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플 공매도 계획은 단순히 일시적인 수급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기간에 에플 주식을 어떻게 활용할지 명확하게 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따라서 에플 주가도 일정한 가격대에 도달해야 했다.
문제는 최민혁 실장이 수작을 부린 덕분에 에플 주가가 150달러를 돌파해 버렸다는 거다.
샐로먼 브러더스가 뒤늦게 손을 쓰려고 했을 때는 이미 에플 주가가 너무 많이 올라 버린 상태였다.
황당한 것은 샐로먼 브러더스 역시 에플 주식을 꽤 매입한 터라 막대한 이익을 봤다는 점이다.
최민혁 실장이 무려 12% 지분을 던진 것이 딱 이 타이밍이었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에플 주식을 받아야 했다.
뭐, 에플 공매도 물량을 고려하면 꼭 손해는 아니었다.
에플 주가가 50달러 이하로 떨어진다면 오히려 초대박이었다.
다만 이 일이 계획대로 될지는 확실치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 푼 에플 주식 때문이다.
이 매물을 받은 세력은 샐로먼 브러더스 하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데릭 모건 이사는 상황이 이렇게 되자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는 자칫하면 천문학적인 손실을 볼 수가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자신이 샐로먼 브러더스에서 놀라운 업적을 쌓았다고 해도 샐로먼 브러더스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굳은 얼굴을 한 채 필사의 각오로 다시 상황을 검토했다. 그가 그러다가 한 가지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다.
‘아, 에플 대주주잖아. 가만, 이걸 잘하면…….’
에플 이사회에 이사 한 명 정도는 밀어 넣어도 될 것 같았다.
평소라면 어려운 일이지만.
지금은 좀 달랐다.
로스 페리마저도 이번엔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가 비록 스티븐의 열렬한 지지자라고 해도 이번 대선에 뛰어들어야 하기에 선거 자금이 필요했다.
에플 지분 매각 기회를 놓친 터라 최민혁 실장에 대한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아니나 다를까 로스 페리 이사를 만나자 성공을 확신했다.
이야기는 생각보다 순조롭게 잘 풀려갔다.
자신이 염두에 둔 마쿨라 이사를 밀어주는 것에 암묵적인 허락을 받았다.
‘좋았어.’
* * *
마쿨라 이사는 원래 가지고 있던 에플 주식 1%를 이전에 다 매각했다. 그는 이때만 해도 에플 주식을 판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서 에플 주가가 어느 덧 150달러에 달하자 에플 주식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에플 주식을 보는 것만으로 그냥 돌아버릴 것 같았다.
때문에 그는 오히려 선 마이크로시스템에 더 집착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제안을 받았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데릭 모건 이사에게서 말이다.
스티븐을 협박하는 일.
자신이 원하던 일이었다.
다만 지금까지 결과는 그렇게 좋지가 않았다.
그는 솔직히 일이 부정적으로 흐르면 자신이 또 팽당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데릭 모건 이사의 입장은 좀 달랐다. 그는 오히려 마쿨라 이사가 자신의 지시에 따르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마음을 달리 먹었다.
“마쿨라 이사님, 잘 아시겠지만 저는 최민혁 실장을 아주 싫어합니다. 따라서 최민혁 실장의 동반자인 스티븐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마쿨라 이사는 기묘한 눈으로 데릭 모건 이사를 쳐다보았다.
“저랑 공감대가 같다는 말을 하는 겁니까?”
“네. 저는 마쿨라 이사님과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저번 일처럼 또 소모품으로 절 이용하려 하시는 거 같은데요.”
“저번 일도 사정이 있었습니다.”
그는 간단하게 줄여서 최민혁 실장과 자기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대립과 갈등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뿌리 깊은 이력이 있다는 소리다.
마쿨라 이사도 데릭 모건 이사에게서 진심을 읽었다. 정확히는 데릭 모건 이사를 믿는 것이 아니었다. 최민혁 실장과 샐로먼 브러더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이해했다.
그 역시 스티븐에 대한 원한을 잊지 않았다.
스티븐으로서는 배신자를 쳐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의 입장은 달랐다.
그가 보기에 과거 스티븐은 에플에 있어 치명적인 독이었다.
그가 굳이 스티븐의 뒤통수를 친 이유였다.
“…알겠습니다. 뭐 그렇다고 하죠. 그런데 다시 절 찾은 이유가 뭡니까?”
데릭 모건 이사는 다소 누그러진 마쿨라 이사의 행동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에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아뇨. 전 다시 기회를 드리고 싶은 겁니다.”
“허.”
“솔직히 스티븐의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에플로 복귀해서 다시 영향력을 찾을지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습니까? 마쿨라 이사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에플에 있을 때 실수를 좀 했긴 하죠. 하지만 다시 에플로 귀환한다면 얼마든지 부활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사님을 돕겠습니다!”
마쿨라 이사도 착잡한 얼굴이었다. 그 역시 에플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에플 이사회에 합류하기 위해서는 에플 지분이 필요했다.
그런데 지금 에플 주가가 무려 120달러 선에서 왔다 갔다 한다.
자신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아니, 누구라도 마찬가지다.
거품이 잔뜩 낀 에플 지분을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이미 데릭 모건 이사와의 대화를 통해서 감정을 해소한 터라 상대를 무시하지는 못했다.
지금 선 마이크로시스템 이사 자리에 앉은 것도 상대가 도움을 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넌지시 문건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 어? 가만, 설마…….”
그로서는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에플 지분 3% 의결권 위임장이었다.
그것도 자신에게 말이다.
데릭 모건 이사는 씩 웃었다.
“이것 외에 에플 이사회 이사 중에 마쿨라 이사님을 도와줄 분이 있습니다. 이것 역시 마쿨라 이사님을 위한 우리의 선물입니다.”
“…그건 좀 어려울 겁니다. 스티븐이 에플 이사회를 꽉 잡고 있으니까.”
“최민혁 실장의 에플 지분 매각 전에는 그랬죠. 하지만 지금은 좀 상황이 다릅니다. 로스 페리 이사 같은 경우에는 막대한 손실을 본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설마 로스 페리 이사가 저를 밀어준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로스 페리 이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최민혁 실장의 행보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마쿨라 이사는 한동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는 지금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저, 정말 제가 다시 에플 이사회에 합류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네!”
그렇게만 된다면 에플 이사회의 일부 반대가 있어도 마쿨라 이사는 결국 에플 이사회에 다시 돌아갈 것이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뭐죠?”
“에플을 안에서부터 흔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사전 작업을 좀 준비해 주세요. 비공식적으로 자리를 만들어 줄 테니, 지금 당장 일을 좀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마쿨라 이사는 데릭 모건 이사의 제안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지금 있는 선 마이크로시스템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스티븐에 대한 증오를 쉽게 잊을 수가 없었다.
‘스티븐, 반드시 에플에서 내쫓아주마!’
* * *
마쿨라 이사는 에플 이사회 합류 전부터 이미 준비된 자기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데릭 모건 이사와 에플 이사회의 이사 몇 사람의 도움을 얻어서 에플 경영 상황을 살폈다.
그는 아이팟, 아이컴을 살펴보다가 곧 여기에서 손을 뗐다.
관심이 집중된 터라 문제를 발견하기도 쉽지 않았고, 손을 쓰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는 이보다 고질적인 에플 제품의 불량 리스트를 살폈다.
그는 에플에서 쫓겨나기 전에 이게 문제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당시에는 굳이 그 일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중에 이용하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괜찮은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도 마찬가지다.
이걸 잘만 활용하면 스티븐에게 치명타를 줄 수가 있었다.
‘기조연설을 막거나 CES를 없던 것으로 하자는데, 괜찮은 방법 같아.'
마쿨라 이사 입장에서는 의아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일단 스티븐을 끌어내리는 것에만 집착했다.
바로 복수심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이번 불량 명분을 잘만 활용한다면 괜찮은 대안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데릭 모건 이사도 이 정도에 일단 만족은 할 거야.’
다만 이것만으로는 모멘텀이 약했다.
그는 에플 경영 전반을 들여다보았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생산 설비를 절반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제작 비용 자체가 줄어드니, 나쁜 선택은 아니었다.
다만 악의적인 구조조정으로 많은 근로자가 길바닥으로 내쫓겼다.
다른 하나는 생산 제품 숫자를 단순화하는 부분이다.
선택과 집중.
소프트웨어에 좀 더 집중하고, 하드웨어에 대한 투자를 대폭 줄이는 것이다.
소비자가 요구하는 것에만 집중한다는 뜻이다.
에플 제품이 너무 많아서 생기는 문제를 돌파하려는 방법이다.
이에 대한 대응책이 마지막 순번인 인터넷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는 것이다.
실제로 에플 OS인 매킨토시에 변화를 줬다.
스티븐은 이 OS에 집중했다.
그가 CES 전시회를 통해서 아이팟과 아이컴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이보다는 아이팟 OS, 아이컴 OS에 더 자본과 인력을 퍼부었다.
에플 애니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스티븐이 최대한 집중하는 분야였다.
마쿨라 이사는 내심 스티븐의 계획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가 데릭 모건 이사의 도움을 얻어서 다시 이사회에 합류하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는 정보였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이 생겨났다.
스티븐이 갑자기 파워컴 일부에 대해 리콜을 명령한 것이었다.
심지어 언론을 통해서 먼저 파워컴의 문제를 시인해 버렸다.
‘어? 이걸 어떻게 안 거지?’
황당한 일이었다.
그런데 답은 스티븐 본인에게서 직접 들을 수가 있었다.
숨을 헐떡이면서 마쿨라 이사의 사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온 것이었다.
“맙소사 정말 마쿨라 이사 당신이었어?!”
마쿨라 이사는 보고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는 이들에게 손짓하여 사무실에서 내보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상을 굳히고 있는 스티븐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오랜만이네.”
“…도,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무슨 힘이 있어? 대주주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일세.”
“그럴 리가…….”
“자네도 알 텐데? 최민혁 실장이 최근 에플 지분 8%를 매각한 것을? 아, 벌써 10%를 넘어섰나. 아마 그럴 거야.”
물론 그 지분 전부 다를 데릭 모건 이사 쪽에서 흡수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3%가 좀 넘는 물량이었다.
데릭 모건 이사는 그 지분을 활용해서 마쿨라 이사를 다시 에플에 돌려보냈다.
마쿨라 이사는 순순히 그 제안을 받았고 말이다. 그는 히죽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좋았다. 다만 곧 인상을 살짝 구겼다.
계획대로만 흘러갔다면 스티븐에게 한 방 크게 먹였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만 되었다면 이사회를 이용해서 스티븐의 행동에 제동을 걸 수도 있고 말이다.
‘기조연설을 막을 좋은 기회였는데…….’
다만 그로서는 한 가지가 의아했다. 도대체 데릭 모건 이사가 스티븐의 기조연설을 왜 그렇게 막으려고 하는지 말이다.
‘한번 확인은 해봐야겠어.’
“스티븐, 너무 그렇게 날 보지 말게. 난 어디까지나 자본주의 원칙에 충실했을 뿐이니까. 대주주가 내 경영 능력을 인정했잖아.”
이죽거리는 마쿨라 이사의 표정은 마치 지난 일은 다 잊은 것처럼 보였다.
스티븐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하지만 그는 곧 자신이 에플 이사회에 제대로 한 방 맞은 것을 깨달았다. 그로서는 의아한 일이었다.
‘설마 최민혁 실장의 행동에 반감을 품었나?’
그럴 수도 있다.
에플 이사회는 에플에만 충실한 조직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로지 에플을 통한 자기 이익에만 집착하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그들이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반길 리가 없었다.
이번에 재미를 단단히 본 사람은 다름 아닌 최민혁 실장 혼자이니까.
‘하, 어쩌면 배신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어.’
스티븐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당신이 나에게 유감이 있다고 해도 에플에 손해가 될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최민혁 실장은 여전히 20%가 넘는 에플 지분을 가진 대주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