분이서 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예요? 설마 최민혁 실장 척결을 위해서 손을 잡은 거예요?”

그녀 뒤를 따른 비서는 크게 당황해서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최영란 본부장은 신경도 안 썼다.

“아, 아닙니다.”

장승일 실장은 평소와는 달리 크게 당황한 채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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