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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플 주가가 폭락한 것은 아니지만, 상승세가 완전히 꺾여 버렸다.
그나마 다우지수가 활황세를 이어가서 손실까지는 보지 않았을 뿐이다.
폴 고슬링은 당황했다. 그도 최민혁 실장이 이제는 멈추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았다.
모건 스탠리 내에 다른 증권 브로커가 자신을 찾아왔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지분 매각을 왜 하는 겁니까?]
[이거 사전에 알고 있었습니까? 그랬다면 미리 알려야 하지 않습니까?]
[미치겠습니다. 도대체 최민혁 실장을 에플 지분 매각을 언제까지 하는 겁니까?]
그랬다.
최민혁 실장의 에플 지분 매각은 마치 주가 하락세에 세력이 줄기차게 파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 주제가 에플 주식이고 말이다.
‘하,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네.’
* * *
폴 고슬링은 최민혁 실장의 묻지 마 에플 지분 매각 정보를 확인해 봤다. 벨린 투자가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서 에플 지분을 매각 중이었다.
장외 매각도 최대한 진행 중이었다.
다만 에플 거품 주가가 발목을 잡았다.
장외 주식 매각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이게 에플 주가 상승세에 제동을 건다는 점이다.
결국 폴 고슬링은 마이클 라이언 이사에게 호출당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
“…확인 중입니다.”
“사전에 몰랐나?”
“이번 일은 갑자기 생긴 일입니다. 또한, 제가 듣기로 최민혁 실장 본인 입으로 큰 사고를 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SEC 쪽에서 알아본 건가?”
“네. 더욱이 이번 일은 에플 주가의 거품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올라도 너무 단기에 많이 올랐습니다. 40달러도 초대박인 주가였는데, 무려 140달러 선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마이크 라이언 이사도 혀를 내둘렀다. 에플 주가의 이상 폭등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다만 그도 투자 경험이 많다. 이런 비이성적인 주가 폭등에는 여러 이권 세력이 끼어 있다는 것을.
‘하긴 우리도 한 역할을 했으니.’
그건 다른 세력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 개인 투자자도 포함해야 하니까.
에플 주식 지분을 둘러싼 세력들의 갈등은 이제 아마겟돈 수준이었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이마를 붙잡았다. 그도 도저히 어떻게 이 상황을 이용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전에 정보를 알았다면 최대한 이용해도 될 일이었다.
“다른 이들은 몰라?”
“네. 제가 아는 대부분의 세력이 당황한 눈치입니다. 심지어 IMF도 움직였고 말입니다.”
“아, 그 IMF는 이유가 좀 달라. 샐로먼 브러더스 측에서 손을 쓴 것 같으니까.”
“네? 아니, 샐로먼 브러더스가 왜 갑자기 나오는 겁니까?”
“걔들 딴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 뭐, 우리가 남의 밥상 걱정할 상황은 아니잖아. 으음, 이렇게 하지. 최민혁 실장에게 한번 연락해 봐. 우리를 무시하지는 않을 테니까. 아, 아니다, 자네가 직접 한국에 가서 최민혁 실장을 만나봐.”
“…알겠습니다.”
* * *
폴 고슬링은 얼떨떨한 얼굴을 한 채 최민혁 실장을 찾아 한국에 도착했다.
그는 최민혁 실장을 만나기 위해서 KM 전자 측에 연락했다.
만남은 그렇게 어렵지가 않았다.
“오, 설마 모건 스탠리 측에서 이렇게 절 먼저 보자고 할 줄은 몰랐습니다.”
“최 실장님이 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최민혁 실장은 자신을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 말입니까? 제가 모건 스탠리에 딱히 피해를 준 적이 없는데…….”
“하아, 에플 지분 매각 말입니다.”
“아항.”
최민혁 실장은 휘파람을 불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주식을 싸고, 매입하는 것까지 제가 모건 스탠리에 통제받을 일은 아닙니다.”
“그 분량이 문제라서요. 그리고 그런 식으로 주야장천 팔면, 에플 주가에 영향을 줍니다.”
“그런 이야기를 귀하께 들을 줄은 몰랐군요. 보통 모건 스탠리가 그런 방식으로 개인 투자자를 괴롭히지 않나요? 자신이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고 싶습니까?”
“…….”
폴 고슬링은 입을 쿡 다물고 말았다. 그는 그제야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에플 투자 세력 전부 말이다.
최민혁 실장은 이전의 그 최민혁 실장이 아니었다.
“제가 설마 모건 스탠리를 날려 버리려고 그런 일을 벌였겠습니까?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투자 계획 변화에 따른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자금 확보 말입니까?”
“그렇죠.”
폴 고슬링은 최민혁 실장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그 투자 출처는…….”
“하하하, 이분이 좀 심하군요. 아니, 세상에 투자처를 말해주는 투자가가 어디 있습니까?”
“…죄송합니다.”
폴 고슬링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다만 그도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최민혁 실장의 행동이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일단 달라진 점이라면.
호탕했다.
거리낌이 없었다.
그냥 지르고 보는 것 같았다.
더욱이 숨기지 않았다.
아예 해볼 테면 해보란 식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게 사실 문제였다.
폴 고슬링은 과거와는 달리 최민혁 실장을 상대하기가 더 어려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아. 아니, 그러면…….’
최민혁 실장과 직접, 간접적으로 엮여 있는 투자 현황을 떠올리고는 마른침을 삼키고 말았다.
“…저도 상황을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건 스탠리도 최민혁 실장과 동맹인 관계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정보는 사전에 알려 주면 좋겠습니다.”
“물론이죠. 다만 그 반대도 적용된다는 것을 아시죠?”
“네?”
최민혁 실장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폴 고슬링을 쳐다보았다.
“일테면 세계 투자 현황 변화 같은 정보 말입니다. 사전에 알려 주면 좋을 것 같네요. 우리는 투자 동맹 아닙니까?”
“…네.”
폴 고슬링은 대답하면서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이 무슨 의도로 저런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앞으로 이런 에플 사태는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물론 한 가지 확인은 필요했다.
“하면 에플 지분은 얼마 정도 더 매각할 생각입니까?”
최민혁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4%.”
“…네.”
폴 고슬링은 혀를 찼다. 이미 에플 지분 정리는 마무리 단계였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최민혁 실장의 투자 성향이 변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 * *
폴 고슬링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서 마이크 라이언 이사에게 면담 내용을 알렸다.
다른 것은 다 예상 안의 일이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갑작스러운 한 가지 요구에 마이크 라이언 이사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떻게 안 거지? 아니, 정말 알기는 아는 걸까?’
세계 투자 현황의 변화.
그 내막은 그도 자세히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그도 이걸로 다시 최민혁 실장에게 말하기는 그랬다.
말하는 순간에 오히려 빌미가 될 수 있으니까.
그저 답답한 상황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은 이미 이런 상황을 예측한 터라 굳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경고로도 충분했다.
‘약간은 제동이 걸리겠지. 그것만으로 IMF 피해를 줄일 수는 있을 거야. 뭐 이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고.’
최민혁 실장은 이보다 마이크 라이언 이사가 움직인 것에 주목했다.
‘IMF 때문이겠지.’
그 역시 IMF 내에 한국인이 제법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이 IMF를 그만두고, 대부분이 미국행을 택한다.
다만 아닌 예도 있다.
한국 내에 다시 돌아오는 일도 있으니까.
굳이 그쪽이 누구인지는 묻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순순히 수긍했다. 지금 이 일은 원래 일어나야 할 일이다. IMF라고 해서 전부 거대 자본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조성돈 팀장을 호출했다.
“이번 일은 그냥 둘 수 없을 것 같아요. 재정 경제원 내에서도 도와준 이들이 있을 거예요. IMF 혼자 그렇게 일을 막 벌일 수는 없어요.”
“…그건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순순히 수긍했다.
사실 그는 정치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대신 관심이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익.
“뭐, 이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에요. 다만 우리도 재정 경제원 내에서, 정확히는 정부 기관 내에서 일어나는 동향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최대한 뽑아 먹을 수 있는 건 뽑아 먹으니까.”
“…네.”
조성돈 팀장은 화들짝 놀라서 최민혁 실장의 눈치를 보다가 답하고 말았다. 그는 설마 최민혁 실장이 이런 위기를 이용하려 할지는 몰랐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최민혁 실장이 이 정도로 막 나가지는 않았다.
‘정말 상상을 초월한 분이구나.’
* * *
재정 경제원도 겉보기와는 달리 내부적으로 말들이 많았다.
특히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친최민혁파와 반최민혁파로 갈렸다.
반최민혁파에 속하는 안병우 차관보는 겉으로 봐서는 평범한 직장인처럼 행동한다. 재정 경제원 내에서도 인망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속내는 좀 달랐다.
이번 IMF의 행보를 물밑에서 지원해 주었으니까.
한국 경제가 처한 상황을 토대로 한 정보 말이다.
다만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있었다.
“반대라니?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성환수 보좌관은 길길이 날뛰는 안병우 차관보의 행동에 눈치를 봤다.
“IMF의 이번 권고는 단순히 권고가 아닙니다. 최대한 그들 요구를 맞춰줘야 합니다. 외화대비 융자비율을 현 70%에서 90% 올리는 건 할 수가 없습니다.”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IMF가 겉으로 권고해도 실제적인 제안은 좀 다릅니다.”
그가 실제로 내놓은 것은 IMF 내에서 휴버트 나이스 아태 담당 국장이 포럼에서 한 이야기였다.
바로 정부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는 거 말이다.
그게 힘들다면 민간 규제를 풀어야 한다고 되어 있었다.
해외 증권 발행 제한을 확대하는 것 역시 포함한다.
지금은 고작 15%.
이걸 20%까지 끌어올리라는 거다.
“하지만 그 일은 어려울 겁니다. 최훈열 전무의 비자금 사태로 촉발된 대기업 비자금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그 비자금 수단 중의 하나가 해외 증권 발행을 통한 자금 세탁입니다!”
“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아니, 불이 무서워서 불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아니, 무슨 비교를 해도 말이 안 됩니다.”
“우리 기업이 외화 대출을 하기 위해서 무리수를 많이 둡니다. 사전 신고가 아니라 사후 신고로 바꾸어야 큰 효과가 있습니다!”
“압니다. 하지만 지금 경제 사정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최민혁 실장의 국가 부도설을 그냥 농담으로…….”
“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합니까? 고작 민간인이 떠든 근거 없는 사실을 믿으라고요?!”
“그게 어느 정도 증거가…….”
“아니, 그 증거 말인데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경제 규모가 어떤데, 고작 외화 몇 푼에 외환 시장이 흔들려요? 그거 다 운이 좋아서 맞힌 것에 지나지 않아요!”
성환수 보좌관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실상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민혁 실장이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해 주면 좋을 텐데, 그렇지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은 정말 중요한 포인트에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없었다.
그로서는 가슴이 답답할 일이다.
더욱이 안병우 차관보는 재정 경제원 차관을 거쳐서 장관을 노리는 야심이 큰 인물이었다.
“…차관님에게 보고하겠습니다.”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겁니다!”
안병우 차관보는 겉으로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내심 이를 갈았다. 그는 이 멍청한 인물을 빨리 정리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손을 더 써봐야겠어.’
* * *
안병우 차관보가 재정 경제원의 소극적인 정책을 보자 참을 수가 없어서 연락한 이는 다름 아닌 IMF 피터어빙 재정국 수석자문관이었다.
두 사람은 하버드 대학 동기로 대학부터 서로 알고 지냈다.
서로 뜻이 맞아서 지금까지 계속 연락했고 말이다.
이번 IMF 권고안이 빠르게 진행된 이유도 피터어빙 수석 자문관이 손을 써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