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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혁 전무는 갑작스러운 한병수 실장의 태도 변화에 당황해서 말을 돌렸다.
“아, 아니야. 다른 것 때문이 아니라 최민혁 실장 때문에 그래. 우리 회사에서 애니 솔루션에 대해서 관심이 많걸랑. 그 있잖아, 애니 아파트에 사용된 오성 전자의 가전제품 말이야.”
“…….”
한병수 실장은 그제야 인상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애니 기술이 애니 아파트에 적용되었으니, MP3에 적용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멍하니 박용혁 전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박용혁 전무는 아니나 다를까 고압적인 재벌 3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필요하다면 최민혁 실장을 압박할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HY 그룹 재벌 3세로서 당연히 할 행동이었다.
그로서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겉보기와는 달리 내심 속으로 이를 간 사람이 자신이니까.
“…최민혁 실장이 누구인지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박용혁 전무는 차가운 한병수 실장의 말에 움찔 몸을 떨었다. 그도 내키지 않지만 억지로 이 자리에 온 것이니 말이다. 요즘 최민혁 실장을 둘러싸고 나오는 이야기는 단순히 국내 소식뿐만이 아니었다.
미국과 관련된 이야기도 나왔다.
그런데 그 내용이 황당했다.
“모건 스탠리 같은 거대 투자 회사를 상대로 협박한다는 어이없는 소리도 있고, 아니, 너무 황당하잖아. 내가 오죽하면 자네를 찾았겠나?”
한병수 실장도 ‘모건 스탠리 이슈’는 잘 몰랐다. 정확히는 알고 싶지 않았다. 당장 발등에 떨어진 국내 문제가 더 컸다.
그는 진심으로 충고했다.
“최민혁 실장은 건드릴 생각을 마.”
“그만큼 힘이 있다는 소리야?”
“하아, 최근 나온 뉴스란만 모아서 살펴봐도 답이 나와.”
“하지만 우리 HY 그룹이 힘이 절대 약하지는 않아.”
그는 오히려 의아해서 반문했다.
“자네가 아니라? HY 그룹이라고? 설마 그룹 차원에서 최민혁 실장을 살피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가 열받았거든. 그 애니 아파트 말이야. 그것 때문에 오성 물산에 완벽히 한 방 맞았잖아. 그런데 솔직히 애니 아파트 기술이라고 해봐야 별것 없잖아. 애니 인공지능만 신경 쓰면 되잖아.”
한병수 실장은 한동안 조용히 웃기만 했다. 아니, 그는 배를 잡았다. 저돌적인 상대의 저런 모습이 장점일 수는 있었다.
그런데 상대를 잘못 골랐다.
“비웃는 거야?”
“아, 아니야. 뭐, 그 이야기나 계속하지. 계속 날 괴롭힌 것도 박 회장님과 안 회장님 사이 때문이었던 거야?”
“어, 그러니 오히려 기회일 수가 있어. 이번에 최민혁 실장을 잘 요리하면…….”
경영권 승계에 나름 주도권을 얻을 수 있는 일이었다.
한병수 실장도 그제야 박용혁 전무가 아주 허무맹랑한 야심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가 경험한 최민혁 실장은 정말 위험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가 조용히 최민혁 실장의 행정만 살피고, 그의 일방적인 제안을 들어주기만 한 것이었다.
“관둬.”
“뭐? 아니, 왜? 최민혁 실장이 무시 못 할 인물이라는 것은 알아. 하지만 약점은 있게 마련이잖아. 지금까지 KM 전자를 키우면서 착복한 비자금도 있을 거고…….”
“없어.”
“어?”
“너도 시간이 있었다면 알았을 텐데, 얼마 전에 국세청과 관련해서 말이 나왔잖아. 그것도 최민혁 실장이 만든 사태야.”
“에이, 그건 말이 안 된다. 최민혁 실장의 나이가 몇 살인데……. 저, 정말 그 일도 최민혁 실장이 직접 한 거라고? 최용욱 회장이 뒤에서 작업한 것이 아니라?”
“그래. 그러니 그런 생각 따위는 하지도 마.”
“…….”
한병수 실장은 잠깐 굳어 있는 박용혁 전무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그 자신의 충고가 그나마 먹힌 듯했다.
하지만 박용혁 전무의 눈빛은 곧 갈등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여전히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
그는 잠깐 고민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게 기회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직접 최민혁 실장을 공격하면 문제가 되어도 박용혁 전무를 밀어주는 것은 좀 다른 일이었다.
‘다만 확인은 필요하겠어.’
곰곰이 고민한 끝에 내린 결론.
“시간을 좀 더 줘.”
“뭐?”
“최민혁 실장에 대한 필요한 정보를 확인해 봐야 해. 설마 당장 나보고 뭘 해달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나도 전혀 몰라.”
“그, 그래.”
한병수 실장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속내가 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번 일은 어차피 예정된 일이었다.
‘최민혁 실장에게 이대로 끌려다닐 수만은 없으니까.’
* * *
최민혁은 LC 전자와 HY 전자 사이의 움직임을 꼼꼼히 보고받았다.
그는 덕분에 LC 전자가 이전과는 달리 어수선해진 것을 보고 받았다.
‘흠.’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LC 전자는 겉으로 인화단결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비수를 숨긴 기업이니까.
그가 이걸 잘 아는 이유는 전생에서 LC 전자에 제품을 납품한 적이 있었는데, 공급 하루 전날에 뒤통수를 맞은 기억이 때문이다.
덕분에 도약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배후에는 놀랍게도 최문경 부회장이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이 이권을 빌미로 내세워서 LC 전자를 부추긴 것이었다.
당시 그 자신은 피눈물을 흘렸다. 알고 보니 LC 전자는 늘 이런 수법으로 막 빛을 발하는 벤처 기업이나 중소기업을 밟아버렸다.
최민혁이 LC 전자를 상대로 보복하지 못한 것은 힘이 없어서였다.
KM 전자와 LC 전자는 겹치는 분야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LC 전자를 건드릴 방법이 없었다.
TV와 오디오 분야가 있었으니까.
보복 수단도 문제였다.
LC 전자는 호락호락한 기업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트로이 목마와 같은 방식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IPS-LCD가 그 시작이었다.
물론 지금까지는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졌다.
어차피 스티븐의 기조연설 효과가 LC 전자에게 청신호일 리가 없었다.
‘이제 한번 찔러 볼까? 본심이 나올 것도 같으니까. 어쩌면 우리 부회장이나 샐로먼 브러더스와 손을 잡을 수도 있으니까.’
그는 조성돈 팀장을 호출해서 이와 관련한 대안을 기획 팀에 요구했다.
* * *
KM 전자 기획 팀은 KM 그룹 내의 그 어떤 팀보다 바빴다.
이들 업무 영역이 최민혁 실장이 오너로 있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최민혁 실장이 각 기업의 경영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고 제안한 것과는 다른 행보다.
물론 정확히는 영업에 관여했다.
특히 각 계열사 가진 기술 시너지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말이다.
KM 전자 기획 팀은 그런 면에서 최민혁 실장을 존경했고 말이다.
그들은 때문에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받고 나서는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MP3 산업이 이제 서서히 물 위로 오르면서 이런저런 일이 많이 생겼다.
당연히 MP3가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배종대 과장은 이런 점을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아, 어째 LC 전자가 콜린스 부품 수급 관련해서 자꾸 제동을 건다고 했는데, 이게 이유였던 것 같네요.”
콜린스에 들어가는 부품 중에 브라운관이 있다.
이런 부품은 LC 전자에서 공급받았다.
아, 물론 오성 그룹 계열사 역시 납품한다.
어느 한 회사를 선택하지 않은 것이었다.
요즘 들어서 LC 전자가 이 부품을 명분 삼아서 계속 시비를 걸었다.
정성근 대리가 냉큼 반박했다.
“솔직히 LC 전자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요? 강한 대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배종대 과장은 좋다고 손뼉을 쳤다.
“이야, 정 대리, 오랜만에 화끈한 대답 하네. 역시 난 고구마가 싫어. 사이다가 좋지.”
늘 조용한 이정원 과장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솔직히 우리가 언제까지 참고만 있어야 합니까. 이건 정말 아닌 것 같습니다. LC 전자에 쓴맛을 보여줘야 합니다!”
박상기 차장이 혀를 내둘렀다.
“이봐, 배 과장, 이 과장, 자네 두 사람은 콜린스 매출 규모를 알고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자존심 때문에 그 매출에 손을 쓸 수는 없어.”
조성돈 팀장이 중간에 중재했다.
“콜린스 사업부 매각 이야기는 다들 알잖아? 괜히 문제를 크게 만들 필요는 없어.”
콜린스 사업부가 매각된다면 LC 전자와의 대립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후엔 LC 전자에서 오성 전자와 상대해야 할 테니까.
그런데 오성 전자가 과연 LC 전자와 제대로 싸우려고 할까.
수틀리면 그냥 오성 그룹의 계열사에서 부품을 납품받으면 될 뿐이었다.
그제야 다들 피식 웃고 말았다.
일을 극단적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대안이 필요했다.
정성근 대리가 슬쩍 눈치를 보다가 한 가지 의견을 내놓았다.
“직접적인 방법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면, 특허를 이용한 보복은 어떨까요?”
조성돈 팀장이 흥미를 드러냈다.
“정확히 어떡해?”
“IPS-LCD 특허 말이에요. 특히 LCD 관련 특허는 꽤 있는 것으로 알아요. 그걸 이용해서 LC 전자를 압박하면, 괜찮지 않을까요? 필요에 따라서 수위 조절을 할 수 있으니까.”
배종대 과장이 물개 박수를 치면서 환호했다.
“야, 역시 정 대리, 진짜 교활하다. 겉으로는 늘 얌전한 고양이 같이 지내더니, 속내는 흉악하기 짝이 없다니까. 특허 갑질이라니.”
정성근 대리는 자신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확실치 않은 배종대 과장의 말을 무시했다.
“다만 이것도 경험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렇다면 시즈벨을 앞세우면 딱 좋을 것 같아요. 욕은 우리가 안 먹으니까요.”
“흠.”
조성돈 팀장은 내심 혀를 내두른 채 박상기 차장을 쳐다보았다.
박상기 차장 역시 혀를 찼다.
아니, 기획 팀 대다수가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그들도 그제야 배종대 과장의 말이 전혀 근거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성근 대리는 늘 조용한 것 같아도 속내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은 물론 정성근 대리를 부정적으로 탓하지 않았다.
그는 적당히 기획 팀에게 시간을 주고 난 후에 이 정도에서 회의를 끝냈다.
* * *
“특허 갑질이라.”
최민혁 실장도 혀를 내둘렀다. 그도 미래 전생에서 늘 봤던 일이다. 특히 특허 괴물이 한국 대기업을 상대로 갑질해서 뜯어먹는 거 말이다.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이 만족한 듯하자 조심스럽게 말했다.
“시즈벨에게 적당히 말을 하면…….”
“아뇨. 그럴 필요가 없죠. 시즈벨이 알아서 해야 할 일이니까.”
“네?”
“어차피 시즈벨을 인수한 것도 이런 일 처리를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알겠습니다.”
최민혁 실장은 조성돈 팀장에게 지시해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를 호출했다.
“오, 최 실장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시즈벨 CEO가 된 이후로 외형상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가 이전과는 많이 달랐다.
그의 최측근인 마이클 리트 역시 비슷했다.
최민혁 실장은 제이미 니콜라스 CEO와 시간 낭비할 생각이 없었다.
“LC 전자를 좀 흔들어 주세요.”
“네?”
“요즘 MP3 시장이 뜨거운 거 아시죠? 그래서인지 LC 전자가 우리 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우리 직원 쪽과도 컨택을 많이 하니까.”
정확히는 스카우트였다.
LC 전자는 겉으로는 조용한 척했지만, 온갖 인맥을 다 동원해서 KM 전자의 핵심 인물을 빼가려고 아등바등했다.
그것도 뒤에서 말이다.
겉으로는 협력을 외쳤지만, 뒤로는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KM 전자 연봉이 어느 정도인지 안다면 말이다.
특히 상위 1% 임직원이 받는 연봉은 상상을 초월했다.
제이미 니콜라스 CEO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도 치열한 특허 업계에 있다 보니, 스카우트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다.
“어느 정도면 됩니까?”
“내심을 드러낼 정도?”
“…굳이 그럴 필요가 있습니까?”
그는 잠깐 머뭇거렸다. 제이미 니콜라스 CEO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 이번 일은 잘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대로 그냥 둘 수는 없으니 말이다.