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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수 실장이 결국 꼬리를 말았다.
한병수 실장을 아는 이라면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비슷한 경우다. 그는 이번 일을 진행한 후에 배후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는 설마 LC 전자가 꼬리를 말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최문경 부회장이 뒤늦게 파악한 정보는 충격 그 자체였다.
LC 전자가 KM 센서와 무려 100만 대의 CMOS 카메라 센서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는 것이다. 매입 단가는 기존 가격에 비해 20%가 더 비쌌다.
물론 지금처럼 휴대폰 판매가 저조한 경우는 예외였다.
LC 전자의 휴대폰 판매가 본궤도에 오를 때의 공급 계약이다.
모두 200억 물량이다.
문제는 계약이 이게 다가 아니란 점이다.
애니 모바일 솔루션을 LC 그룹에 공급하기로 조항을 달았다.
다만 이 계약은 오성 전자가 우선인 터라 뒤로 밀렸다.
KM 센서가 양산하게 되면, 오성 전자 다음 순위를 약정받은 것이다.
‘설마 타이거 펀드가 이 사실까지 사전에 알았다는 말인가? 하지만 결정은 LC 전자에서 내리는데,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걸까?’
그로서는 도통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사건이 꼬이면서 일어난 일들이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 정보를 얻기가 무섭게 최용욱 회장을 찾아갔다.
“아버지, 이 소식 들었습니까? 이거 자칫하면 LC 그룹과 적대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무슨 뜻이냐?”
“이번 CMOS 모듈 공급 계약은 너무 일방적이어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갑질을 하기라도 했다는 소리야? 그건 민혁이 그 녀석이 나에게 중재를 맡겨서 진행한 일이야. 이상한 일이 아니다.”
최용욱 회장은 혀를 차면서 말했다. 그 역시 손자 최민혁이 이 문제를 자신에게 맡길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LC 전자 역시 오히려 마음 편하게 나왔다.
그들은 굳이 최민혁 실장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걸 걸고넘어졌다.
“겉으로는 좋아 보입니다. 하지만 LC 전자, 아니, LC 그룹이 어떤 기업입니까? 그들이 을의 입장이었던 적이 있습니까?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에게 원한을 가질 것이 분명합니다!”
“야!”
“회장님, 전 정말로 우리 그룹을 걱정해서 하는 충언입니다!!”
“지랄하네!”
최용욱 회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자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지난 가족 식사 모임에서 충분히 경고했다고 생각하는데, 최문경 부회장은 전혀 자신의 충고를 듣지 않았다.
“도대체 너는 결론이 어떻게 그렇게 나냐? 설마 아직도 김연석 팀장 그놈에 대한 앙금을 털어 버리지 못한 거야? 그 일은 네놈이 무조건 잘못한 거야!!”
“절대로 아닙니다. 전 어디까지나 회사가 걱정돼서 하는 말입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강하게 부인했지만 내심을 숨기지는 못했다.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일단 김연석 팀장 이야기는 더 하지 않았다.
“LC 전자는 카메라 모듈을 KM 센서에서 공급받을 수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바로 LC 계열사 한 곳에서 이미 카메라 모듈 생산을 준비 중입니다. 이번에 계약을 하면 그게 다 엉클어지는데, LC 그룹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번 계약을 할 리가 있습니까? 실무진의 분노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실제로 최민혁 실장의 전생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다만 최용욱 회장은 그런 일까지는 잘 몰랐다.
“그건 LC 그룹이 알아서 할 일이야. 우리가 나서서 뭐라고 할 수는 없다.”
“아니, 아버지, 제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세요. 민혁이 그놈이 LC 전자를 협박하지 않고서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최용욱 회장은 움찔 몸을 떨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지적이 틀리지 않았다. 이번 계약은 확실히 LC 전자가 무리수를 뒀다.
그 자신은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내지 않고 싶어서 따로 조사하지는 않았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그건 LC 전자 차원에서 한 일이다. 정 뭔가를 하고 싶으면, LC 전자 측에서 확답을 얻어 와.”
“아니, 제 말은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민혁이 그놈이 LC 전자를 대놓고 협박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걸 우리가 중재해야 합니다!”
“…증거를 가져와.”
“아버지!”
“다시 말하지만 증거를 가져와라. 네 말은 더 믿을 수가 없다!”
최문경 부회장은 단호한 최용욱 회장의 태도에 내심 이를 갈았다. 하지만 그도 지금 당장은 뾰쪽한 방법이 없었다.
‘한 6개월만 더 시간이 있어도 이 모양이 되지는 않았을 텐데…….’
특히 최용욱 회장이 보유한 KM 그룹 주식이 문제였다.
원래는 최문경 부회장이 그걸 다 받기로 했었으니까.
최민혁 실장이 바로 KM 전자 기획실장으로 갈 때 말이다.
* * *
최문경 부회장이 난리를 치고 있을 때 이 정보는 최민혁 실장의 귀에도 들어갔다.
최민혁 실장은 될 수 있으면 LC 전자와 직접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을 대리인 삼아서 중간에 적당히 일이 굴러가게 하였다.
조성돈 팀장은 뒤늦게 이 정보를 알고 나서는 혀를 내둘렀다.
“최 부회장님은 도대체 우리 그룹 부회장인지, LC 그룹 부회장인지 모르겠습니다.”
“질투 때문이죠.”
“아무리 감정이 상했다고 해도 이번 일에 LC 전자 편을 들다니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이번 일이 잘 풀리면, KM 센서 임직원들을 통해서 말이 돌기 시작할 겁니다. 그건 다른 계열사에도 영향을 줄 거고요.”
KM 센서의 카메라 모듈 납품은 결국 다른 계열사 임직원들에게도 영향을 준다.
매출 자체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특히 KM 산업은 그 여파가 더 컸다.
“LC 그룹 계열사 납품이 늘어날수록 KM 산업 매출은 더 늘어날 겁니다. 제 영향력은 더 커지고요. 타이거 펀드 일이 그저 기대만으로 끝나지는 않는 셈이죠. 우리 부회장님은 그런 꼴을 보기가 싫은 거죠.”
“확실히 그렇군요.”
조성돈 팀장은 ‘타이거 펀드의 투자’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유언비어를 잘 알았다. 그런데 이번 LC 전자 거래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진실이 될 것이다.
결국 타이거 펀드와 관련된 황당한 뉴스조차 힘을 받을 것이다.
그건 KM 그룹에도 장기적으로 좋은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LC 전자와 HY 전자를 이용하려고 한 데니스 샐로먼 이사에게 좋은 사건이 될 수가 없죠.”
“결국 샐로먼 브러더스를 흔들 수 있다는 말씀이군요.”
최민혁은 씩 웃었다.
“그들은 결국 지금 진행하는 일에 더 무리수를 둘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에플 공매도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거죠.”
물론 이 일이 자칫하면 미국 다우존스를 흔들 수 있는 재앙이 될 수도 있었다.
다행이라면 최민혁 실장이 보험으로 사전 처리를 해놨다는 점이다.
‘설마 미국 상원도 날 블랙 리스트 0순위에 올리지는 않겠지?’
여전히 하원의 블랙 리스트가 부담스러운 최민혁 실장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괜히 그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말이 화가 된다면 정말 재앙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최민혁 실장 역시 만에 하나라도 일이 커지는 미래를 머릿속에 담고 싶지 않아서 굳이 말하지 않았고 말이다.
“…….”
“…….”
잠깐의 침묵.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헛기침하면서 탄식하고 말았다.
“알겠습니다. 하면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을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장승일 실장의 도움을 얻으세요. 이번 일 때문에 KM 그룹 전체적으로 이익을 봤을 테니 이전보다 더 살갑게 도와줄 겁니다.”
“…알겠습니다.”
조성돈 팀장은 이제야 장승일 실장도 최민혁 실장의 편에 설 것이라고 확신했다. 장승일 실장도 중도 노선을 걸을 수 없다고 확신했다.
‘그럴 수가 없지.’
* * *
최문경 부회장은 곧바로 LC 전자의 한병수 실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한병수 실장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했다.
“최민혁 실장과 타협을 보기로 결정했습니다.”
“아,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L, LC 전자가 뭐가 아쉬워서 KM 전자와 협상한다는 말입니까? 정말 진심으로 하는 말입니까?!”
“…네.”
한병수 실장은 나이 때문에 차마 최문경 부회장을 욕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은근히 LC 전자를 깎아내리는 최문경 부회장의 말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도 속상하기로는 자신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과 오성 전자의 대립을 지켜보면서 얻은 교훈이 많았다.
작년에도 최민혁 실장은 오성 전자와 노골적으로 대립했다.
그런데 지금 최민혁 실장은 작년의 그 최민혁 실장과는 격이 다른 인물이었다.
자기 임의대로 최민혁 실장을 적대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해서는 곤란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 올린 후계 구도 관련 실적을 다 날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지.’
사실 이번 싸움에 성과가 나왔다면 그걸 빌미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냉혹했다.
애니 솔루션을 전체 다 베끼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최민혁 실장이 고안한 기술 일부만을 도용하려고 했다.
바로 음성 인식.
그것도 MP3 플레이어에 적용해서 일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것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기술적으로야 적당히 따라갔지만, 상업적으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른 기업이나 실무진에서 경고할 때 들었어야 했어.’
이제까지 잘했는데 괜히 최민혁 실장에게 대응하려다가 점수를 다 잃고 말았다.
그는 또한 최문경 부회장의 말에서 자신을 미끼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도 깨달았다.
물론 아는 사실이었다.
‘휴,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최민혁 실장은 재정 경제원도 대놓고 밟아버린 인간이었다.
LC 전자를 흔드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최민혁 실장에 대한 오해였지만.
“…부 회장님이 한 조언은 고맙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LC 전자의 기획실장일 뿐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바는 명확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아버님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네.”
한봉준 사장도 이번 일은 한걸음 물러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이 휴대폰 관련된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은 하루 100대씩 팔리는 휴대폰 시장 미래를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이를 갈았다.
“이번 일은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
한병수 실장은 내심 최문경 부회장의 단호한 말에 이를 갈았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최민혁 실장 제안을 미심쩍게 생각한 것이었다.
‘정말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새삼 오성 전자의 권태성 기획실장을 비웃던 일을 떠올렸다.
권태성 기획실장이 무능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끌려다니기만 했다고 생각했다.
권태성 기획실장은 최민혁 실장이 껍데기만 남은 KM 전자의 사업부를 인수했다고 판단했다.
‘아니었어.’
그보단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정확했다.
최민혁 실장의 교묘한 수법에 놀아난 것이다.
그런데 그때는 최민혁 실장도 자금력이 없을 때였다.
지금은 그때와는 달리 조 단위 자금을 가진 이가 최민혁 실장이었으니.
‘하, 일단 여기까지만 하자. 더 나빠지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잖아.’
* * *
최문경 부회장은 내심 LC 전자 욕설을 죽어라 했다.
“10대 대기업 이름이 아깝다!”
그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가는 일이었다.
그는 혼자 방방 뛰면서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아니, 한편으로 당황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LC 전자는 이래서는 안 되는 이였다.
혹시나 싶어서 HY 전자 쪽을 확인해 봤는데, 그쪽도 꼬리를 말았다.
LC 전자 측에서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아니면 최용욱 회장이 중간에 중재했는지 침묵한 것이었다.
“비겁한 새끼들!”
그로서는 이번 일이 정말 충격이었다.
LC 그룹 같은 대기업이 가지는 욕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이 무서워서 아예 최용욱 회장을 중재인 삼아서 일을 해결한 것이었으니.
최문경 부회장은 방방 뛰기는 했지만 당장은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그는 결국 곰곰이 생각한 끝에 데니스 샐로먼 이사에게 연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